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비린내나는 범죄적학살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리승만《정권》을 조작한 미제는 온 남녘땅에 식민지적파쑈체제를 수립하고 수많은 애국적민주력량과 인민들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탄압학살만행을 감행하는 길에 들어섰다. 남조선인민들속에서 미제와 리승만역도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가는 속에 당시 남조선신문 《중앙일보》 1948년 6월 18일부는 미제의 범죄적만행을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남조선인민들의 웨침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민중은 압박과 기아로 사경에서 신음한다.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여 생명재산에는 아무 보장이 없다. 독립운동할 자유는 날로 더 봉쇄된다. 우리에게는 아무러한 자유도 없다. 이 땅의 초목곤충이라도 분노를 참지 못할것이다. 우리는 더 미련과 인내를 가질 여지가 없다. …삼천만은 총궐기하여 통일독립을 완성할 때까지 투쟁으로 단결하고 단결로 투쟁하여야 할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미제는 전쟁준비를 다그치기 위해 정치적《안정》과 후방의 《안전》이라는 명목아래 전쟁사환군들을 남조선에 파견하여 리승만역도를 파쑈폭압에로 부추겼다.
당시 미제의 대조선정책의 현지집행자인 미국대사 무쵸는 1949년 5월 《국방부》 장관 신성모와 《내무부》 장관 김효석을 불러들여 《당신들뒤에는 미국이 서있으니 만사는 우리를 믿고 우리의 권고와 지시를 충실히 실행하여주기를 바란다. 모든것의 해결은 힘이다. …당신들은 이 정세와 의도를 잘 리해하고 모든 준비에 유감없도록 류의하며 38°선 이북에 대한 총진군의 시기가 하루라도 속히 오도록 힘써주기 바란다.》고 하였는가 하면 1949년 6월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 경찰고문 삐아드와 신성모, 김효석 등과 모여 《북벌》예비대책을 토의하는 자리에서 《북벌》을 단행함에 있어서 다른 준비도 필요하지만 《보안법》을 내걸고 남조선의 민주애국력량을 무자비하게 소멸하여야 한다고 고아대였다. 이것은 미제가 전쟁을 앞두고 민주주의적이며 애국적인것에 대한 전면말살을 노린것이였다.
○ 남조선인민들의 민주주의적인 활동을 말살하기 위한 책동
미제침략군은 남조선에서의 정당, 사회단체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1949년 9월부터 10월사이의 기간에 132개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미제의 파쑈적강권에 의하여 강제해산되였다. 미제와 리승만역도의 어용조직이며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들의 집단인 《국민회》와 《한국민주당》만이 《정당》의 명목밑에 그 존재가 허용되였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과 같은 반동테로분자들의 단체들을 통합한 관제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과 관제어용단체들인 《대한농민회》, 《대한부인회》 등의 활동만이 허용되였다. 그런가 하면 학원내에는 《학도호국단》이라는 관제어용단체가 조작되였다. 이처럼 미제와 리승만역도는 남조선에서 저들에게 철저히 복무하는 관제어용단체들만이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책동하였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또한 파쑈화정책의 중요한 고리로서 언론기관에 대한 야만적탄압도 강화하였다.
리승만《정권》이 조작된 직후에 《조선통신》이 강제해산되고 뒤이어 《국민신문》, 《제일신문》, 《세계일보》 등이 련이어 강제페간되였다. 1949년초에는 이른바 《신문지법》을 조작하여 남조선인민들로부터 언론, 출판에 대한 초보적인 자유까지 완전히 빼앗았다.
○ 애국인사들에 대한 살해사건
미제는 온 남녘땅을 파쑈의 란무장으로 만들고 자주, 민주, 통일을 주장한 사람들을 야수적으로 테로, 학살하였다.
김구에 대한 테로암살행위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해방전에 독립과 《반공》을 떠들면서 《상해림시정부》에서 활약한 완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는 해방후 남조선에 돌아가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반공》을 떠들었다.
그러나 1948년 4월남북련석회의를 계기로 《한국독립당》 당수의 자격으로 평양에 왔던 김구는 그후 조국의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정신상태에서의 변화를 알게 되자 미제는 김구를 사살하기 위한 모략을 꾸몄다.
김구암살계획은 미중앙정보국의 비밀지령에 따라 1949년초에 세워지고 미정보계통의 조종을 받는 남조선반동단체의 하나인 《88구락부》에서 구체화되였다.
김구암살의 집행자로 안두희라는자가 선정되였다.
안두희는 해방전 평안북도 룡천벌의 대지주의 아들로서 일제기관에 복무하였고 해방후 월남도주하여 테로단체에 들어간자였다.
안두희는 한고향사람인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을 자주 찾아가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뢰물을 섬긴 덕에 《한국독립당》의 상층인물들과 상종할수 있었다. 이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구에게 접근하여 낯을 익히면서 그의 신임을 얻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편 미제와 그 주구들은 김구의 거처지를 습격할 구실을 만들려고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한 《사건》의 지명수배자가 김구의 경교장에 숨어있다는 허위소문을 퍼뜨렸다.
1949년 6월 23일 밤 안두희를 포함하여 8명이 김구의 거처지를 습격하였으나 곧 실패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미제와 그 주구들은 6월 25일 김구가 공주에서 진행되는 한 모임에 참가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임이 취소되는것으로 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6월 26일이였다. 낮 12시경 남조선군 소위복장을 한 안두희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안두희가 노리고 또 노리던 절호의 기회가 차례졌다. 다시는 마련할수 없는 가장 적중한 기회라고 생각한 안두희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권총을 꺼내였다. 돌연 4방의 총성이 울렸다. 김구는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렇게 되여 김구는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였다.
김구살해사건은 당시 서울주재 미국대사관의 정보원이였던 고정훈의 고백으로 그 진상의 전모가 드러났다.
내외여론과 항의에 의하여 1949년 8월 6일 안두희는 형식상 벌린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몇달후에는 15년형으로 감형되였다. 그후 1950년 6월 27일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였다. 안두희는 미제와 남조선당국의 주선으로 후에 승급하여 호화생활을 하다가 1996년 10월 23일 어느 뻐스운전사의 몽둥이찜질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미제는 남조선인민당 당수였던 려운형에 대한 테로암살행위도 감행하였다.
1947년 7월초 어느날이였다. 하지는 미군정보기관 《G-2》의 지령을 통하여 서울《경찰청장》으로 있던 장택상에게 려운형을 살해하라는 《특별임무》를 주었다. 장택상은 즉시 반공테로조직인 《백의사》의 우두머리중의 한명인 신동운에게 그 집행을 지시하였다. 신동운은 테로에 솜씨있는 악질졸개들을 선발한 다음 암살장소와 행동날자를 선정하여 미제상전의 승인을 받았다. 려운형에 대한 암살은 이렇게 미제의 조종밑에 세밀히 준비되였다.
1947년 7월 19일 당시 려운형이 승용차를 타고 혜화동 네거리를 지나가고있을 때였다.
파출소옆골목에서 불의에 달려나온 화물차가 승용차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백주에 두방의 총소리가 네거리상공에 울렸다.
차창을 뚫고들어온 총탄에 치명상을 입은 려운형은 인차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려운형은 이렇게 미제살인귀들의 모략에 의하여 무참히 피살되였다.
이렇듯 미제는 테로의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바라는 수많은 애국적인사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러한 테로학살만행에 대하여 당시 미국의 한 출판물까지도 《남조선의 많은 지역에서는 세계에서 그 류례를 볼수 없는 테로가 지배하고있다.》고 전하였다.
○ 인민유격대《토벌》과 남조선군안의 《불온분자》숙청소동
당시 미제와 리승만도당에게 있어서 제일 큰 골치거리로 되고있은것은 바로 남조선인민유격대의 활동과 남조선군안에서 저들에게 고분거리지 않고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동경심이 짙어가고있는것이였다.
당시 남조선의 후방종심 여러 지역에서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반인민적폭압만행에 항거하여 조직된 인민유격대의 활동이 적극화되고있었다.
1949년 9월에 이르러서는 그 력량이 수만여명에 달하였는데 그들이 올린 전과는 매우 컸고 전투사기도 나날이 높아만 갔다.
이에 질겁한 미제는 인민유격대를 그대로 놔두고서는 저들의 전쟁준비는 물론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체제자체도 유지하기 어렵다고 비명을 지르며 그 《소탕》전을 긴급과제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1949년 가을 대전에서는 인민유격대《토벌》을 위한 미제와 남조선반동세력의 모의가 진행되였다.
모의에서는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가 세운 《토벌》작전안이 토의되였고 그 총지휘를 로버트가 직접 담당하였다.
모의가 있은 후 대전에는 《토벌사령부》가 설치되였고 지리산지구, 태백산지구, 오대산지구, 동해안지구, 중앙지구 등에 《토벌》분담이 맡겨졌으며 《소탕》무력이 편성되였다.
남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미군과 남조선군의 《소탕》전은 매우 무차별적으로 참혹하게 감행되였다.
인민유격대《토벌》에 대한 총지휘를 맡은 로버트는 오대산, 태백산, 팔공산, 지리산, 고현산, 속리산, 덕유산, 로령, 월출산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격대와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기 위하여 대량학살, 집단방화, 주민의 강제추방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특히 산간주변의 《부락은 전부 불질러야 한다.》고 뇌까렸다.
그리하여 1950년 1월까지 인민학살과 유격대《토벌》에 무려 4만 2 000여명의 남조선군경들이 동원되였다. 이자들은 《초토화전술》을 쓰면서 닥치는대로 불지르고 학살하고 주민들을 쫓아내는 귀축같은 만행으로 수많은 인민들을 마구 학살하였다.
실례로 1949년 12월 24일 경상북도 문경군 전봉리(당시)에서는 미군이 마을에 달려들어 22채의 살림집을 불살라버리고 23세대의 가족 82명을 마을앞 논바닥에 끌어내다 총살하고 그 시체에 불을 달았다. 이들중에는 녀자 41명, 《국민학교》 학생 10명, 갓난애기 5명 등이 포함되여있었다. 문경군의 다른 한 산간부락에서도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50여명의 주민들을 구뎅이앞에 몰아세우고 기관총으로 집단학살하였다.
이러한 살륙만행을 지휘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란자는 만행이 끝난 후 촬영기를 들이대고 피비린내나는 학살장면을 촬영까지 하였다. 로버트는 그후 촬영사진을 꺼내보이면서 《인도주의적견지에서 본다면 이런것은 악한것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 당신들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저 한다면 언제든지 이런 일이 발생할수 있다는것을 마음속에 먹고있어야 한다.》라고 피에 주린 승냥이의 본성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놓았다.
※ 당시 미제침략군과 남조선군은 1949년 7월부터 그해 12월 중순까지 6만 2 000여명의 애국적인민들을 학살하였으며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까지의 기간에 진행한 이른바 《동기토벌작전》에서 4만여명의 인민들을 학살하였다. 이 7개월간에 학살된 인민들의 수는 미군의 남조선강점이후부터 1949년 7월까지 4년간에 학살된 9만 3 000명보다 9 000명이나 더 많았다. 또한 1949년 1월부터 1950년 2월까지 기간에 20만호의 농가를 불태워버리고 100여만명의 농민을 길거리에 내쫓아 류랑걸식하게 하였으며 굶어죽게 하고 얼어죽게 만들었다. 경상북도 문경군, 봉화군을 비롯한 7개 군에서만도 1만 9 0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이 학살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1948년 10월 제주도인민탄압에 내몰리는것을 반대하여 투쟁에 일떠선 남조선군안의 애국적병사들과 제주도봉기를 지지해나선 남녘겨레들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남녘겨레의 투쟁은 10월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였다. 이에 질겁한 미제는 1948년 10월 19일 려수주둔 제14련대에 제주도인민들의 애국투쟁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려수군인들은 출동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10월 20일 려수를 점령하고 이어 순천, 보성, 광양, 구례를 해방시켰다. 폭동에는 미제와 그 주구들에 대한 반항심으로 끓고있던 이 지역 인민들이 합세하였다.
극도로 당황한 미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려수와 순천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비행기와 땅크, 포를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감행하였다.
미제는 군인폭동을 진압함에 있어서 군인들뿐아니라 민간인들도 무차별적으로 살륙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정보기관 보고서는 《진압군은 공산주의폭동에 협력을 했다고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무조건 쏴버렸다.》라고 기록하고있다. 려수와 순천은 피바다, 불바다로 화하였다.
미제와 리승만《정부》가 축소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5 000여호의 가옥이 불타고 6 000여명의 인민들이 학살되였다.
※ 1948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려수의 경우 사망자 1 300명, 중상자 900명, 경상자 3 500명, 이중 민간인사망자가 1 000명이상을 헤아린다.
※ 려수군인폭동이후 불과 10일사이에만도 《사형집행》이라는 공식적인 간판아래 폭동군인들과 남녀시민 2 300여명이 잔인하게 학살되였다.
특히 미제침략자들과 리승만역도는 순천에서 《폭동군을 도와주었다.》는 리유로 120여명의 녀학생들을 잡아다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야수적방법으로 고문학살하였으며 300여명의 주민들을 순천《국민학교》에 가두어놓고 200여명을 그자리에서 총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와 같은 피비린내나는 학살만행에 대하여 남조선에 주재하고있던 미국대사 무쵸란자는 《혐의자들을 과단성있게 처리한것은 현명한 방책으로 본다. … 비상수단으로써 진압을 유효하게 한것은 칭찬할지언정 비난할 여지가 없다.》라고 살인귀적본성을 드러내놓았다.
이 학살만행의 직접적지휘자는 미제침략자들이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 미군사고문단 본부에서 발견된 1949년 1월 27일부 《검거된 군인들의 총살의 건》이라는 문건에 의하면 남조선군 제2려단장 《고문》 미륙군소좌는 려수, 순천군인폭동에 참가한 69명의 애국자들에 대한 총살을 직접 조직집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미제가 남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인민학살만행의 장본인이라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미제는 또한 이른바 《숙군》의 구실밑에 수많은 애국적이며 량심적인 군인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려수군인폭동에 이어 1949년 5월 춘천에 있던 남조선군 1개 대대와 홍천에 있던 1개 대대가 미제의 총알받이놀음을 하는 《국군》생활과 결별하고 집단적으로 의거입북하여 인민군대에 편입되였다. 이를 전후하여 남조선군안의 해군들도 함정을 끌고 의로운 의거입북을 단행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제는 그 위기를 막아보려고 미군사고문단의 주관하에 《정보국장》을 책임자로 하는 악질분자들로 《조사반》을 조직하였다.
악질적인 《조사반》에 망라된자들은 남조선군안에서 《공산첩자》를 제거한다는 명분밑에 눈에 거슬리는 장교, 사관, 사병들을 잡아다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심문, 고문을 들이대였고 가혹하게 학살하였다.
숙청된 대부분이 사병들이였으나 그가운데는 련대장급의 장교와 대대장, 중대장 등 중하층장교들도 적지 않게 들어있었다.
이와 같이 남조선의 이르는 곳마다에서는 미제에 의한 피비린내나는 야수적학살만행이 끊임없이 감행되였다. 이로 하여 온 남녘땅은 하나의 거대한 인간도살장으로 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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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침략군의 인천상륙 |
미제침략군에 의해 그어진 민족분렬의 38˚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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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에 의한 인민위원회 강제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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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해가는 미제침략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