1

2) 치떨리는 민간인대학살만행

 

 

□ 《귀신도 기가 막혀 통곡할 참극》

 

미제침략군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가는 곳마다에서 수많은 애국자들과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인민군대의 반공격으로 참패를 거듭한 미군은 남으로 쫓겨가면서 대대적인 살륙만행을 감행하였다.

 2

○ 로근리학살만행

 

《귀신도 기가 막혀 통곡할 참극》, 이것은 조선전쟁시기 미제의 로근리학살만행을 단죄하여 남조선출판물에 실린 글의 한 대목이다.

당시 미제침략군은 인민군의 반격에 몰리여 전전선에서 퇴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이리하여 미제침략군의 한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충청북도 영동군 주곡리(당시)일대에 이르게 되였다.

이때 미제침략군은 주변의 마을사람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줄테니 모두 모이라.》고 기만하고는 경부선철길을 따라 로근리로 끌고가 7월 26일 정오무렵 그들을 모두 철길우에 집결시켰다.

그때 미군통신병이 어디론가 무전련락을 한지 얼마후 정찰기 한대가 나타나 그들의 머리우를 몇바퀴 돌고가더니 이어 미군전투기 2대가 날아와 무작정 주민들의 머리우에 폭탄을 쏟아붓고 기총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철도레루가 엿가락처럼 휘고 수레를 끌고가던 소의 네다리가 갈기갈기 찢겨 하늘로 솟아올랐다. 철길우와 주변에는 순간에 100여명의 시체가 나딩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갈팡질팡 헤덤벼치다가 2개의 기차굴속으로 뛰여들어갔다.

그러자 미제침략군은 굴속에 대피한 사람들을 향하여 앞뒤쪽 야산에서 기관총을 쏘아대다가 그것도 성차지 않아 기차굴입구에까지 접근하여 미친듯이 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는 《부상병을 치료해준다.》는 구실로 굴안에 들어와 생존자들을 확인한 다음 또다시 기관총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끔찍한 살륙만행은 7월 29일 오전까지 감행되였다.

그날의 살인광경에 대하여 체험자들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어머니가 나를 안쪽으로 앉히고 바로 굴앞에 앉아계셨는데 온몸에 다섯군데나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녀동생은 한쪽눈이 피범벅이 돼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녀동생의 눈알이 빠져 데룽데룽 매달려있더라고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희생자들이 굴주변과 개울바닥에 널려있어 일부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막기 위해 시신들로 바리케드를 쌓기도 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개울에 흐르는 피물을 떠먹으며 나흘을 버티였다.》, 《난 한 미군병사를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요. 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쳤으나 계속 사격을 가하더군요. 총알 하나가 내 허리를 뚫고지나가 아이가슴에 꽂혔어요.》

이처럼 400여명의 로근리주민들은 자신들이 왜 미군의 총에 맞아죽어야 하는지도 모른채 미군의 총구앞에서  항변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말그대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로근리에서 감행된 미군의 이러한 야수적학살만행은 미제의 교활한 책동으로 흑막속에 묻혀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마련이다.

남조선에 조직된 《로근리사건진상조사반》은 사건현장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기술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미국이 1970년대초에 벌써 지뢰탐지기와 류사한 기술기재들을 동원하여 사건현장을 샅샅이 뒤지면서 탄피와 파편쪼각 등 증거물들을 없애버렸다는 중대한 범죄적사실을 밝혀냈다.

《로근리사건진상조사반》이 덧붙여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사건현장의 콩크리트구조물에서 아직도 박혀있는 50개의 탄알과 총탄자리 316개를 찾아냈으나 그 주변에 응당 있어야 할 탄피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미제가 로근리민간인대학살의 범죄를 영원히 흑막속에 묻어두기 위해 이미전부터 계획적으로 짜고들어 증거를 없애기 위한 비렬한 행위를 해왔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학살만행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주민들에 의하여 그 진상이 폭로되고  로근리대학살만행에 직접 참가했던 저들의 병졸들까지 나서서 증언하는통에 미제는 더는 어쩔수 없게 되였다.

그때 그 학살만행에 직접 가담하였던 전 미제침략군의 한 사병은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련락병이 달려와  <몽땅 쏴죽이라, 한사람도 남겨두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피난민도 거기에 포함되는가고 묻자 그는 <그렇다, 움직이는 모든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증언했다. 또한 소총수였던 패터슨은 《이것은 그야말로 대학살이였다.》고 시인하였다.

모든 사실은 로근리에서 저지른 미제침략군의 대량살륙행위는 사전에 면밀히 준비되여 감행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인범죄였다는것을 뚜렷이 실증해주고있다.

 3

○ 패주하면서 감행된 집단적인 민간인학살만행

 

미제침략군의 학살만행은 단지 로근리에서만 감행된것이 아니며 그들의 군화발이 가닿는 남조선의 곳곳마다에서 야수적으로 감행되였다.

1950년 여름 미제침략군은 경상남도의 창녕과 사천, 충청남도 조치원에서도 주민들을 잔인하게 집단학살하였다.

남조선통신 《련합뉴스》가 전한 창녕군 창녕읍 여초리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8월초 미제침략군의 한 무리는 이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집중사격을 들이대여 80여명을 숨지게 하였고 마을의 살림집 40여채를 불살랐다.

1950년 8월 3일에는 미제침략군이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덕승교를 폭파하여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60년에 발간된 《미군전사》의 기록과 이전 미군병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 만행을 직접 명령하고 지휘한자는 미제1기갑사단장 호바트 개이라는 미군소장이였다. 이자의 명령에 따라 덕승교에 미제14전투공병대에 의해 3t의 폭약이 묻혀졌다.

당시 미군병사 에드워드 데일리의 증언에 의하면 주민들이 물밀듯이 다리우를 지나가고있는것을 뻔히 보면서도 개이사단장은 찌차앞에 서서 《개같은 자식들, 다 날려버려.》라고 호통치며 다리폭파를 명령하였다는것이다. 이 명령에 의해 다리가 폭파되였으며 그로 하여 어린이와 녀성들을 비롯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한순간에 다리우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제14전투공병대의 문건에는 다리폭파와 관련하여 《작전이 멋있게 완료》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미군전사》에는 미제1기갑사단장이 다리폭파명령을 내린것은 자신의 《결단》이였다고 실토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한편 다리폭파가 있기 하루전인 1950년 8월 2일 미제1기갑사단소속 미군은 왜관부근의 철길을 따라 피난하던 주민 80여명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어 거의 전부를 멸살시켰다.

이 만행사건과 관련하여 로버트 러쎌이라는 이전 미군병사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그들을 전멸시켰다.》고 고백하였다.

미제의 야수적인 민간인학살만행은 통영에서도 감행되였다.

1950년 8월 14일 경상남도 통영에 달려든 미제침략군은 8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잡아가두었다. 그리고 녀성들을 모두 발가벗겨 겁탈한 후에는 총살하였으며 매일 20∼30구의 시체를 바다에 내던졌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에서 발간되는 《동아일보》, 《자유신문》(1960년 5월 22일부)은 그때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이 감행한 야수적학살만행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죄없는 량민들을 잡아다가 창고에 감금하고는 남녀 할것없이 옷을 벗게 하고 그들을 … 몽둥이로 란타한 후 20명내지 40명씩 바줄로 묶어 큰돌을 달아 바다물에 던져 수장하였다.

…그들은 물우에 떠오른 사람에게는 총을 쏘아죽였다.》

부산에서의 미제와 남조선군의 집단적인 학살만행은 오늘도 우리 겨레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1950년 7월초 미제와 리승만역도는 부산에 쫓겨간 이후부터 9월 중순까지 《불안요소》를 제거한다는 미명아래 당시 200만명이 집결해있던 부산시를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고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그 수는 너무도 많아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부산매일신문》이 폭로한데 의하더라도 미군과 남조선군은 1950년 8월 하순에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에서 사흘동안 수천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남조선신문 《중앙일보》에 의하면 1950년 7월말 미제침략군은 영동대학살현장 가까운 한 장소에서도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로근리학살사건이 감행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한 무리의 미제침략군은 로근리와 멀지 않은 곳에서 철길을 따라 가고있던 주민들을 발견하자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그들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어 순식간에 수백명 인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제는 저들의 후방지역에 속한 경상남도 의령군과 함안군에서도 치떨리는 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의령군 룡덕면 정동마을주민들이 폭로한데 의하면 1950년 8월 22일 저녁 미군정찰기가 마을상공을 맴돈데 이어 4∼5대의 미군전투기가 나타나 폭격과 기총사격을 들이대여 온 마을을 불태우고 30여명의 주민들을 살해하였으며 30여명을 부상시켰다.

함안군 군북면 장지마을주민들이 폭로한데 의하면 1950년 8월 20일 역시 미군정찰기의 정찰비행이 있은데 이어 2∼3대의 미공군기가 나타나 마을에 미친듯이 폭탄을 떨구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100여명의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고 하였다.

당시 주민들은 민간인이라는것을 알리기 위해 비행기들을 향해 흰색천을 련속 흔들었으나 미군비행기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격과 기총사격을 계속하였다.

이뿐이 아니다.

1950년 8월 3일 당시 경상남도 진주시의 여러 동들에서도 련일 쉴새없이 계속되는 미제의 기총사격과 폭격에 의하여 5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되고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제침략군폭격기의 무차별적폭격으로 전주시에서도 153명의 주민들이 살해되고 247명이 기총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1950년 8월 충청북도 충주군(당시)의 하담리에 날아든 미제공중비적들은 학생들이 공부하고있는 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하여 여러명의 어린 학생들을 살해하였으며 련이어 집과 재산을 잃은 리재민들이 림시 사용하고있는 한 중학교를 폭격하여 204명을 죽이고 24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  미제침략군은 남으로 패주하면서 서울에서 1만여명, 춘천에서 3만여명, 인천에서 근 5 000명, 수원에서 1 100여명, 충주에서 2 000여명, 공주와 평택에서 각각 600여명, 대전에서 8 600여명, 부여와 청주에서 각각 2 000여명, 전주에서 4 000여명, 안성에서 500여명, 김해, 의장에서 각각 750여명, 진영에서 335명, 군산과 안양에서 각각 400여명, 광주에서 3 000여명, 통영에서 800여명을 비롯하여 수많은 남녘겨레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4

○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학살만행

 

원래 형무소수감자들에 대하여서는 국제법적으로도 보호하게 되여있다.

그러나 국제법도 안중에 없는 미제침략자들은 조선민족멸살이라는 초기의 목적으로부터 그들을 대량학살하는 치떨리는 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1950년 7월부터 9월말까지의 기간에 미제는 중무장한 군경들을 동원하여 대전형무소에서 1 800여명을, 부산형무소에서 4 800여명을 총살하였다.

 

※  미국에서 살고있는 어느 한 교포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여있는 미군과 남조선군, 경찰이 대전에서 1 800여명의 《정치범》들을 집단학살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공개하였다. 공개된 사진에는 1950년 7월 대전형무소의 모습과 《정치범》재소자들이 땅에 쪼그리고앉아있는 장면 그리고 경찰들이 《론산》이라고 쓴 자동차에서 내리는 장면이 있다. 《정치범》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고있는 사진도 있는데 그속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나어린 사람의 얼굴도 보인다. 경찰들과 헌병들이 총살한 긴 구뎅이속에 널려있는 재소자들의 생존여부를 확인하고 시신을 묻는 장면을 그대로 찍은 사진도 있다. 이 사진들은 당시 미극동군사령부의 련락장교가 찍은것들이라고 한다.

 

미제침략자들은 대구형무소에서도 1 400여명의 《정치범》들을 집단학살하고 시체들을 수직갱에 처넣거나 매장해버리였다.

미제의 이러한 살인만행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미제침략군이 쫓겨가며 감행한 치떨리는 민간인학살만행은 살인마 히틀러나치스들의 만행을 훨씬 릉가하는 전대미문의 죄악이였다.

모든 사실은 미제침략군이야말로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야만의 무리이며 범죄의 집단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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