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과 범죄의 력사
1. 미군의 남조선강점
1) 남조선에 기여든 범죄의 무리
□ 범죄의 첫 총소리
일제의 패망으로 삼천리조국땅우에 드리웠던 검은구름은 가시여지고 우리 민족이 그처럼 애타게 고대하던 해방의 날은 오고야말았다.
온 나라 방방곡곡은 해방의 기쁨과 희열속에 끝없이 설레이고있었다. 말그대로 삼천리강산은 찬연한 아침해발과 같이 희망에 넘쳐 빛나고있었다.
그러나 우리 겨레의 가슴마다에 부풀던 환희와 희망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미제가 38°선 이남의 조선땅을 군사적으로 강점하였기때문이다.
《38°선 이남의 일본군대 무장해제》라는 련합국들사이의 《전시협정》을 구실로 미제침략군은 일제가 패망한지 거의 한달이 되여오던 1945년 9월 8일 그야말로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조선반도의 남쪽에 기여들었다.
새벽 3시경 하지를 사령관으로 하는 미제침략군 제24군단을 실은 함대가 인천앞바다에 들어섰다.
이 함대가 오끼나와를 떠난것은 3일전인 9월 5일 새벽이였다. 그때 오끼나와섬의 태평양연안에는 미제7함대소속의 함선 40여척이 모여있었다. 하지는 거기서 《블랙리스트》라는 암호의 작전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의 첫 단계 과업은 미군을 조선에 투입하라는것, 조선의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장악이 급선무라는것, 서울을 장악한 다음 부산, 기타 지역에로 확대해나가라는것, 점령한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라는것 등이였다. 이와 같은 임무가 하지의 미제24군단에 하달되게 된것은 이 군단이 조선으로 진출하는데서 제일 가깝다고 볼수 있는 오끼나와에 머물러있었기때문이였다.
사실 이보다 앞서 8월 27일 하지는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에게 불리워가 다음과 같은 명령을 직접 받았다.
《귀관은 조선반도진주 미군의 최고사령관이다. …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후 <미군정>을 실시하라. 이 지침의 수행을 위한 세부계획을 작성하라.》
이튿날 오끼나와로 되돌아온 하지는 명령수행을 위하여 즉시 《군정》실시를 위한 《미군정》기구를 만들었다.
남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을 위해 군대를 출발시키기에 앞서 하지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떠벌이였다.
《미군이 남조선을 점령하건 태평양의 어떤 섬을 점령하건 마찬가지 점령이다. 우리는 적의 점령지대를 점령하는 점령군이다. 우리의 행동도 이에 상응하는것이 될것이다.》(남조선도서 《한미관계 50년사》 4페지)
남조선을 점령지대로 규정하고 그 준비를 갖춘 미제24군단은 마침내 9월 5일에 오끼나와를 출발하게 되였다.
미제침략군의 인천상륙은 바로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미군의 인천상륙에 깔려있는 범죄적기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하였다. 단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온것으로만 알고있었다. 그것은 당시 인천항에 많은 군중이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와있었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하지만 9월 8일 인천항에서 울린 총소리는 미군의 상륙이 곧 미군범죄의 시작이라는것을 온 남녘땅에 예고해주었다.
그날 일제경찰은 미군을 《해방군》인줄로만 알고 환영나왔던 군중들에게 마구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하여 해방된 조국땅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참변이 벌어졌다.
얼핏 보기에는 이 사건이 마치 일제경찰에 의해 빚어진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이 류혈극을 연출한 장본인이며 주범은 바로 미군이였다. 그것은 일제에게 살인권한을 부여한것이 다름아닌 미제침략군이였기때문이다.
그 범죄적내막을 보기로 하자.
당시 미제는 남조선강점작전에 병력을 들이밀 형편이 못되였다.
그것은 저들의 침략무력이 조선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오끼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해있었고 또 조선에 상륙시킬만 한 수송수단도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때문이였다.
이에 대해서는 1945년 7월 24일 당시 미륙군 참모총장이였던 마샬이 련합국 포츠담작전회의에서 조선에서 미군이 작전을 펼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실토한 사실과 미국정부안에서도 38°선문제를 론의하면서 당시 형편에서 병력수송능력이 걸리고 기타 사정들로 하여 남조선에 있는 일본군대의 《무장해제》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넉두리들이 터져나온 사실들이 여실히 확증해주고있다.
여기로부터 미제는 패망은 하였으나 아직 남조선에 그대로 남아있는 일제를 리용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들이 남조선을 타고앉을 때까지 그들로써 남조선의 《치안》을 유지하려고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이였던 맥아더는 일제가 패망한지 5일이 되는 1945년 8월 20일 《조선총독》이였던 아베에게 특별명령을 내리였다. 그 내용은 남조선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지라는것, 만약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는것이였다. 이것은 결국 미군이 남조선에 갈 때까지 조선민족의 새 사회건설투쟁을 막으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는 일종의 명령이고 위협이였다.
한마디로 일제경찰에 의한 남조선의 치안유지란 미제가 저들의 군사적강점실현에서 빈구석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미봉책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것은 일제에게 살인권한을 부여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미제침략군이였다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게 한다.
일제경찰은 바로 미군이 부여한 이 권한을 가지고 9월 9일에는 서울시 성북구에서, 그 다음날에는 서울각지에서 해방만세를 부르는 청년들에게 총을 란사하여 무리죽음을 내였다.
일제경찰이 인천항에서 감행한 총격사건을 두고 미군이 자기들에게 내린 명령에 따라 《치안과 질서유지를 위해 발포했다.》고 정당화한 사실과 미군이 이 사건을 일제경찰의 공무집행으로 밀막아버림으로써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행위가 무난히 막을 내리게 한 사실들은 과연 누구에 의해 인천의 하늘가에 범죄의 총소리가 울려퍼졌는가를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이로써 미제침략군의 인천상륙은 결코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있는것이 아니라 남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데 있었다는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였다.
남조선도서 《로근리 그후》는 이렇게 전하고있다.
《남조선주둔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남조선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미군은 그 첫날부터 사실상의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가 하면 남조선의 《한국민권연구소》는 인터네트(2007년 8월 2일)에 이런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남조선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때부터 주<한>미군의 범죄는 시작되였다.
미군은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가봐 미리 완전무장한 일본인군경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외출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이 우리 나라를 일제로부터 구원해준 <해방군>이라 하여 미군을 환영하고저 인천항에 모여들었다가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리유로 일본경찰의 총격을 받아 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것이다. 시민들의 항의에 미군당국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며 오히려 일본경찰을 두둔했다. 이것이 바로 주<한>미군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로 기록되고있다. 죄명은 <살인방조>, 아니 <살인교사>라고 해야 하나?》
이처럼 1945년 9월 8일에 감행된 미제침략군의 인천상륙은 미군범죄의 첫시작이였으며 인천부두가에 울린 총소리는 침략자, 강점자, 범죄자로서의 미군의 실체를 드러낸 첫 움직임이였다.
1945년 9월 8일이야말로 나라의 절반땅인 남조선이 일제를 대신한 미제의 군화발밑에 짓밟힌 저주로운 날, 민족비운의 날이였으며 미군범죄의 막이 오른 치욕의 날이였다.
◇부록◇
《셔먼》호사건
조선에 대한 미제의 피묻은 침략의 력사는 지금으로부터 백수십년전 침략선 《셔먼》호의 침입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아시아대륙에서 조선반도가 차지하는 전략적중요성을 간파한 미제는 남북전쟁(1861∼1865)을 끝마치고 조선에 대한 침략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1865년 화약과 포탄, 수많은 저격무기와 탄알 등을 싣고 90여명의 인원을 태운 《셔먼》호는 미국을 떠나 조선침략의 길에 올랐다. 원래 《셔먼》호는 1861년에 건조되여 《프란쎄스로이엘》(제1공주)호라는 이름을 달고 남북전쟁에 참가한 미국남부군에 소속된 군함이였다. 그러던것이 북부군에 나포되여 1863년에 개조된 후 전투함선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살인, 방화, 략탈로 악명을 떨친 당시 북부군 서부방면군 사령관 셔먼의 이름을 따서 《제너럴 셔먼》(셔먼장군)호로 고쳐불렀다.
조선에 대한 예속적인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 범죄적인 원정을 단행한 미제침략선 《셔먼》호는 처음에 순수 상업적목적으로 조선에 가는 평화적인 상선으로 가장하였다. 미국을 떠난 때로부터 한해가 지난 1866년 8월 16일 미제침략선 《셔먼》호가 대동강어구에 침입하였다.
미제침략무리들은 조선측의 인내성있는 여러차례의 경고도 무시하고 연해측량을 계속해가며 당시 평양부부근 포구에까지 기여들었다.
그리고는 평양부 관리들의 정당한 요구에 《교역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돌아갈수 없다.》, 《식량과 부식물이 떨어졌으니 그것을 보장해달라.》는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평양부 관청당국은 례의를 지켜 조난선처럼 여기면서 그들이 요구한대로 쌀, 고기, 닭알, 땔나무들을 해결해주며 조선법을 어기고 대동강을 거슬러올라가지 말고 순순히 물러가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지만 침략의 무리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동강 수심측량을 계속해가며 두루섬앞까지 기여들었다.
참으로 파렴치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침략자들이였다.
더우기 놈들은 평양까지 오는 동안 주변에 기여올라 부녀자들을 릉욕하는 등 온갖 야수적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그리고 8월 27일에는 감시근무수행중인 평양감영의 배를 습격하여 2명의 조선군인을 살해하고 또 한명을 랍치해가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저들의 범죄적죄행에 대하여 응당히 사죄할 대신 침략자들은 오히려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28일 평양감영의 대표와 가진 담판에서 자기들을 평양성에 들여놓으며 쌀 1 000섬과 많은 량의 금, 은, 인삼 등을 내놓으라고 오만하게 행동하였다.
이 강도적인 요구가 거부당하자 침략자들은 또다시 로골적인 략탈과 살인만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은 그대로 인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침략자들의 파렴치하고 오만무례한 행위에 격분한 조선인민은 투쟁에 궐기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선생님의 호소에 호응하여 투쟁에 일떠선 평양시민들과 군인들은 선생님의 지도밑에 결사대를 뭇고 적선을 불태워버리기 위한 화공전을 준비하였다.
9월초 결사대는 《셔먼》호를 향해 일제히 불배를 띄워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셔먼》호는 불붙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화약고가 폭발하고 침략선은 대동강에 침몰되였다. 배에 탔던 침략무리들은 전투과정에 사살되거나 불에 타죽고 나머지는 강으로 뛰여들어 도망치다가 붙들려 처단되였다.
이것이 바로 력사에 알려진 《셔먼》호사건이였다.
《남연군무덤도굴사건》
남연군무덤에 대한 도굴은 1868년초에 꾸민 조선에 대한 미제의 매우 음흉하고 강도적인 흉계로서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서 거기에 있는 보물도 손안에 넣고 유해를 미끼로 하여 《셔먼》호 격침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예속적인 불평등조약도 강요하자는것이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침략계획작성에 적극 협력한 유태인해적 오페르트자신이 쓴 기록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수 있다.
《조선사람들에게는 옛날부터 완고한 조상숭배에 대한 미신이 있다.… 대원군은 자기 아버지의 묘인 남연군묘를 자기의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있는데 이제 그것을 발굴하여 관속에 있는 매장물을 탈취하면 대원군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수 없다. 대원군과 조선정부는 매장물을 되찾기 위하여 <개국>의 요구에 응할것이며 조약에 조인하게 될것이다.》
이 음모는 미국정부의 지시밑에 상해주재 미국 총령사 죠지 시워드의 지휘밑에 추진되였으며 도굴단의 우두머리로 상해주재 미국령사관 통역관이였던 젠킨스가 임명되였다.
교활한 미국침략자들은 이 범죄적계획수행을 위해 조선인민의 이목을 딴데로 돌릴 목적으로 1868년 3∼4월(음력)기간에 군함 《쉐난도아》호를 침입시켜 대동강어구일대에서 도발책동을 감행하게 하였다. 한편 젠킨스일당은 680t급의 침략선 《챠이나》호에 8t급의 작은 발동선 《크레타》호를 달고 1868년 4월 8일(음력) 상해를 출발한 후 일본 나가사끼에 들려 석탄과 음료수를 보충한 다음 그곳을 떠나 4월 16일 충청도 아산만(당시)에 침입하였다. 4월 18일에는 충청도 흥주군 행담도(당시)에 기여들어 조선어민들의 배 2척을 강탈하였으며 100여명의 미국강도단은 《크레타》호와 두척의 고기배에 나누어 타고 삼교천을 거슬러올라와 덕산군 구만포(당시)에 상륙하였다. 여기에서 침략자들은 짜리로씨야군대로 가장하고 곧바로 관청으로 들이닥쳐 무기를 빼앗은 다음 관청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는 그길로 목적지인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당시)에 기여들어 무덤도굴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날 밝기 전에 도굴작업을 끝내고 달아나려던 그들의 목적은 이 지방 인민들의 항거로 하여 결국 실패하고말았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순순히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무덤도굴에서 실패한 미국침략자들은 또다시 4월 21일 경기도 영종도앞바다에 나타나 리조봉건정부에 불평등조약의 체결을 강요하는 협박장을 전해왔으며 25일에는 일부 무력을 영종도에 상륙시켜 이곳 인민들을 위협하는 한편 섬을 점령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러나 섬을 지키고있던 조선군사들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쳐 하는수없이 26일 상해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젠킨스도당의 천인공노할 만행은 국제여론의 강력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높아가는 세계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미국통치배들은 1868년 5월 18일 상해주재 미국령사재판소에서 젠킨스도당에 대한 《재판》놀음을 벌려놓았다.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연극으로 꾸며진 이 《재판》에서는 《증거불충분》이라는 구실밑에 이 강도단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내리였다.
이것은 미국강도배들의 교활성과 간악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연군무덤도굴사건》이 개별적인 해적집단에 의하여 감행된 범죄행위가 아니라 미국정부의 아시아침략정책에 따라 감행된 침략행위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조선원정함대》의 강화도침공
거듭되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1871년 3월 19일(음력) 중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와 미국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제스의 지휘밑에 수십문의 포와 1 230명의 침략군을 실은 기함 《콜로라도》호, 《얼래쓰커》호, 《베니씨아》호, 《팔로스》호, 《모노카시》호가 조선에 기여들었다.
침략자들이 가덕포를 거쳐 물치도부근에 침입한것은 1871년 4월 9일이였다. 이때 조선봉건정부에서는 물치도앞바다에 나타난 미국침략자들에게 되돌아갈것을 강하게 추궁하였다.
그러자 뻔뻔스럽게도 침략자들은 조선정부에 보내는 통고문에서 저들이 조선령해에 온 목적은 조선정부와 협상하자는데 있다고 하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려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손돌목의 포대앞에 기여들어 각종 도발행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조선군사들은 광성진포대, 덕포진포대들에서 침략자들에 대한 집중포사격을 들이대였다.
포탄은 면바로 침략선에 명중되였고 《모노카시》호는 파손되여 물이 새여들기 시작하였다.
집중타격을 받은 침략자들은 할수없이 도망가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게 손돌목전투는 조선인민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를 계기로 조선봉건정부에서는 적측에 편지를 보내여 조선에 침입한 그자체의 부당성과 통상을 하지 않겠다는것을 다시한번 명백히 밝히고 무조건 침략책동을 중지하고 물러갈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잘못을 심각히 뉘우칠 대신 침략자들은 오히려 3∼4일동안에 저들의 협상제의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무력행사를 하겠으니 그때에 가서 후회하지 말라는 식의 최후통첩적인 위협을 해왔다. 조선정부에서는 다시한번 적측에 엄숙히 경고하였다.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침략의 무리들은 드디여 본격적인 군사행동에로 넘어갔다.
1871년 4월 23일 함포의 엄호하에 강화도 남쪽 초지진에 발을 들여놓은 침략자들은 강화해협안에 자리잡은 조선측 방어지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사들의 강력한 반격과 특히 야간기습작전으로 100여명이나 손실을 당하였다.
침략자들은 광성진에서도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조선군사들은 비록 무기는 뒤떨어진것을 가지고있었지만 용감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겼다.
저들의 침략무력을 끌고갔던 로우는 자기 나라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사람들의 … 용감성은 일찌기 볼수 없었던것으로 세계 어느 민족도 조선사람들의 용감성을 따를수 없을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오랜 기간에 걸쳐 빈틈없이 준비를 해가지고 감행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참패로 막을 내렸다.
조선봉건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1871년 4월 25일 서울과 전국의 고을들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석에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는데 정면에는 큰 글자로 《서양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것은 나라를 파는것이다.》라고 새겼고 측면에는 작은 글자로 《병인년(1866년)에 이 글을 지었고 신미년(1871년)에 비에 새겨 전국에 세운다. 우리의 천만년 자손들에게 이것을 경고하노라.》라고 새겼다.
5《조미조약》
《조미조약》은 미국이 조선인민앞에 저지른 영원히 씻을수 없는 죄행의 하나이다.
1866∼1871년 조선에 대한 여러차례의 무력침공에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한 미국은 1880년대에 이르러 외교적방법으로 저들의 침략적목적을 실현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그 일환으로 미국회 상원에서는 조선과의 불평등조약을 성사시킬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였다.
그후 슈펠트를 전권대표로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전권대표로 위임받은 슈펠트는 어떻게 하나 조선봉건정부와의 불평등조약을 성사시켜보려고 교활하고 음흉하게 책동하였다.
일본의 알선에 희망을 걸고 시도했던 교섭이 실패하게 되자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청나라를 리용하여 《통상》의 문을 열어보려고 책동하였다.
청나라를 통한 교섭의 마당에서 슈펠트는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조선봉건정부를 구슬렸다. 일본의 침략에서 《보호》해주고 또 《원조》도 주겠다는 감언리설에 속아넘어간 부패무능한 봉건정부는 미국과의 조약체결교섭에 응해나섰다.
그리하여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인천)에서는 조선봉건정부측 전권대표와 미국측 전권대표사이에 회담이 진행되였으며 여기에서 14개조로 된 《조미조약》이 체결되였다.
미국은 조약 제1조에 두 나라는 서로 영원히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며 만일 다른 나라가 두 나라가운데 어느 한 나라에 대하여 멸시하거나 불법행위를 할 때에는 서로 《원조》한다는 순전히 기만적인 문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다음 조항들에서 조선에서의 미국상인들의 무제한한 통상의 승인 및 보호, 외교관의 주재, 령사재판권과 미국에 대한 낮은 비률의 관세의 실시, 조선쌀의 수출승인, 미국에 대한 최혜국대우의 실시 등을 강압적으로 규정해놓았다.
기만과 강압으로 체결된 《조미조약》은 사실상 조선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의무만을, 미국침략자들에게는 강도적인 권리만을 규정하고있는 철저하게 침략적이며 예속적인 불평등조약이였다.
또한 《조미조약》은 리조봉건정부가 미국 및 유럽렬강들과 맺은 첫 불평등조약으로서 다른 자본주의침략자들이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할수 있는 길을 열어준 《조약》이기도 하였다.
《조미조약》체결후 미국의 공사를 비롯하여 상인, 선교사, 의사, 외교관의 탈을 쓴 침략의 무리들이 때를 만난듯이 공개적으로 조선에 기여들었다.
이리하여 미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조선침략의 길은 열리게 되였다.
6《타프트-가쯔라협정》
미제는 일찌기 일제의 조선침략과 강점을 밀어준 가장 교활하고 파렴치한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였다.
그 하나의 실례가 미륙군장관 타프트(1857-1930)와 일본수상 가쯔라 다로(1847-1913)사이에 있은 《타프트-가쯔라협정》이였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자본주의로부터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단계에로 넘어가면서 그 어느때보다도 침략과 략탈의 야망이 증대된 미제에게 있어서 날로 확대되는 짜리로씨야세력을 구축하고 아시아지역에서 독점적지배를 이룩할만 한 군사적준비가 되여있지 못한것이 큰 골치거리였다.
그렇다고 하여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을수도 없었다.
교활하기 그지없는 미제는 짜리로씨야의 세력을 견지하는데 일본을 써먹으려고 책동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을 잘 리용하여 돌격대로 내세우면 저들이 짜리로씨야와 정면충돌을 하지 않으면서도 경쟁자를 쉽게 물리칠수 있다는 타산이 깔려있었다.
이로부터 미제는 조선이 일제의 무력침공을 받고 식민지로 전락되기 시작한 첫 시기부터 일제의 대조선정책을 지지하고 적극 부추겼다.
미제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적극 부추겨주고 지지해준것은 특히 로일전쟁을 계기로 더욱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1905년 7월 로일강화회의가 있은 후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제26대 대통령)의 특사로 미륙군장관 타프트가 일본에 날아들었다. 그리하여 1905년 7월 29일 도꾜에서는 일본수상 가쯔라 다로와 미륙군장관 타프트사이에 비밀회담이 마련되였다.
이 비밀회담에서는 일제가 필리핀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며 그 대가로 미제는 일제의 조선침략을 적극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통치》를 인정한다는것, 미제가 《영일동맹》에 가담하며 극동침략에서 미, 일, 영제국주의가 공동행동을 취할것 등이 지적되였다.
이처럼 《타프트-가쯔라협정》은 조선침략을 위해 19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된 미일침략자들의 공모결탁이 이 시기에 와서 더욱 본격화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로 된다.
자루속의 송곳은 감출수 없는것처럼 극비에 붙여있던 이 비밀《협정》은 20년이 지난 1925년에 세상에 드러났다.
이상의 사실은 미제야말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적극 지지, 협력하여왔으며 조선에 눈독을 들이고 범죄적인 침략책동을 체계적으로 감행한 우리 민족의 피맺힌 원쑤라는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