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 식 ◎
풍요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민간에서 떠돌아다니는 노래라는 뜻에서 풍요라고 써왔다.
이때는 인민들속에서 불리워진 민요를 풍요라고 하였다.
그후로는 의미가 넓어져서 세태풍속과 민요적인 소재에 기초한 한자시와 함께 사회적불합리를 비판한 작가불명의 짧은 시도 풍요라고 불렀다.
17세기이후에 와서는 서민출신 시인들의 창작이 활발해지면서 자기들이 창작한 한시작품을 량반문인들이 창작한것과 구별하여 풍요라고 부르고 그 이름밑에 시집을 묶어냈다. 그런 시집으로는 《소대풍요》, 《풍요속선》, 《풍요삼선》을 들수 있다.
이로부터 풍요란 말은 대체로 서민시작품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게 되였다.
풍요로 불리우는 서민시인들의 작품들은 사상예술적특성과 계급적기초에서 량반문인들의 작품과 구별될뿐아니라 민요를 비롯한 인민창작의 작품들과도 구별된다.
민요를 비롯한 인민창작이 착취받고 억압당하는 근로인민대중의 사상감정과 계급적리해관계를 반영하였다면 서민시인들의 작품은 량반과 피착취근로인민들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현실을 대하고 주로는 량반이 되지 못한탓으로 출세의 길이 막힌데로부터 오는 불만과 불우한 처지를 반영하였다. 그러므로 풍요라고 하여 일률적으로 평가하여서는 안되며 시대와의 련관속에서 작품별로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금 속 활 자
고려인민들은 우리 나라에서 오랜 력사를 가진 목판인쇄기술의 발전에 기초하여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활자인쇄기술을 발전시켰다. 금속활자로 인쇄출판된 책으로서 지금까지 기록으로 전해지고있는것은 1076년(문종 20년)에 쓴 《남명천화상송중도가》이다.
개성 만월대 신봉문자리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고려금속활자는 이 시기 인쇄기술의 면모를 짐작할수 있게 한다.
이 금속활자의 높이는 8㎜이고 글자를 새긴 면의 크기는 가로 12㎜, 세로 10㎜이며 그 주성분은 동, 주석, 연이고 부성분은 규소, 철, 알루미니움 등이다. 이것을 통하여 이 시기의 활자주조 및 인쇄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최근에 1377년 우리 나라 청주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이 지금 남아있는 금속활자본가운데서 가장 오랜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는 《직지심경》이 오늘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활자본가운데서 가장 오랜 책이라는것을 세계각국에 통보하였으며 1972년에 《국제도서의 해》의 행사의 하나로서 프랑스 빠리에서 진행된 《책의 력사》종합전람회에 이 책을 전시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1436년에 연활자를 만들어내였고 인쇄기술면에서도 전진을 이룩하였다.
《왕오천축국전》
8세기 초엽에 후기신라의 승려 혜초가 쓴 려행기이다.
불교학자였던 혜초는 불교 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당나라 수도 장안(오늘의 서안)을 떠나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디아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석가모
니의 사적을 순력한 다음 다시 도보로 페르샤와 소아시아(오늘의 수리아)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서장(티베트) 등지를 찾아본 다음 727년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혜초는 약 10만리에 달하는 이 긴 려행과정에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에 기초하여 3책으로 된 《왕오천축국기》를 썼다.
당시 인디아를 《천축국》이라고 하였는데 이 나라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5개 소왕국으로 나누어져있었다.
그러므로 혜초는 다섯 천축국에 갔다온 이야기라는 뜻에서 려행기제목을 《왕오천축국전》이라고 달았다.
《왕오천축국전》은 불교학자 혜림이 《일체경음의》에 그 이름만 전해오다가 1910년에 중국 돈황 명사산 천불동 석실에서 앞뒤부분이 떨어진 책이 발견되였다.
본래 3권으로 되여있었으나 오늘 전하는것은 한권으로 된 초략본이다.
이 려행기는 작자가 승려였고 또 불교를 연구할 목적으로 한 려행과정의 기행문인것만큼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내용으로 되고있다.
그러나 작가의 탐구심과 예리한 관찰력에 의하여 가는 곳마다에서 보게 되는 여러지역 인민들의 생활세태와 생활처지, 색다른 자연, 인민들의 풍속, 특산물, 정치제도 등이 여러모로 소개되였으며 그것들에 대한 작자자신의 태도도 표명되고있다.
려행기에는 또 이국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작자의 심정도 반영되여있다.
《왕오천축국전》은 10여만리의 멀고 간고한 려행과정에서 보고 들은것들을 비교적 생동하고 자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우리 나라 려행기문학의 시초를 열어놓게 되였다.
또한 이 책은 당시의 인디아와 소아시아 및 그 서쪽지역의 력사, 지리, 민속 등과 우리 나라의 대외관계, 우리 선조들의 탐구정신을 리해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이러한 사료적가치와 문학사적의의로 하여 《왕오천축국전》은 중요한 문화유산의 하나로 된다.
《고려사절요》
고려왕조기간(918-1392년)의 력사를 년대순으로 쓴 력사책이다.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139권)가 기전체로 된 정사라면 《고려사절요》는 편년체로 쓴 력사책이다.
1451년에 김종서, 정린지 등이 편찬에 착수하여 다음해 1452년에 35권으로 완성하여 1453년에 출판하였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봉건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사회생활로부터 자연현상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여있다. 정치관계자료로는 국가기구, 관직제도, 형벌제도, 인민들의 반침략, 반봉건투쟁자료들이 있다.
경제관계자료로는 토지제도, 조세제도 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교육, 예술 등 문화관계자료, 군사제도, 국방대책 등 군사관계자료들이 있다. 자연관계자료로는 천문, 지리, 자연재해 등 자료들이 있다.
이밖에 나라의 군사, 국방, 과학문화발전에 이바지한 개별적인물들에 대한 자료들도 적지 않게 있다.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에 비하여 훨씬 간단하다.
《고려사》의 세가, 렬전, 지 등에 포함된 기사들이 한곳에 종합되여 서술되여있으므로 각 시대의 중요한 사실들을 일괄하여보는데 편리하다.
또한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사》에 없는 기사들도 가끔 실려있고 《고려사》에는밝혀있지 않은 날자를 밝힌것도 더러 있어 이것들은 고려의 력사를 연구하는데 가치있는 자료로 된다.
그러나 이 책도 《고려사》와 마찬가지로 봉건왕조의 반인민적통치를 미화하고 리조정권의 성립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편찬되였다. 봉건통치계급의 리익을 옹호한 편찬자들의 계급적제한성과 사대주의력사관으로 하여 서술내용에서 인민대중의 활동이 완전히 무시되고 봉건국왕을 중심으로 한 서술이 위주로 되고있으며 대외관계와 고려말의 력사적사실을 외곡한 측면도 적지 않다.
하지만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와 함께 이 시기 력사연구에서 부족점을 서로 보충하는 관계가 있는 기본사료로서 응당한 가치를 가지고있는 책이다.
《경국대전》
리조봉건국가의 기본법전이다.
이 법전은 1469년에 리조봉건통치배들이 인민들에 대한 국가적지배를 실현하는 통치수단으로 만든 반인민적이며 반동적인 법전이다.
최항,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는데 모두 6권으로 되여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후 정권을 탈취한 리성계일파는 새 왕조의 정치경제적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1397년(태조 6년)까지 10년간의 법례를 정리하여 그해 《경제륙전》을 편찬하였다.
그후 그것을 고쳐 《륙전속록》(1413년), 《신륙전속록》(1428년), 《신찬경제속륙전》(1433년)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법전들은 착잡하고 잘 째이지 못하였기때문에 기본법전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460년과 1461년에 토지와 조세제도 등 봉건국가에 의한 수탈을 규정한 호전과 노비제도, 형벌제도를 취급한 형전을 먼저 완성공포하였다.
뒤이어 나머지 4개(리, 례, 병, 공)의 부문법전을 완성하여 1469년에 《경국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공포하였다.
그후에도 보충사업이 계속 진행되였는데 1471년에 이른바 《신묘대전》이, 1474년에 《갑오대전》이, 1485년에 《을사대전》이 나왔다.
이 《을사대전》이 오늘 전하는 《경국대전》이다.
《경국대전》에는 서문이 있고 리전, 호전, 례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법조문들이 실려있다.
리전에는 리조봉건국가의 중앙 및 지방통치체계에 대한 규정이 서술되여있고 호전에는 토지의 조사장악과 조세의 수탈체계에 관한 규정, 례전에는 봉건적인 의례, 과거제도, 외교관계 등에 관한 규정들, 병전에는 군사관계규정들, 형전에는 《범죄》와 그에 대한 형벌제도, 공전에는 국가적인 토목공사, 수공업 등에 대한 규정들이 각각 서술되여있다.
《경국대전》은 봉건법전으로서는 가장 상세하게 정리된것의 하나로서 15세기 사회경제문제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된다.
군주와 관련된 말
군주는 우리 나라 고유말로 임금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제(帝)로도 쓰고 왕(王)으로도 쓴다. 세 나라 가운데서 가장 늦게 봉건국가로 발전하였으며 따라서 그전시기의 낡은 유습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있던 신라에서는 처음 임금들의 칭호가 고유조선말로 전해지고있다. 즉 시조 혁거세는 《거서간》, 제2대임금 남해는 《차차웅》이며
제3대 유리부터 제18대 실성까지(《삼국유사》에는 제16대 흘해까지)는 《니사금》, 제19대 눌지(《삼국유사》에는 제17대 나물부터)는
《마립간》으로 되여있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 발의 금》을 의미하는 《니사금》(닛금, 잇금)에서 《임금》이 나왔다는
설은 널리 알려져있다. 강대한 고구려는 황제국가의 틀을 갖추
고있었으며 고구려를 계승하여 우리 나라에 첫 통일국가를 세운 고려도 여러 측면에서 황제국가의 틀을 갖추고있었다는것이 력사기록에 남아있다. 즉
고려 첫 시기 임금들은 자기를 《제》(황제)라고 칭하였으며 960년에는 개경을 《황도》(황제국가의 수도)라고 고쳤다는 기록이 전해지고있다.
임금도 자기의 이름(본명)외에 자, 호를 가지고있었다. 죽은 다음에는 묘호를 정하여 불렀다. 례를 들어 리성계의 자는 군진, 별호는 송현이였는데
죽은 후에는 태조라고 불렀다.
리조에서 묘호에 《조》자가 붙은 임금은 세조(제7대), 선조(제14대), 인조(제16대), 영조(제21대) 등인데 세조는 나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자리에 들어앉았으며 인조는 폭군 광해군이 쫓겨난 후 그리고 선조와 영조는 각각 그 먼저 왕들인 명종(제13대)과 경종(제20대)의 대가 끊어졌으므로 아래 또는 같은 항렬의 친척이 임금자리를 잇게 되였다.
그러나 묘호를 반드시 우와 같은 원칙에서 붙였다고는 볼수 없다. 중종(제11대)은 먼저 왕인 폭군 연산군이 쫓겨난 후에 그리고
철종(제25대)과 고종(제26대)은 먼저 왕의 대가 끊어졌으므로 왕자리에 올랐으나 묘호에 《종》자를 붙였
으며 정조(제22대)는 우와 같은 사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자를 붙였다.
포악한짓을 많이 하다가 쫓겨난 임금에게는 죽은 다음에 묘호를 정하지 않았고 살아있을 때 받았던 《군》칭호를 그대로 불렀다. 연산군(제10대)과 광해군(제15대)이 그러한 례이다. 세조에게 살해당한 단종(제6대)도 처음에는 로산군이라고 부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묘호를 정하였다.
임금은 죽은 후 릉호(무덤이름)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례를 들어 고려 공민왕의 릉호는 현릉이며 리조 세종의 릉호는 영릉, 성종의 릉호는 선릉이다.
임금을 직접 대면하여 부를 때에는 《상감마마》 또는 《대전마마》, 《페하》(황제), 《전하》(왕)라고 하였으며 글로 쓸 때에는 《금상》(지금 금, 웃 상) 또는 《상》이라고 하였다. 왕의 아들이나 딸이 왕을 부를 때는 《부왕마마》라고 하였다.
원년매김법(칭원법)
원년매김법이란 고대와 중세기에 임금의 통치년도를 표시하는데서 원년(첫해)을 매기는 법을 말한다.
원년매김법에는 해넘겨매김법(유년칭원법)과 달넘겨매김법(유월칭원법)이 있었다. 달넘겨 원년매김법이란 먼저 임금이 죽거나 임금자리에서 몰려난 다음달부터 새 임금 원년으로 잡는 방법이고 해넘겨 원년매김법은 그 다음해부터 새 임금의 원년으로 잡는 방법이다.
달넘겨 원년매김법은 새 임금이 임금자리에 오르자마자 원년을 칭한다고 하여 즉 위칭원법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전기신라)가 병존한 삼국시기와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에는 달넘겨 원년매김법을 썼고 고려, 리조시기에는 해넘겨 원년매김법을 썼다.
달넘겨 원년매김법을 쓰던 시기에 임금이 마지막달에 죽고 새 임금이 즉위하였을 경우에는 자연히 해넘겨 원년매김법의 경우와 같이 다음해부터 새 임금 원년으로 잡았다. 례를 들어 고구려에서 412년 12월에 광개토왕이 죽고 장수왕이 즉위하였으므로 다음해인 413년을 새 임금의 원년으로 잡게 되였다.
한편 해넘겨 원년매김법을 쓰던 고려, 리조시기에 먼저 임금이 몰려나고 새 임금이 들어앉았을 경우에는 그 다음달부터 새 임금 원년으로 잡았다. 례를 들어 고려 말기에 리성계를 우두머리로 하는 《개혁파》량반들은 1389년 11월에 고려의 제33대왕인 창왕을 왕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제20대임금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후의 공양왕)을 들여앉히고 그달부터 새 왕 원년으로 잡았다.
그리고 리조시기 1455년 윤6월에 수양대군(제5대왕인 문종의 동생, 후의 세조)은 자기의 나어린 조카인 제6대왕 단종을 내몰고 왕자리에 들어앉았으며 1566년 9월에는 제10대왕 연산군이 쫓겨나고 진성대군(후의 중종)이, 1623년 3월에는 제15대왕 광해군이 쫓겨나고 룡양군(후의 인조)이 들어앉았는데 이 경우에도 모두 새 왕이 즉위한 달부터 새 왕 원년을 잡았다.
해넘겨 원년매김법을 쓰던 고려, 리조시기에 새 임금이 즉위한 후 다음해에 원년을 칭할 때까지는 즉위년이라고 하였다. 례를 들어 리조시기 제3대왕 태종이 1418년 8월에 아들(제4대왕 세종)에게 왕자리를 넘겨주었는데 그해말까지는 세종즉위년이라고 하고 그 다음해인 1419년에 원년을 칭하였다.(제2대왕 정종과 제3대왕 태종의 경우는 례외)
행운을 뜻하는 문양
우리 나라에서 행운을 뜻하는 문양은 주로 게, 갈대, 오리, 석류, 물고기, 학 등으로서 벼루, 연적, 꽃병, 병풍 등에 많이 그려졌다.
게와 갈대는 과거급제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게가 등딱지가 있으므로 갑을 뜻하고 갑은 일등 장원급제를 의미하였기때문이다.
오리가 련밥을 물고있는것은 과거에 급제한 후 귀한 자식을 얻으라는 뜻이였다.
석류는 주머니속에 씨앗이 가득 들어있으므로 자식의 번창함을 상징하였다.
잉어는 령리한 자식을 뜻하기도 하고 과거급제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주의 자물쇠를 보면 잉어가 아니라 보통의 물고기모양이였는데 그것
은 한자로 《물고기 어》자가 《남을 여》자와 음이 같으므로 뒤주를 열고 닫을 때마다 남음이 있으라는 의미였다.
사슴은 그 음이 《록》이므로 벼슬을 의미하였으며 학은 1천년을 산다고 믿었으므로 장수의 상징이였다.
학이 소나무에 앉아있는 그림은 새해에도 무병장수하라는 뜻이였으며 학을 100마리 그린것은 오래오래 장수하라는것을 의미하였다.
엽 전
1633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상평통보》라는 구리돈을 엽전이라고 불렀다.
《상평통보》라는 이름은 리조봉건정부의 중앙관청의 하나인 상평청에서 주조한데로부터 나왔다.
그후 리조봉건정부의 각 중앙관청과 지방관청들에서 주조한 구리돈도 모두 《상평통보》의 이름으로 나왔으며 다만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표시하는 글자를 제각기 밝혀놓았다. 인민들은 이것을 다 흔히 엽전이라고 하였다.
《상평통보》 1잎을 1문 또는 1푼이라고 하였으며 10잎은 1돈(전), 100잎은 1냥이라고 하였다. 보통 100잎(1냥)을 한줄에 꿰였는데 이것을 1민이라고 하였으며 10냥의 엽전(1 000잎)을 1관이라 하였다.
엽전이 나온 후 그 주조는 계속되였으며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에만도 근 1 000만냥이 주조되고 류통되였다. 봉건정부는 엽전의 대량적인 주조과정을 통하여 근로인민들을 추가적으로 수탈하였다.
봉건통치배들은 엽전주조때 금속의 품위가 낮고 무게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나쁜 돈을 만들어내여 강제로 류통시킴으로써 막대한 리득을 얻었다.
오랜 류통력사를 가진 엽전은 1905년 6월 1일부터 일본침략자들이 강행한 《한국화페정리》사업에 의하여 회수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말현재 엽전의 류통량이 650만원이였던것이 1910년말까지 그 절반인 327만 8 000원이 회수되였으며 나머지는 그후 류통을 강제 금지당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1918년까지 류통되였다.
바지와 저고리의 유래
《바지》, 《저고리》라는 낱말자체는 리조 초기에 처음 나온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세종실록》을 비롯한 리조시기 력사기록에는 《적고리》, 《파지》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은 인민들속에서 널리 통용된 저고리, 바지라는 입말을 한문으로 표기한것이다.
그 이전시기에는 바지를 《고》 또는 《가반》이라고 하였다. 저고리는 《상》, 《유》, 《위해》 등으로 불렀다. 《고》는 한문으로 바지라는 뜻이며 《가반》은 고유한 우리 말이고 《상》, 《위해》는 저고리라는 한문표현이다.
조선의 민족의상 바지와 저고리는 민족문화가 창조되던 초기에 그 원형이 마련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수 있다.
우리 민족은 신석기시대에 벌써 베천을 짜기 시작하였으며 독특한 민족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고조선시기에는 비단을 비롯한 여러가지 천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화려하게 만들어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바지와 저고리는 여러차례 변화발전되면서 계승되여오다가 18세기경에 이르러 오늘과 같은 형식으로 고착되였다고 한다.
우리 민족옷이 바지와 저고리형태를 띠게 된것은 우리 나라의 자연기후조건과 관련된것으로 보고있다.
초기에 나온 웃옷은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앞섶을 겹쳐 여미고 허리를 끈으로 묶어입도록 되여있었으며 아래옷은 두다리를 각각 천으로 감싸고 실로 꿰맨 통이 좁은 바지형식으로 되여있을뿐아니라 바지밑단을 터쳐놓지 않고 대님(발목을 졸라매는 끈)으로 묶어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옷을 지어입기 시작한 초기부터 오늘과 같은 바지와 저고리형식의 독특한 민족의상을 창조하였다.
칠 거 지 악
칠거지악은 봉건유교도덕에서 남편이 안해를 버릴수 있는 근거로 되는 일곱가지의 조건을 일러온 말이다.
그것은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것, ② 자식을 못낳는것, ③ 행실이 음탕한것, ④ 질투하는것, ⑤ 나쁜 병이 있는것, ⑥ 말썽이 많은것, ⑦ 도적질하는것 등이다.
이 일곱가지 가운데서 어느 한가지라도 해당되는 조건이 있으면 안해를 내쫓을수 있었다고 한다.
칠거지악은 봉건유교적인 남존녀비사상에 기초하여 봉건사회의 가부장제적가정에서 남자의 특권적지위에 녀성을 절대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것이였다.
이러한 도덕규범에 의하여 녀성들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천대받고 구속당
하였으며 남자에 대한 맹목적굴종만을 강요당하였던것이다.
해방후 남녀평등권법령의 실시로 칠거지악과 같은 《도덕규범》은 없어졌다.
《천사》의 음식-약밥
약밥의 어원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먹는것이 모두약이라는데서 온것으로서 이를테면 약주, 약과, 약수 등과 같이 밥중에 약과 가장 접근된 밥이라 하여 약밥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꿀이 들어간 음식에 흔히 약자가 붙은데서부터 왔다는것이다.
정약용의 《아언각비》라는 책에는 《꿀을 흔히 약이라 해서 꿀로 빚은 술은 약주, 꿀로 만든 밥은 약밥, 꿀로 만든 과자는 약과라고 한다.》고 씌여있다.
약밥의 기원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때 소지왕의 왕비가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고는 그와 음모하여 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왕비는 그 사나이를 별방에 있는 거문고장에 숨기고 왕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있는데 그것을 까마귀가 알려주어 왕이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으며 결국 왕비와 정부는 반역음모죄로 처형되였다. 그날이 바로 정월 대보름날로서 까마귀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소지왕이 대궐이나 백성들의 집에서도 약밥을 만들어 까마귀에게 먹이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때부터 약밥은 정월대보름날의 음식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와 비숫한 풍속이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까마귀는 조선고대사회에서 신의 명을 전하는 심부름군으로 되여있었기때문에 이 《천사》를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는것은 응당한것으로 되여있었으며 약밥은 《천사》인 까마귀에게 바치는 신성한 음식으로 지상에서 나는 맛있고 값진것을 모두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렬양세시기》에 약밥 만드는 법이 적혀있는데 《찹쌀을 쪄서 밥을 만들고 참기름, 꿀, 진간장을 섞은 후 씨를 빼낸 대추와 껍질벗긴 밤을 잘게 썰어 섞는다.》고 했다.
약밥의 기초재료로는 팥, 잣, 호두, 계피가루, 곶감, 건포도 등이 쓰이며 수수와 기장을 섞어 밥을 짓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