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말을 배우자

 

저는 고국을 방문하는 기회마다 조선영화를 즐겨보군 합니다.

고국의 영화들은 모두가 자주적인간의 삶의 지향과 요구를 중심에 놓고 극형상을 이끌어가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인생의 거울로 삼을 가치가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자주 보게 되는데 본 다음 그 여운이 오래 지속되여 인상적인 장면들의 세부들도 적지 않게 기억하고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해방후 고국인민들이 우리 글을 배우기 위한 활동을 담은 기록영화입니다.

수염이 허연 늙은이나 가정주부, 어린이 등 남녀로소 가림없이 누구나 글을 배우기 위하여 애쓰는 당시 고국인민들의 모습이 화면에 잘 나타나고있었는데 이것을 문맹퇴치운동이라고 명명하고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니 저와 우리 동포들이 우리 말과 글을 배워가던 모습과 방불하여 참으로 인상적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민족어를 배워가던 나날을 《문맹퇴치》라는 이름으로 회억하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전 쏘련시기에 의무교육을 받은 우리 고려인들의 경우에 문맹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수 있습니다. 더우기 동포일군들의 경우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지식을 소유했다고 해도 민족의 중요한 징표인 우리 말을 번지지도 못하고 글로 쓰지도 못한다면 민족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할수 없습니다.

언어는 민족을 규정짓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며 민족의 존재와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혈통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여 그 민족이 다되였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해당 민족성원들은 자기의 언어를 통하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체득하며 그 과정에 민족의 넋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 제 민족의 말과 글을 배우는것을 문맹퇴치라고 부르는것이야말로 적중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지 저는 우리 고려인들이 모국어를 몰라 부끄럽던 심정을 여러번 당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고국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였습니다.

고국에서 여러날 체류하다나니 머리칼이 길어져 우리 동포들이 리발소에 가게 되였습니다. 우리 대표단성원들속에는 과학기관에서 일하던 한 동포가 있었는데 그는 머리를 짧게 깎군 하던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모국어를 모르다나니 리발사에게 말해주는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고 리발할 때 리발사에게 자기의 심정을 말해달라고 부탁하는것이였습니다. 그러마 하고 동의하였는데 막상 리발의자에 올라선 그를 보니 불쑥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노라 하는 과학자가 모국어도 몰라 머리칼도 남의 입을 빌려 깎으려 하다니.)

한번 골려주자는 생각에 시치미를 떼고 못 본척 하였습니다. 머리를 깎기 시작하자 그는 저에게 눈길을 돌리고 말 좀 해달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움직일념을 않자 바빠난 그는 울상이 되여 제쪽으로 눈길을 자주 돌리며 안절부절 못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못이기는척 하고 리발사에게로 다가가 그의 심정을 말해주었습니다.

리발을 마치고 나오며 그는 저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가고 섭섭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는 그에게 저는 한다하는 과학자가 모국어도 몰라 남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는가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늘처럼 낯이 뜨거워보기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제 나라 말도 모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1992년 우리 동포들이 총련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총련중앙을 방문하여 한덕수의장과 담화과정에 있은 일입니다.

그때 우리일행중에 우리 말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제가 일행의 통역을 맡아하게 되였습니다. 저의 모국어실력이라는것도 원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였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통역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것이 하도 답답한지 한덕수의장이 우리들에게 통역이 없이 자유롭게 말했으면 좋겠다고, 조선사람이라면 제 나라 말은 알고있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점잖게 충고해주는것이였습니다.

그때 얼마나 부끄럽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짐을 금할수 없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우리 말을 모르는것을 가장 부끄럽게 여긴것은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웠을 때입니다.

1994년 4월 김일성주석님 탄생 82돐을 경축하기 위하여 국제고통련대표단이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였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대표단성원들을 접견해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포들은 한없이 기쁜 마음에도 큰 걱정이 앞섰으니 그것은 우리 말을 모르는것이였습니다. 주석님께 인사말이나마 옳바로 올려야 하겠는데 모국어를 모르니 참으로 난사였습니다.

그래서 대표단성원들은 안내일군에게 간청하여 필요한 몇마디 말만을 우리 말로 번질수 있도록 머리에 익혔습니다.

그런데 막상 위대하신 김일성주석님앞에 나서니 겨우 익혔던 우리 말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대표단단장이였던 국제고통련 주영일부위원장은 주석님께서 앞으로 다가오시자 자기 소개말도 생각나지 않아 갑자르다가 할수없이 통역을 통해서야 자기소개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주석님께서는 동포들을 한품에 안으시고 영광의 기념촬영까지 해주시였습니다.

일생에 가장 큰 영광으로 추억될 김일성주석님의 접견시에 동포들은 이렇게 민족의 어버이께 인사의 말씀조차 변변히 올리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자식으로 되였습니다.

그 일이 동기가 되여 그는 우리 말을 직심스레 배워 지금은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지금도 주영일동포는 그때의 일을 자주 떠올리며 자기처럼 일생의 한을 남기지 말고 우리 말을 배워야 한다고 동포들에게 당부하군 합니다.

계기는 어떻든지간에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 고통련일군들로 하여금 우리 말과 글을 알아야 하겠다는 절박감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제 민족의 말과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민족의 넋을 지키고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노력한다는것은 생각도 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 고통련조직에서 우리 말과 글교육은 고통련일군들부터 배우는것으로 시작되였습니다.

고통련조직에서는 고국과의 련계밑에 일군들이 고국을 방문하는 기회에 일정한 기간 우리 말과 글을 배우도록 하는것과 함께 민족교육의 실상을 보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국에서 구입한 우리 말 교육자료들을 가지고 우리 말 실력이 있는 동포들을 인입하여 현지실정에 맞게 학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우리 말 학습에서 일정하게 파악이 생기자 고통련조직에서는 동포들이 살고있는 각지에 조선말강습소를 내오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우즈베끼스딴에서의 경험을 서술하는것으로 당시 동포들에게 우리 글을 배워주던 과정을 담아볼가 합니다.

당시 이전 쏘련지역안의 우리 동포들의 절대다수가 우리 말과 글을 모르고있었습니다.

우즈베끼스딴의 수도 따슈껜뜨에만도 약 5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있었으나 조선말로 사고하고 글을 쓸수 있는 사람이 겨우 250명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우즈베끼스딴동포들의 실태는 좀 나은편이였습니다. 로씨야의 수도 모스크바에는 5천여명의 조선사람들이 있었으나 제대로 우리 말을 번지는 동포들이 2~3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러한 실태에서 광범한 동포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배워주자고 하니 걸리는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애로로 제기된것은 강사문제였습니다.

우리 말과 글을 알고있다고 하는 일부 동포들의 경우에도 문법적기초가 너무도 빈약했고 옛날 조선의 고어와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고있었습니다. 이것은 동포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장려할것이 못되였습니다.

이러한 때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동포들의 민족어교육을 위하여 유능한 교원들과 필요한 교재들을 수많이 보내주도록 하시였습니다.

우즈베끼스딴에도 여러명의 교원들이 파견되여왔습니다.

고국의 진심어린 방조는 가물철 초원이 단비를 만난것과 같이 동포들의 민족어교육사업에 활력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고국에서 파견되여온 교원들과 합심하여 판을 크게 벌렸습니다.

무엇보다 동포핵심들과 감수성이 빠른 대학생출신동포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우리 말 교육을 주어 빠른 기간에 강사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고통련에서는 이들에 의거하여 동포들이 사는 곳에 조선말강습소를 꾸려놓고 각계각층의 동포들에게 우리 말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은 결코 처음부터 쉽게 이루어진것이 아니였습니다.

쏘련의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생활상고충을 겪고있던 시기여서 적지 않은 동포들이 먹고살기 힘든 때에 살아가는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글공부나 한가하게 하고있겠는가고 하면서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강습소에 나온 동포들속에서도 글공부가 힘들다고 하여 신심을 못 가지고있는 사람들도 나타나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동포들속에 민족어교육이 단순히 우리 말과 글을 배우자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민족의 넋을 되살리는 숭고한 사업이라는 내용의 계몽사업을 따라세웠습니다.

여기에서 고국에서 온 교원들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의 민족중시사상에 대한 해설과 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대한 독서모임, 사진 및 도서전시회 등을 진행하면서 동포들에게 해외에 살아도 긍지높은 조선민족의 한 성원이라는 자각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강의내용을 동포대중의 심리에 맞게 진행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우리 말과 글을 배워줌에 있어서도 민족풍습과 도덕을 많이 알도록 하고 조선노래보급과 고국의 소식도 들려주었으며 그에 따르는 수천점의 교편물과 직관물을 만들어 리용하였습니다.

동포조직과 교원들의 이러한 활동으로 동포들속에서는 점차 민족어학습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고 학습에서 열의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강습에는 해당 지역의 각이한 년령과 직업을 가진 각계각층의 동포들이 참가하였습니다. 대학생도 회사원도 있었고 젖먹이어린애가 달린 아낙네도 있었으며 백발을 얹은 로인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배우는 학생의 심정으로 강습에 참가하여 강사의 강의내용을 귀담아듣군 하였습니다.

우리 말 강습에서는 자모쓰기와 읽기, 단어쓰기, 토붙이기, 문장만들기, 일상생활용어, 정치용어 등을 하나하나 배워주었습니다.

강의를 받으며 인상적이였던것은 일상생활용어를 학습할 때였습니다.

생활에서 일상 쓰는 단어들에 대한 따라읽기를 하고있던중 일부 동포들이 머리를 기웃거리며 수군거리는것이 보였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강사가 물어보자 한 동포가 일어서며 자기들이 알고있는 조선말과 다르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러면서 금방 학습하던 단어중에서 간장을 지렁이라고 하고 과일을 야금, 사과를 능금이라고 어릴 때 부모들에게서 배웠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강사는 웃으며 그것은 표준조선말이 아니라 옛날 조선사람들이 쓰던 고어라고 말하며 그 리유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그 말들은 옛날 조선의 함경도지방에서 통용되던 말인데 중앙아시아지역에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함경도출신이여서 그 말들이 아직 리용되고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고국에서 사용하지 않고있는지 오래다는것이였습니다.

저도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 말을 알고있다고 하는 동포들의 생활용어에는 이런 고어들이 많았습니다. 실례로 마차를 슬기로, 증기빵을 만두로, 자전거를 쟁거라고 부르고있었습니다.

이것은 한세기 가까운 세월 고국과 문화적련계가 없이 살아온 우리 동포들의 실태가 어떤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됩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강사는 고국과 떨어져 살아온 결과라고, 이런 민족의 불행이 아직 가셔지지 않았다고, 우리 동포들도 열심히 배워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일해나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날의 이야기는 동포들의 가슴속에 민족의 넋을 깊이 새겨주는 하나의 계기로 되였습니다.

강의가 심화될수록 동포들의 우리 말 학습열의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강습소에서는 동포들의 우리 말 실력이 올라가는데 맞게 고국의 출판물을 나누어주어 읽게 하거나 고국의 영화들과 노래들을 보급하여 느낀 점을 우리 말로 표현하기 위한 이야기모임도 조직하고 강의에서만이 아니라 쉴참에 모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동포들이 민족어실력과 함께 민족에 대한 리해를 깊이하는 과정이였습니다.

우리 말을 배워가는 나날속에 동포들은 우리 말과 글의 우수성에 대하여서도 깊이 체득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말과 글은 배우기 쉽고 어휘가 풍부하며 표현이 섬세하고 억양이 부드럽습니다. 또한 못하는 말, 못 적는 글이 없어 로어에 비해 표현범위가 월등하게 다양하고 과학적으로 되여있습니다. 그리고 최신과학기술을 도입하는데서도 다른 문자들에 비할바 없이 우월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우리 말과 글이 국제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언어로 공인되여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도 문맹퇴치사업에서 공적이 있는 나라들에 주는 상을 《훈민정음》을 창제한 15세기 조선의 왕이였던 세종왕의 이름을 따서 세종상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말은 있으되 글을 가지고있지 못한 민족만도 수백이 된다고 볼 때 이러한 우수한 자기 말과 글을 가지고있다는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동포들은 우리 민족어의 우수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새기며 우리 말 학습에 더욱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배워나갔습니다. 그 과정에 동포들의 우리 말 실력은 눈에 뜨이게 높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동포들사이에 마음과 마음을 맞추고 화목을 이룩해나가는 나날이기도 하였습니다.

강습소를 졸업하던 날 동포들은 고국의 교원들과 동포일군들에게 자기들은 강습소를 졸업하고 딴 사람이 되였다고, 하나의 민족학교를 나온것과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하여 강습소의 소문은 널리 퍼져 더욱더 많은 동포들이 우리 말과 글을 배우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즈베끼스딴에 수십개의 강습소를 꾸려놓고 수천명의 동포들을 졸업시켰습니다.

이러한 성과속에는 고국에서 파견되여온 교원들의 숨은 공로가 깃들어있습니다. 그들은 이역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고국의 사심없는 방조와 고통련조직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전 쏘련지역에 근 200개나 되는 조선말강습소가 꾸려져 수많은 동포들이 우리 말과 글을 배우게 되였습니다.

고통련에서는 우리 말과 글을 강습을 통하여 배워주는 한편 여러가지 선전수단들을 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국제고통련의 기관지인 《통일》신문과 뷸레찐에 《조선말을 배웁시다》, 《전통의상, 풍습》 등의 표제를 달고 우리의 말과 글, 민족문화전통을 소개선전하는 방법으로 배워주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국제고통련 인터네트홈페지를 개설하고 《혼자서 배울수 있는 조선말》을 비롯하여 많은 다매체편집물을 통한 교육도 진행하였습니다.

고통련조직들에서는 모임들과 기념행사들을 우리 말로 진행하고 동포들이 서로 우리 말로 의사를 나누는것을 장려하여 그들이 우리 말을 더욱 익히고 숙련시켜나가도록 하고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오늘 고통련의 영향하에 있는 동포들 거의 모두가 우리 말을 알게 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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