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의 땅을 찾아
1991년 3월 23일 오전, 베이징-평양행 《고려》정기비행기는 여느때와 같이 정시에 베이징비행장을 출발하였습니다.
잠시후 예정된 고도를 차지한 비행기는 정기항로를 따라 날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출발과 함께 생겨난 소음도 이내 잦아들고 기내에는 고르로운 발동기소리만이 들려왔습니다. 탑승자들 대부분이 평양려행체험자들인양 례사로운 표정들을 짓고있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흥분한 기색을 띠고있는 려행자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속에는 고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저도 있었습니다.
(드디여 고국땅을 밟게 됐구나.)
고국의 한 부분과도 같은 비행기의 승강구를 오르던 때부터 생겨난 류다른 감정은 출발과 함께 흥분으로 바뀌였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시창으로 내려다보니 보이는것은 햇솜을 뿌려놓은것만 같은 구름의 바다였습니다.
불현듯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모습이 시창에 비껴왔습니다.
놀랍게도 이제는 기억에 삭막해진 할머님의 모습까지 또렷이 안겨왔습니다.
생전에 두고온 고향을 그리도 못 잊어 외우시던 그들, 넋이라도 고국으로 가고싶다고 유언으로 남기신 그들이였습니다. 저세상으로 가신지도 수십년세월이 흘렀건만 그 애통함이 혼백이 되여 오늘도 허공중에 떠도는것인가. 아니면 자식만이라도 그 넋을 제 나라, 제땅에 실어다주길 바라는것인지.
좌석에 기대여 눈을 감고있어도 그들의 모습이 망막에서 떠날줄 몰랐습니다.
나의 할머님은 조국에 대한 생각은 나이와 함께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나이 어려서는 나서자란 곳이 내 고향, 내 조국이려니 하고 생각하다가도 사람이 나이들면 조국이라는 그 말에 헤아릴수 없이 크고 많은 뜻이 담겨지게 되고 그래서 어른들은 고향을 떠나도 조국을 아주 등지고 떠나기는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제 피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님과 부모님들이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죽어서도 가고싶어하던 조선, 그네들의 넋이 깃든 고국을 한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머리에 흰서리를 인 자식이 찾아가고있는것입니다. 가슴속에 선대들이 겪은 지난날의 그 설음이 또다시 사무치게 안겨왔습니다.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마음놓으세요. 내 비록 처음으로 찾아가는 길이지만 그대들의 눈과 귀, 발걸음이 되여 고국을 안으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마냥 고국으로 달려감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비행장에서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일군이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조국을 방문하는 선생님들을 환영합니다.》
불시에 코마루가 찡해왔습니다. 그 한마디 말속에 고국인민들의 따뜻한 동포애의 정이 가슴저리게 안겨왔습니다.
고국땅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격앙된 심정은 숙소로 가는 길에 더욱 고조되였습니다.
평양교외의 도로를 따라 달리느라니 길량옆에 갈아엎은 무연한 논밭이 펼쳐지는가 하면 야산들에 조성된 과수원과 조선기와를 얹은 아담한 살림집들이 눈에 안겨왔습니다. 차가 시내로 들어가면서 드넓게 뻗어나간 거리들에 고층건물들과 덩지큰 공공건물들이 각양각색으로 아름답게 배렬되여 서로 조화를 이룬 전경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였습니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민족의상을 한 녀성들, 노래를 부르며 대렬을 지어가는 학생소년들 등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들이였습니다. 보이는 사람들모두가 저와 같은 모습의 한동족이라는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숙소에 려장을 푼 후에도 저의 마음은 받아안은 충격과 흥분으로 하여 도저히 진정할 길 없었습니다. 불야경을 이룬 평양의 밤풍경 또한 저의 기분을 더욱 돋구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였지만 약동하는 민족의 모습, 고국의 발전상이 확연히 안겨왔습니다.
예가 바로 오랜 세월 부모님들이 그토록 그리던 내 민족이 사는 나라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꼭 꿈속이나 어느 환상세계에 온것만 같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목이 메고 눈굽이 젖어왔습니다.
고국방문의 첫날은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다음날부터 저의 일행은 평양과 지방의 여러곳을 참관하였습니다.
만경대, 대성산혁명렬사릉, 조선혁명박물관, 개선문, 주체사상탑, 국제친선전람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동명왕릉, 서해갑문, 인민대학습당, 중앙동물원, 금강산…
저는 고국의 곳곳을 마음껏 돌아보았습니다.
조선방문의 매 순간순간은 제가 내 민족, 고국에 대한 리해와 체험을 깊이하는 귀중한 나날이였습니다.
고국방문의 나날에 제가 제일 알고저 하였고 감동 또한 깊게 받은것은 그전에는 몰랐던 민족의 전통과 긍지였습니다.
참관과정에 저는 반만년의 기나긴 세월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해오면서 슬기롭고 근면하며 례절바르고 불의에 굴할줄 모르는 특성과 전통을 이어온 조선민족사 특히 40여년의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오늘의 조선을 건설한 현대사를 알게 되였으며 그것은 저에게 민족의 넋과 자부심을 새겨주는 고귀한 체험으로 되였습니다.
민족의 저력을 가늠할수 있게 하는 곳들도 많았습니다.
서해갑문을 참관했을 때 저는 고국이 얼마나 위력한 힘을 지닌 나라인가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서해갑문건설공사로 말하면 20리 날바다를 막고 대형짐배들이 통과할수 있는 갑실을 세개씩이나 건설해야 하는 아름찬 공사였습니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거창한 갑문을 자기의 자원과 기술, 자체의 힘으로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륙지를 파서 물길을 낸 수에즈운하나 빠나마운하 같은것도 10년나마 건설하였다는것을 참작할 때 날바다속에서 다섯해동안에 그처럼 거대한 갑문을 일떠세웠다는것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아닐수 없습니다.
날바다를 가로막은 서해갑문이야말로 조선의 막강한 국력과 민족의 저력을 알수 있게 하는 현장입니다.
제가 고국방문과정에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은것은 이 땅의 귀중하고 소중한 모든것이 《인민》이라는 두 글자와 련결되여있다는것이였습니다.
나라의 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이름도 《인민정권》, 군대의 이름도 《조선인민군》, 조선로동당의 구호도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 등 모든것이 《인민》이라는 이름과 결부되여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민대학습당》, 《인민문화궁전》, 《인민병원》, 《인민경제대학》과 같이 여러 기관과 단위, 대상들의 이름과 기념비적창조물들의 명칭에도 《인민》이라는 표현을 넣은것이 많았습니다.
원래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에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인간의 정신이 깃들어있기마련입니다.
세계인류건축문화의 유산들에 깃든 의미를 재음미하여본다면 피라미드이건 스핑크스이건 또는 어느 왕궁이건 그것들 대다수는 통치자들이 살아서 누렸거나 혹은 죽어서라도 누려보려던 부귀와 향락을 위한것이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국의 모든 건축물들에는 어느것에나 인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슴배여있었습니다.
고국의 이르는 곳마다에 일떠세우는 건축물들에는 하나에서 백까지가 모두 인민의 편의와 문화적인 생활을 위해 시공, 완성되는것이 최고원칙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저는 실지 참관을 통하여 느끼였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소박하고 친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고국땅에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제가 놀랍게 느낀것은 고국인민들의 남다른 친절성이였습니다. 안내일군들과 숙소의 접대원들, 공장과 농촌, 학교 등 가는 곳마다에서 만나는 사람들모두가 우리를 따뜻이 대하고 말씨 또한 부드러웠습니다.
50여년을 쏘련에서 사회주의교양을 받으며 살아온 저의 가슴속에서는 조선에서 자기 몸에 간직되였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모든것이 생생히 되살아나 다시 안겨옴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때에 받은 감동이 너무도 커서인지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날의 일들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그러나 저의 고국방문추억은 결코 아름답고 고상한것만 있는것이 아니였습니다.
고국방문길에서 저는 조선민족이 겪고있는 민족적재난과 비극도 목격하였습니다.
그것은 외세에 의한 국토의 분단, 민족의 분렬이였고 그로 인해 조선민족이 당하고있는 불행과 고통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시기 고향을 떠났고 오랜 기간 고국과의 아무런 련계도 없이 살아온 우리 고려인들은 대다수가 조선의 이러한 현실을 전혀 모르고있었습니다. 단지 쏘련의 출판물에 가끔 실리군 하는 조선에 대한 단편적인 소식을 통하여 고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있다는것으로 아는 정도였습니다.
고국과의 접촉과 래왕이 가능하게 된 198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포들은 조선이 북과 남으로 갈라지고 그 분단상태가 벌써 40여년동안이나 지속되고있다는데 대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저 역시 이 시기에 와서야 그에 대해 알게 된 사람입니다.
제가 고국방문길에 오를 때에는 이미 동포들속에 조선의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는 조직이 세워지고 저도 그 한 성원으로 활동하고있었지만 정작 분단의 땅에 서니 느끼는 감정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나라의 절반땅을 갈라놓은 콩크리트장벽은 과거 남조선의 군부독재자들이 외세의 부추김밑에 우리 민족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기 위해 쌓은 분렬과 대결의 장벽입니다.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이 1977년부터 방대한 자금과 로력, 자재를 들이밀어 군사분계선 남측지역 240여㎞구간에 쌓아놓은 콩크리트장벽은 내외분렬주의자들의 대결과 분렬정책의 산물로서 용납될수 없는 반민족적, 반통일적범죄행위로 되는것임을 만천하에 고발하는 산 증거로 되는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개성시 장풍군의 어느 한 산봉우리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군사분계선 남쪽을 바라보니 분렬주의자들이 쌓아놓은 철근콩크리트장벽이 림진강을 가로질러 야산들과 골짜기들을 지나간것이 그대로 안겨왔습니다.
포대경으로 자세히 보니 철근콩크리트장벽우에는 무수한 화점과 감시소들이 설치되여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하던 조선인민군 군관의 말에 의하면 물웅뎅이, 산등성이 지어 강들에까지 큰 철근콩크리트기둥들을 빼곡이 세워 쌓아놓은 이러한 콩크리트장벽은 군사분계선전역에 걸쳐 뻗어나가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슴속에는 분렬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솟구쳐올랐습니다.
흉물스러운 독뱀마냥 조선반도의 허리를 휘감고있는 콩크리트장벽은 우리 민족의 통일과 발전을 가로막는 물리적차단물일뿐아니라 민족의 혈맥과 지맥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두개 조선》을 고착시키며 나라의 통일을 가로막기 위한 영구분렬의 장벽이라는 생각에 우리의 가슴가슴은 분노로 타번지였습니다.
세상에는 나라마다 국경이 있고 거기에 그 표식시설물도 있다 하지만 남조선의 콩크리트장벽과 같이 하나의 강토, 하나의 민족을 두동강낸 그러한 민족분렬의 장벽은 없습니다.
분렬주의자들이 쌓아놓은 콩크리트장벽으로 하여 수천년동안 이어져온 단일민족의 혈맥이 끊어질 위험은 더욱 짙어가고있습니다. 북과 남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히고 래왕이 끊어지면 자연히 나라와 민족이 둘로 갈라질수밖에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인것입니다. 5천년의 력사국을 자랑하는 조선민족사에 일찌기 없었던 콩크리트장벽이 국토의 허리를 가로지르고있는것은 민족의 수치임을 우리는 페부로 깨닫게 되였습니다.
백두산에서 한나산까지 삼천리 조선은 한지맥으로 잇닿아있고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한조상의 피줄을 이어왔건만 어찌하여 한 나라와 민족이 국경보다 더한 분렬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그처럼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는가를 우리는 이날 가슴에 사무치게 새겼습니다.
판문점일대에 대한 답사의 나날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국토의 분단을 강요한 분렬주의자들에 대한 치솟는 증오로 온몸을 불태우고 민족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을 함께 페부로 절감하며 몸부림친 량심의 날, 민족적사명감을 새겨안은 자각의 날로 되였습니다.
저의 고국방문길은 이러한 나날들로 이어졌습니다.
고국방문길에 저는 범민련 해외본부대표단 성원들과 비전향장기수 김인서의 가족사이에 진행된 상봉모임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이제는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에 받은 충격 또한 잊혀지지 않고 가슴저리게 되새겨지군 합니다.
김인서는 지난 1950년대 조선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싸우던중 적들에게 포로되여 남조선에서 30여년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통일애국의지를 지켜온 애국자입니다. 온 민족의 사랑과 찬사를 받아야 할 그였지만 감옥에서 놓여나온 후에도 반통일분자들의 탄압과 박해속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어왔습니다. 더우기 가슴아픈것은 그 가정에 비낀 분단의 비극입니다. 그가 집을 떠나올 때 철부지였던 두 딸이 자식을 가진 어머니가 되도록 서로 생사여부를 모르는 이 가슴아픈 분단의 현실, 한점 혈육도 없는 남조선땅에서 고역을 당하는 오빠와 아버지를 돌려보내달라는 김인서의 누이동생과 두 딸들의 애타는 목소리와 눈물겨운 정상은 갈라진 민족의 아픔을 사무치게 받아안게 된 계기로 되였습니다.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성을 귀중히 여기는것은 민족성원들의 공통된 심리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다 자기 민족의 자주성과 민족성을 옹호하고 민족의 륭성번영을 이룩하는데 대해서는 민족성원들이 다같이 공통된 리해관계를 가질것이라고 봅니다. 민족성원치고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이 짓밟히고 민족성이 무시당하는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조선의 분렬을 반대하고 민족의 통일을 바라는것도 그때문일것입니다.
국토의 분단으로 하여 겪고있는 불행과 고통이 이처럼 크기에 통일을 바라는 고국인민들의 열망과 의지 또한 강렬하였습니다.
그것을 저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조선미술박물관, 평양시에 건설되고있는 통일거리 등 참관길마다에서 뜨겁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거리이름을 하나 지어도 통일거리로, 행복속에 줄지어 오가는 광장의 이름도 통일광장으로, 지하철도역의 이름을 하나 달아도 통일역으로, 그림이나 글을 써도 통일의 소원이 맥맥히 비껴흐르게…
보는것마다에 통일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의 열망으로 후더운 말을 터놓는 고국인민들의 모습에서 저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고국, 이곳은 말그대로 조상때부터 살아온 내 민족, 내 겨레의 나라이다. 여기에는 조상대대의 피와 땀이 스며있으며 민족의 력사가 빛나고있다.
나라와 민족을 제일로 사랑하시는 절세의 위인이 계시여 민족의 운명과 밝은 미래가 담보되여있다. 그 위대한 품에 온 겨레가 안겨살 때 우리 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존엄있는 민족으로, 번영과 행복을 누리는 민족으로 될것이다.
겨레의 통일과 단합을 위해 노력하는것은 조선민족의 응당한 본분이고 도리이다. 나의 미력한 힘이나마 민족의 위대한 성업에 보태는것이야말로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저는 민족의 통일성업에 몸을 잠그고 민족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칠 결의를 다지였습니다.
사람마다 민족을 자각하고 민족을 위한 길에 나서게 되는 동기는 제각기이지만 고려인들은 이러한 인생체험과 복잡한 심리적과정을 거쳐 민족앞에 한발자욱 한발자국 다가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