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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리항복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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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항복의 래력과 해학적기질

 

리항복은 서울의 높은 량반관료의 집안에서 1556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그 재주가 뛰여나 더 이름을 날리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마저 16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후 누이집에서 얹혀살게 되였다.

리항복은 부모들이 일찌기 돌아갔지만 그 자질과 재능이 촉망되여 당시 명문가인 권률의 딸과 혼인을 맺고 그후로부터 권정승의 댁에서 살면서 학당에 나가 공부를 하게 되였으며 정승의 통제밑에 수많은 문집과 도서들을 탐독하였다.

그는 당시 이름있는 대학자인 리률곡의 지도를 받아 학식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리항복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일찌기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젊은 관리로서 전도가 유망하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에는 선조왕을 보좌하여 의주까지 행궁하였고 리조참판으로부터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전쟁승리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전쟁의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비관을 모르고 락관에 넘쳐 우스개소리도 곧잘하였다. 그래서 리항복이라고 하면 자질과 재능이 높아 명대신으로 알려졌을뿐아니라 우스개소리를 잘하는 해학가로서도 명성이 났다.

그는 이런 높은 자질로 하여 그후 우의정을 거쳐 령의정으로까지 승직되게 되였다.

그후 정사에서 세운 공적이 하도 커서 특등공신, 명재상으로 떠받들리게 되였으며 높은 재상관료들도 그와는 허물없이 휩쓸리기를 좋아하였다.

그 과정에 적지 않은 해학적인 이야기를 남기였고 해학의 명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견첩록》(작자 미상)에서는 《리항복의 풍자》라는 제목을 달고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백사 리항복은 해학과 희롱을 좋아하였다.》

그는 높은 대감이지만 해학과 희롱을 즐겨한데다가 그의 익살은 생활적이면서도 악의가 없는것으로 하여 대신들과 관료들도 그를 좋아하였다.

리항복은 15대왕 광해군때에도 초기에는 좌의정을 하였다.

당시 집권한 대북파는 광해군의 형인 림해군을 죽여야 한다고 왕(광해군)에게 제소하였는데 광해군은 동복형을 죽일수 없다면서 교동도에 귀양보내기로 어명을 내리였다.

이때 리항복은 왕의 조치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것으로 하여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였다.

그후 리항복은 광해군의 어미 인목대비칭호를 박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반대하는 상주문을 왕에게 올리였다가 결국 광해군의 노염을 사서 관북지방인 북청으로 귀양가게 되였다.

당시에 함흥의 한 지방장관이 리항복이 억울한것을 알고 그를 매우 우대하였으며 큰 잔치를 베풀고 잔치에 참가한 기생들에게 《백사선생은 평생에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는데 너희들중의 누가 백사를 울게 한다면 내가 많은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한 늙은 기생이 중국 한나라 말엽의 충직한 신하 제갈량이 지은 《출사표》 두편을 목청을 돋구어 외웠다.

기생이 출사표의 마지막부분인 《몸은 늙었으며 병마저 들었으니 목숨이 끝날 때까지 나라위해 일하렵니다.》라는 대목을 읽을 때 백사 리항복은 평생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그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써주었다고 한다.

그후 리항복은 북청에 류배를 와서 다섯달도 되지 못한 사이에 병세가 심하여 앓아눕게 되였다. 그는 운명의 시각에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관복을 입혀 입관하지 말고 평복으로 하라.》고 부탁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62살이였다.

그는 높은 대감으로서 여러권의 문집을 남기였다.

리항복은 량반가정에서 나서자랐고 생의 전기간 비교적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해학과 익살을 즐겨하였지만 따져놓고보면 그의 이야기들은 많은 경우 봉건사회에서 임금을 받드는 신하들의 처사나 거기에서 있게 되는 우스개소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한성을 가진다.

특히 량반출신이지만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정수동의 해학과 비교해보더라도 봉건관료의 착취상과 반인민적죄상을 발가놓는것은 거의 없다. 하기에 그 유산으로 전해오는것도 많지 못하며 고관대작으로서 익살과 해학의 능수라고 소문은 자자하였지만 항간에서 전하여오는 재담이나 우스개소리는 충분한 사료적원천을 가지고있지 못하다.

문집 《견첩록》에도 그의 풍자를 지목하여 평가하고있지만 소개한것은 하나의 우스개소리뿐이다.

그러나 비록 전하여오는 유산은 적다 하여도 당시 대감의 직위에까지 이른 리항복이 해학의 명수로 알려지고 소문이 난것만 하여도 설화유산이 있었다는것을 충분히 가늠해볼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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