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인과 민족통일

 

타향의 고려인들

 

만일 그날이 그날 같고 그해가 그해 같다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생활이라기보다 생존이라고 해야 옳을것입니다. 더우기 자기의 근본도 모르고 민족의 넋도 없이 살아간다면 그 삶이야말로 무의미하다고밖에 달리는 말할수 없습니다.

반면에 그 어디에 살건 민족의 넋을 지니고 겨레를 위하여 뜻있게 살아간다면 그 삶이야말로 참다운 삶이라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한 인생리치를 쉽게 깨닫게 되는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남들이 쉽게 터득하는 삶의 리치를 우여곡절과 심리적고충끝에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고려인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지금은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라는 조직을 뭇고 겨레를 위하고 조선의 통일을 위한 일에 힘을 보태고있지만 2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들은 민족의 넋을 잃고 살았습니다.

우리 고려인들은 오래전에 조상의 땅을 떠나 해외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랜 기간 민족과 동떨어져 말도 풍습도 생김새도 다른 이방인들속에서 고국도 모르고 자기의 근본을 잊고 살아온 우리들이였습니다.

그러하던 우리 고려인들이 자기의 본태를 찾고 겨레와 민족의 통일을 위한 의로운 길에 들어서게 된데는 동포들의 곡절많은 인생체험이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세기에 걸치는 고려인들의 타향살이력사를 개괄하는것으로 이 글의 시작을 뗄가 합니다.

다민족국가, 다민족사회였던 이전 쏘련지역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있습니다. 그들속에는 고려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수는 근 50만명에 달하는데 그중 60%에 해당하는 근 30만명이 중앙아시아지역에 있습니다. 이전 쏘련지역의 소수민족들중 고려인들은 인구수에서 28번째로 됩니다. 수백을 헤아리는 이전 쏘련의 민족구성으로 볼 때 고려인들의 비중은 결코 적다고 볼수 없습니다. 이전 쏘련이 붕괴될 당시 고려인들의 직업을 보면 농업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으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고있는 동포들의 경우에 30~40%는 지식인으로서 국가, 경제, 문화기관의 일정한 직책에서 일하거나 기술자, 의사, 교원 등의 여러가지 기술직종에서 일하고있었습니다.

이전 쏘련지역의 고려인들은 조상때부터 살아온 이 지역의 그 어떤 소수민족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떠도는 유목민족의 후예도 아닙니다. 이들이 바로 오래전에 살길을 찾아 이역땅으로 흘러온 조선사람들과 그 후손들입니다.

동포들이 이전 쏘련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된 래력을 거슬러올라가보면 조선근대민족사의 불우한 운명과 이어져있습니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이전 쏘련지역에로의 조선사람들의 이주와 정착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였습니다.

1860년대로 말하면 미국을 비롯한 렬강들의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침략력사가 시작되고 봉건통치배들의 부패와 가혹한 착취 또한 극도에 이른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863년에 조선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갔으며 그들이 처음으로 보짐을 풀어놓은 곳이 로씨야의 원동지역이였습니다. 그리고 2년후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적도 없는 라자쏘브촌으로, 몇해후에는 또다시 남우쑤리스크지역에 이주하여 삶의 거처지를 정하였습니다.

오라는 사람도 없고 반겨맞아줄 사람도 없었으며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에로의 조선사람들의 이주는 이렇게 시작되였습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으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롱락당하던 1910년이후부터 두만강을 건너가는 조선사람들의 수가 훨씬 늘어났습니다.

조선을 비법적으로 강점한 일제는 강도적인 《토지조사령》, 《림야조사령》 등을 공포하고 토지와 산림을 대대적으로 략탈하였다고 합니다. 일제의 대규모적토지수탈과 산림략탈, 농민들에 대한 제국주의적수탈과 봉건적착취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조선농촌에서 많은 리농민들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류랑걸식하게 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할수없이 살길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해외에로 나가게 되였습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식민지적폭압과 략탈정책에 의하여 해외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짐에 따라 로씨야지역으로 들어오는 조선사람들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게 되였습니다.

일제의 조선강점후인 1914년에는 6만 5천여명의 조선사람들이 연해변강, 아무르, 깜챠뜨까, 싸할린지역에로 이주하였고 1923년에 13만명, 1935년에는 그 수가 무려 20만명이 되였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1919-1922년기간에만도 원동지방에는 122개의 조선인부락이 생겨났으며 당시 울라지보스또크, 바라바씨보, 울라지미르-알렉싼드로브쓰크 주민의 절대다수는 조선사람들이였다고 합니다.

대대로 살아온 조상의 땅을 떠나 류랑의 길에 오른 사람들의 서글픈 행렬속에는 저의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은 조선의 함경북도 청진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태를 묻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 선조의 무덤이 있고 대를 이어 가꿔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타향살이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이전 쏘련에도 고향은 친어머니요, 타향은 이붓어미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도 아무리 어렵더라도 고향은 뜨고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폭압에 시달려 더는 견딜수 없었습니다. 어쩔수없이 고향을 떠날 결심을 내린 그날부터 떠나던 날까지 부모님들은 며칠간을 내내 눈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1912년도의 어느 추운 겨울밤, 부모님들은 국경을 지키는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백포를 쓰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기여서 건넜다고 합니다.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오게 되겠는지. 기약할수 없는 길을 떠나며 눈물속에 돌아보고 또 돌아보던 고향은 다시는 밟아보지 못할 영원한 추억으로, 한으로 남게 되였습니다.

바로 저의 부모들처럼 수천수만의 조선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이국으로 흘러갔습니다.

보금자리를 잃은 새와 같이 고향땅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의 물결, 그것은 그대로 망국노의 신세로 굴러떨어진 조선민족의 수난에 찬 운명의 축도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당시 로씨야땅으로 들어온 이주민들은 주로 원동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불리한 자연기후적조건으로 하여 오늘도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기를 꺼려하는 지역의 하나입니다. 그러한 곳에 조선사람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편것은 그나마 두고온 고향과 조국땅이 잇닿은 곳이였고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 희망을 간직하고있었기때문일것입니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은 동포들의 그러한 소박한 꿈마저 조용히 뿌리내릴수 없게 하였습니다.

1937년 당시 쏘련정부의 조치에 의하여 조선사람들은 원동에서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또다시 이주하게 되였습니다.

이주동기도 일제의 교활한 작간때문이였습니다. 일제는 쏘련을 침공할 계획밑에 원동지방에 밀정들을 많이 들이미는 한편 앞잡이들을 내세워 조선사람들이 《쏘련을 내탐하는 간첩행위를 했다.》느니, 쏘련사람이 아닌 《원동에 사는 외국인들은 모두 밀정과 련계되여있다.》는 등의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지어 조선사람들이 원동지역에 《조선자치주》를 세우려고 한다는 황당한 소리까지 내돌렸습니다.

이렇게 되여 조선사람들은 일본놈의 《개》라는 루명을 쓰게 되였고 결국 중앙아시아지방으로 집단이주당하게 되였습니다.

당시 나라의 서쪽과 동쪽에서 파쑈도이췰란드와 일본의 침략위협을 받고있던 쏘련으로서는 나라의 전반적인 리익을 고려한 조치라고도 할수 있겠지만 그때문에 우리 동포들은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참담한 로정끝에 중앙아시아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을 맞이한것은 갈밭과 습지, 잡초무성한 황무지들이였고 거주지문제, 교육과 직업문제에서의 민족적인 차별이였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총칼에 내몰려 또다시 수만명의 조선청장년들이 조국을 떠나 싸할린으로 강제이주되였습니다.

이렇듯 《민족의 파편》으로 삶의 터전에서 몇번이나 뿌리뽑힌 동포들이였습니다. 그 어느때도 스스로의 뜻으로 떠난적이 없는 말그대로 《강요된 이주》였습니다. 대대로 살아온 조상의 땅에 일본사무라이들이 홍수처럼 쓸어들고 그 땅을 살찌워온 주인들은 쫓기는 몸이 되여 남의 나라 지경을 넘어 헤매야 했으니 국권을 잃은 우리 민족의 신세가 길가의 가랑잎이나 조약돌과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정든 고장을 떠날 때마다 동포들의 가슴가슴은 약소민족, 나라잃은 민족의 설음과 비분으로 사무쳤습니다.

아마 설음이 크면 의지도 굳세여지는가 봅니다.

동포들은 타고난 지혜와 근면성,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려는 의지로 서로 도우며 생활터전을 하나하나 개척하였습니다.
오늘 이전 쏘련의 광활한 지역에 조선사람들이 널려살게 된 동기와 시대적배경은 대체로 이러합니다.

조국과 민족이 수난을 당하면 매개인, 매 가정도 수난을 겪기마련입니다. 매 가정, 매개인의 운명은 조국과 민족의 운명과 불가분리적관계에 있다고 하는것도 그때문일것입니다. 동포들은 지나온 쓰라린 력사적체험을 통하여 그것을 페부로 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동포들이 이국에서 한생을 살아오는 과정에 이러한 인생의 교훈을 망각하였습니다.

반세기이상이나 쏘련의 제도에서 그 나라 공민으로 생활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동포들속에서 조선민족의 넋은 흐려졌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려인들속에서는 조선말과 글도 모르고 조선이름도 가지고있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세대가 바뀌면서 후손들속에서는 조선풍속은 물론 고국과 민족에 대한 개념조차 모호한것으로 되여갔습니다. 조선사람, 고려인이라는 자각보다 쏘련사람, 쏘련공민이라는 관념이 더 커갔으며 그에 따르는 사회적의무를 다하는것으로 만족을 찾았습니다.

이렇듯 오랜 기간 고국을 잊고 민족과 동떨어져 살아오는 과정에 동포들속에서는 자기 민족의 넋, 자기의 근본을 잊고 살았습니다. 당시 우리 고려인들이 살아온 사회적환경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 동포들은 또다시 심각한 인생체험과 심리적고충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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