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전쟁과 미군의 만행
1) 조선전쟁의 도발자
□ 범죄적인 전쟁준비책동
미국도서 《아메리카현대사》에는 《실지에 있어서 월가의 조선인민에 대한 전쟁은 그 장군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1945년 9월에 시작되였다.》라고 씌여져있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는 전조선을 저들의 세계지배전략실현을 위한 군사기지로 전변시키기 위해 공화국을 반대하는 범죄적인 전쟁준비책동을 미친듯이 감행하였다.
○ 무력증강소동
미제는 무엇보다 침략무력증강책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미제는 조선전쟁을 《제2계단전쟁론》에 따라 도발하려고 하였다.
미제가 내놓은 《제2계단전쟁론》은 리승만역도를 부추겨 전쟁을 도발하고 《원조자》, 《지원자》의 탈을 쓰고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도발자, 침략자의 정체를 가리우자는것이였고 피를 적게 흘리면서도 그 결과를 독차지하자는것이였다.
이것은 트루맨이 고안해낸것이였다. 트루맨은 이미 1941년 6월 24일(파쑈도이췰란드가 이전 쏘련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 직후)에 이른바 《기다리는 전략》을 들고나왔다.
《기다리는 전략》은 《만약 도이췰란드가 승리할것 같으면 우리는 응당 로씨야를 도와야 하고 로씨야사람들이 승리할것 같으면 우리는 응당 도이췰란드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그들이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하여야 한다.》는 전략이였다.
미제는 이러한 《기다리는 전략》에 따라 우선 남조선군을 준비시키는데 기본을 두고 침략무력증강책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미제는 10만의 상비군, 5만의 예비군, 5만의 경찰, 20만의 《민병》, 도합 40만을 확보할 목표를 세우고 그 집행에 광분하였다.
이를 위해 미제는 리승만《정권》을 통하여 1948년 11월 《국군조직법》을 공포함으로써 《국방군》을 륙군을 중심으로 한 해군, 공군까지 다 갖춘 저들의 철저한 침략전쟁대포밥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미제는 또한 1949년 여름에는 《병역법》을 내오고 각 지방에 《병사구사령부》를 설치하여 남조선의 청장년들은 물론 녀성들까지 남조선군에 끌어가기 위한 강제징집소동을 벌렸으며 저들에게 충실하고 쓸모있는 군장교들을 길러내기 위해 1948년 8월에는 륙군통신학교, 11월에는 륙군포병학교와 륙군수색학교를, 1949년 1월에는 륙군보병학교, 륙군헌병학교를, 5월에는 륙군정보학교, 륙군경리학교를, 8월에는 륙군자동차학교와 양성학교를, 9월에는 륙군참모학교, 11월에는 륙군공병학교들을 내오고 거기서 필요한 각 병종 장교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가장 악질분자, 친미분자들을 골라서 미국군사학교들에 보내여 재교육을 받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1월사이에 반동적인 《호국군》훈련이니, 《청년방위대》훈련이니 하는 명색아래 수많은 청소년학생들과 16살부터 60살미만의 남자들을 강제로 끌어다 실전과 같은 군사훈련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한 서방출판물은 1948년 10월까지 미제의 《전쟁도발계획에 따라 우익청년단원으로서 군사훈련을 받은 남조선청년들의 수는 125만명에 달하였으며 그 목적은 북조선의 인민군무력에 대한 <10:1의 우위>를 보장하는데 있다.》고 폭로하였다.
미제는 1949년 8월까지 10만여명에 달하는 8개의 남조선군 보병사단(1, 2, 3, 5, 6, 7, 8보병사단과 수도사단), 3개의 독립대대(1, 2독립대대, 《호림부대》), 2개의 독립련대(기갑련대와 포병련대), 3개의 단(의무단, 통신단, 공병단)을 비롯한 수많은 륙군과 수십만의 방대한 예비병력을 모집하였으며 79척에 달하는 미국제, 일본제함선으로 장비한 해군무력과 11개의 공군비행단과 공군사관학교, 공군기지보장부대들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총알받이로 나설수 있는 남조선군무력만 해도 15만명에 달하게 되였다.
미제는 침략무력증강책동의 일환으로서 남조선군의 무장장비를 보강하고 늘이는데도 힘을 넣었다.
이를 위해 미제는 리승만《정부》로 하여금 예산의 45%이상 되는 거액의 자금을 군사비로 할당하도록 하고 1945년 9월부터 1949년까지 무려 10억US$이상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제공하면서 적지 않은 몫을 군사장비구입에 돌리도록 하였다.
※ 1949년 미국회 하원 외교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와 1950년 9월 22일 미상원 의원 코나리의 증언에 의하면 미제는 1949년에 리승만집권세력에게 약 1억 9 000만US$를 군사《원조》로 제공하였다. 그 《원조》속에는 미국제보총과 카빈총 10만 5 000정과 중기 및 경기관총 2 000정, 탄알 5 000만발, 2 000문이상의 반땅크포, 수많은 37mm포와 57mm무반동포, 105mm박격포, 각종 장갑차와 통신기재, 70만발의 포탄, 수천대의 군용자동차, 지뢰 및 폭발물 5만개, 함정 79척, 비행기 20대가 들어있었다.
미제는 그후에도 조선전쟁도발직전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수많은 무기와 장비, 군수물자들을 남조선군에 체계적으로 넘겨주어 전쟁준비를 다그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조선군은 1950년 6월까지 비행기만 하여도 추격기 25대, 수송기 9대를 포함하여 40여대를 보유하게 되였다.
미제는 이와 함께 남조선군부대들의 전투능력을 높이기 위해 1950년부터 《국방부》의 훈련명령 《교육각서》를 내고 6개월간 미군사고문의 지휘감독밑에 분대훈련으로부터 사단훈련에 이르는 전술훈련을 전면적으로 진행하였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는 38°선무장도발을 통하여 전투경험을 얻어야 한다고 떠벌이며 전쟁직전까지 연 수만명의 남조선군을 내몰아 공화국북반부를 공격하는 군사적도발을 빈번히 벌려 실전능력과 련합작전능력을 높이도록 하였다.
미제가 38°선무장도발을 통하여 추구한 목적은 남조선군의 전투능력을 높이는것과 함께 차후 무력침공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며 나아가서 그 연장으로 공화국에 대한 침공을 실현해보려는데 있었다.
1947년부터 전쟁도발직전까지 38°선일대에서 연 8만 3 800여명의 무장악당들이 동원되여 5 150여차에 걸치는 무장도발을 감행하였다. 미제의 사촉하에 감행된 무장도발행위들은 조선전쟁을 위한 《시험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군을 조직하여 저들이 그 통수권을 거머쥐고 미국식훈련, 미국식장비로 무장시켜 전형적인 식민지군대, 값눅은 고용병으로 만들었다.
○ 남조선에서의 군사기지화책동
미제는 조선전쟁도발을 위한 군사기지화책동도 강화하였다. 미제는 1947년 10월이전에 150만US$를 투자하여 서울-인천, 서울-부산사이의 간선도로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김포비행장을 경유하는 서울-인천사이 군용도로와 38°선 이남지대의 연선횡단도로도 건설하여놓았다.
제주도의 모슬포비행장을 비롯하여 김포, 남원, 수원, 광주, 대구 등지에는 침략적공군기지들을 새로 건설확장하였다.
미제는 300만US$를 들이밀어 남조선의 포항항구를 군항으로 확장개축한것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진해, 려수 등의 항만들을 개축하였으며 목포, 군산, 묵호항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저들의 함선들이 임의의 시각에 드나들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38°선 분계연선지대들에 비행기리착륙장들을 새로 건설하고 공화국을 공격하기 위한 반영구적군사시설들과 야전축성물들을 구축하였다.
이리하여 불과 3∼4년남짓한 사이에 남조선전역은 71개에 달하는 미제침략군의 군사기지들로 뒤덮이게 되였다.
○ 공격집단편성
당시 미제는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공격집단편성에도 광분하였다.
미제는 1949년에 《북벌》을 단행할것을 노리면서 이미 세운 군사작전에 따라 38°선일대와 종심에서 부대교체, 배비변경을 진행하고 1개 제대와 예비대로 작전대형을 편성하였다.
1949년 7월부터 8월에 도발하려던 《북벌》계획을 수정한 후 미제는 1제대련합부대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2개의 전투사령부를 새로 내오고 1950년 4월부터 6월까지의 사이에 이미 편성한 작전대형을 정비보강하였다.
또한 전쟁도발에 림박하여 1제대와 2제대사단들을 38°선일대에 접근배치하였다.
1제대부대들의 접근배치에 뒤이어 1950년 6월 11일에는 주타격방향에서 보병과 포병부대들이 진지를 차지하고 동시에 전반적전선에서 모든 부대들이 공격준비를 갖추고있도록 하였다.
작전전투물자도 38°선부근에 집중해서 쌓아놓았다. 서울과 옹진, 개성, 문산, 의정부, 동두천, 가평, 춘천을 비롯한 38°선부근과 그 가까운 종심에 저격탄, 수류탄, 포탄, 지뢰, 폭약, 식량, 의약품, 연유 등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집결하여놓았다.
그런가 하면 해군의 기본력량은 인천과 묵호에, 공군 1비행단은 김포에 기지를 두고 출동준비, 출격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한편 미제는 조선전쟁에 신속히 련속투입할수 있게 미륙군가운데서 미제8군(4개 사단)을 일본에 배치하고 땅크, 포, 수송수단들을 증강한 후 출동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1950년 5월 15일부터 일본 사가미만에서 륙해공군합동훈련을 진행한다는 미명아래 4월말부터 륙군부대들을 일본에 더 집결시켰다.
덜레스의 남조선시찰후 조선전쟁에 맨 먼저 투입될 부대로 지정된 미제24보병사단은 전투기술기재를 정비하고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또한 극동미공군의 주력인 3개의 항공군을 일본본토와 오끼나와, 필리핀에 각각 1개씩 전개시켰으며 마리아나와 캘러라이섬, 하와이에 여러개의 폭격기, 정찰기, 수송기비행부대들을 전개시키고 미국본토에는 전략공군비행대를 기본으로 하여 배치해놓았다.
그리고는 극동지역과 중서부태평양의 괌섬과 필리핀에 기지를 둔 미제7함대와 남조선과 일본 류꾸섬에 기지를 둔 해군부대들을 전개하여놓았다. 여기에는 각종 함선 26척, 비행기 약 140대, 병력 1만여명이 포함되여있었다.
미제는 조선전쟁도발직전에 미제7함대에 2척의 항공모함, 2척의 순양함, 6척의 구축함을 더 증강하였다. 1950년 4월부터 일본의 모든 조선소들에서는 짧은 시일안에 미군의 땅크상륙함선 70여척을 병력수송선으로 개조하여놓았다.
이러한 저들의 공격형의 무력배치에 대하여 당시 맥아더사령부의 정보부장이라는자는 《전쟁이 박두한 때에 동양을 방문중이였던 죤 포스터 덜레스는 <한국국방장관>과 동행하여 38°선에 서게 되였다.
리승만군의 거의 대부분은 벌써 실제적으로 38°선을 따라 배치되여있었다.》라고 자기 저서에 썼으며 오스트리아신문 《폴크스 슈팀메》 1990년 7월 16일부는 《맥아더는 해임된 후 자기의 진술서에서 전쟁전야에 미국은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모든 군수물자와 무기들을 38°선지역에 총집결시켰다고 실토하였다.》라는 글을 실었다.
○ 수정보충된 전쟁도발계획
미제는 조선전쟁준비의 한 고리로서 전쟁도발계획을 세밀히 짜놓고 그것을 여러차례 수정보충하여 완성하였다.
수정보충된 조선전쟁계획이 바로 《AL-3》계획이였다. 이 전쟁도발계획은 1950년 1월 미합동참모회의를 거쳐 미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토의되고 비준되였다.
수정완성된 조선전쟁도발계획의 주요골자는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 조선전쟁을 1950년으로 미룬다는것, 시간을 리용하여 미국본토와 일본에서, 특히 남조선에서 전쟁준비를 철저히 갖춘다는것이다.
· 남조선군과 함께 미군을 처음부터 조선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시킨다는것이다.
· 초기《북벌》행동계획에 예견하였던 공화국북반부의 동서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은 그만두고 38°선돌파에 집중한다는것이다.
· 유엔을 통하여 저들의 북침을 《남침》으로 외곡선전하고 동시에 유엔의 간판밑에 미군과 추종국가들의 침략무력을 합법적으로 조선전선에 투입하여 조선전쟁결속을 단숨에 《성공》시킨다는것이다.
이러한 미제의 전쟁도발계획은 1950년에 들어와 최종적으로 완성되였으며 그에 따라 실천행동으로 하나하나 옮겨졌다.
이밖에도 미제는 미국본토와 일본에서도 조선전쟁도발을 위한 준비책동에 열을 올리였다.
이 모든 사실들은 미제야말로 청소한 공화국을 요람기에 교살하고 전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군사기지로 전변시키기 위하여 침략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감행한 간악한 침략자, 전쟁범죄자이라는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