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쏘크에서 고통련으로
고통련이 결성되여 오늘에 이르는 기간 세계정치정세는 예측할수 없이 복잡하고 첨예한 양상을 띠며 변화되였습니다.
이전 쏘련지역에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쏘련의 붕괴로 많은 민족국가들이 새로 독립하고 국가간 경계선이 그어져 이전 쏘련판도에서 지정학적개념이 달라지게 되였습니다. 동시에 국가간에 자기 나라의 요구와 리익을 우선시하고 여기에 서방렬강들이 코를 내밀어 나라와 민족들사이에 알륵과 모순이 격화되였습니다. 이것은 필연코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의식상태와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한편 우리 민족내부에서도 고통련의 활동을 달가와하지 않는 반민족, 반통일세력들의 책동이 계속되고있었습니다.
이러한 류동적이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고통련은 그에 주동적으로 대처하며 부단히 조직을 확대발전하여왔습니다.
저는 그 과정에 있은 일들중에서 고통련력사에서 전환적인 계기로 되였던 대회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개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고통련에 대한 독자들의 리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전 쏘련의 광활한 지역들에 널려사는 조선동포들이 민족애의 기치아래 동포조직인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아쏘크)를 뭇고 의로운 활동을 벌려온 때로부터 4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나날에 아쏘크는 조직을 확대공고화하는 사업과 조국통일을 위한 제반 과업수행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변화되고있는 현실은 아쏘크를 정세발전과 이 지역 동포들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강화발전시킬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타개책으로 우리가 찾아낸 방도의 하나는 조직의 명칭문제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인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라는 명칭은 조선의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라는 그 성격과 사명은 부각되지만 민족의 넋과 정기를 살리기 위한 조직이라는 애족적내용이 잘 반영되여있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동포대중을 조직의 두리에 묶어세우는데 제한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해체되여 정치적실체가 없어진 쏘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달고있을 명분도 없었습니다.
동포대중을 더 많이, 더 굳게 결속시켜나가자면 조직의 명칭을 누구나 다 접수할수 있는 포괄적이며 범민족적인 지향을 반영하면서도 동포들의 요구와 실정에 맞는 명칭으로 바꾸어야 하였습니다.
아쏘크일군들은 동포조직의 이름을 새롭게 고치는것이 여러모로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이름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군들과 동포들이 서로 고심하고 의견을 나누며 찾은 이름이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략칭 국제고통련)였습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세우고 수백년간 강력한 국가로 존재하며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나라의 이름이였습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마르꼬 뽈로였다고 전해지고있습니다.
마르꼬(1254-1324년)는 이딸리아의 베네찌아에서 출생하여 일찌기 량부모를 다 잃고 동방을 려행하면서 얼마동안 중국에 머물러있은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중국은 원나라시대였습니다.
마르꼬는 원나라 궁중에 있으면서 주변나라들을 돌아보고 그후 《동방견문록》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동방나라들의 지리, 풍속, 동식물, 특산물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었습니다.
마르꼬는 동방에 대한 이야기에서 원나라의 동쪽에 《꼬레아》라는 나라가 있는데 많은 동방나라들이 칭기스한후손들의 발밑에 있었지만 고려만은 당당한 주권국가였다, 원나라사람들도 《지금 천하에 자기의 인민과 사직(주권)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고있는 나라는 고려뿐이다.》라고 인정하고있다고 썼습니다.
마르꼬는 거듭되는 원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나가는 고려를 유럽말로 《꼬레아》로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꼬레아》, 《까레야》, 《코리아》 등 민족어에 따라 억양은 좀 다르지만 조선을 가리키는 이 말은 세계를 말발굽밑에 짓밟아버린 칭기스한의 몽골군대와도 싸워이긴 강력한 고려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여 굳어지게 되였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조선의 통일방안으로 제시하신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도 민족의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라는 이름으로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과 열망을 반영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이전 쏘련지역에서 사는 동포들의 정서에도 맞는것이였습니다. 저는 동포활동관계로 중국에도 가보고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있는 동포들과도 대상해보았지만 우리 민족을 가리켜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전 쏘련지역의 동포들뿐이였습니다. 아마도 한세기전에 외세렬강들에게 뜯기우는 리조말기의 허약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이국의 타민족들속에서 자신들이 강성했던 나라를 세운 민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살려는 생각에서였던가 봅니다. 그것이 굳어져 오늘날까지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생각하는 동포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동포들에게서 고려인과 조선인이 무엇이 다른가 하는 물음을 받군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민족의 력사와 결부하여 고려인과 조선인은 말만 다를뿐 한민족이며 오늘의 조선은 그전날의 조선이 아니라는데 대하여, 그래서 지금 동포들속에서 자신을 조선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있다고 말해주면서 동시에 김일성주석님께서 제시하신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의 정당성에 대하여서도 동포들의 심리에 맞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면 담화는 자연히 동포들에게 민족에 대한 인식과 조선통일의 의욕을 안겨주는 계기로 되였습니다.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를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라는 명칭으로 바꾸는것은 이전 쏘련지역안의 동포들 누구나 다 공감하고 애족의 뜻이 잘 반영된 합법칙적인것이면서 아울러 그러한 조직의 명칭아래 동포들을 더 많이, 더 굳게 묶어세울수 있는 현실에 부합되고 활동의 목적에도 맞는 방도로 되였습니다.
이리하여 명칭을 바꾸는 문제를 비롯하여 변화되는 현실에 맞게 조직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 제2차대회가 열리게 되였습니다.
대회는 1993년 9월 17일 로씨야련방공화국 최고쏘베트(당시) 국회쎈터에서 진행되였습니다.
대회에는 로씨야와 우즈베끼스딴, 까자흐스딴, 끼르기즈스딴, 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들에서 온 아쏘크중앙위원들과 대표들을 비롯한 동포들 360여명이 참가하였습니다. 또한 고국의 대표단과 로씨야주재 조선대사, 서만술부의장(당시)을 단장으로 하는 총련대표단, 범민련 해외본부 림민식사무총장, 양영동의장(당시)을 단장으로 하는 범민련 재중조선인대표단 그리고 로련최고쏘베트(당시)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과 해군대장 그리샤노브를 비롯한 주재국의 인사들도 참가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아쏘크위원장이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보고에서 조직이 결성된 후 당시까지의 사업정형을 총화하고 과업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가 걸어온 4년로정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손길아래 거듭되는 난관과 시련을 박차고 투쟁과 전진의 한길로 힘차게 달려온 승리와 영광의 길이였다고 하면서 총결기간에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조선사람들이 널려사는 거의 모든 공화국과 지역들에 동포조직을 뭇고 로병회, 청년회, 녀성회를 비롯한 계층별조직까지 꾸려놓음으로써 조직이 40여만의 동포군중속에 뿌리내린 위력한 동포조직으로 자라난것이라는데 대하여 긍지높이 총화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아쏘크가 동포들속에서 민족성을 되살리고 민족의 넋을 심어주기 위한 운동을 힘있게 벌린 결과 지금에 와서는 5천여명의 동포들이 고국을 방문하여 내 나라를 알게 되고 조선말과 문화전통을 배울수 있었을뿐아니라 자체의 신문사도 가지게 되고 100여개의 조선말강습소를 운영하는 과정에 이룩한 성과들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그는 동포들이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민족의 륭성번영에 특색있는 기여를 한데 대하여서와 주재국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도모하여 조선통일의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는것과 함께 평양과 판문점, 도꾜와 선양 등에서 진행한 력사적인 범민족대회,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많은 대표들을 파견함으로써 온 겨레의 통일대행진에 합류한데 대하여서도 상세히 지적하였습니다.
보고에 이어 토론과 축하연설들이 있었습니다.
대회에서는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를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국제고통련)로 개칭하고 강령과 규약을 수정보충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또한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지도기관을 선거하였습니다. 국제고통련 위원장으로는 아쏘크위원장인 강일선생이 선거되였습니다.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 제2차대회는 조직의 확대와 강화발전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계기로, 전환점으로 되였습니다.
우선 국제고통련의 지위를 높이고 동포들모두가 민족의 통일을 비롯한 제반 과업수행에 떨쳐나선 긍지와 자랑을 더욱 두터이 한 대회였습니다.
이전 쏘련지역에는 많은 민족이 살고있으나 로씨야최고쏘베트 국회쎈터에서 하나의 민족단체가 자기 대회를 한것은 처음이였습니다. 더우기 세상에 제일로 존엄높은 주체조선의 대표단이 참가하고 해외동포조직의 본보기로서의 영예를 빛내여가고있는 총련, 수많은 조선동포들을 망라한 범민련 재중조선인본부 대표들이 참가하여 대회의 성과를 열렬히 축하해준것은 우리 동포들에게 더없는 자부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아쏘크위원장의 보고에도 아쏘크활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반영되여있었습니다.
보고를 들으며 동포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흐뭇하고 격동된 감정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저의 심정도 다를바 없었습니다. 아쏘크사무국장으로서 조직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고있는 저였지만 구체적인 자료들을 반영한 보고를 들으니 우리들이 거둔 성과가 새삼스럽게 안겨왔습니다. 당시의 환경에서 그러한 성과를 거둔다는것은 누구나 경탄할만 한 일이였습니다.
저는 보고를 들으면서 동포들에게 민족의 넋을 안겨주시기 위하여 기울이신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의 동포애적사랑에 대하여 가슴뜨겁게 느끼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뿐이 아닌 대회에 참가한 모든 동포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습니다.
대회는 또한 국제고통련대렬의 통일과 단결을 과시한 의의깊은 대회였습니다.
대회를 통하여 지도기관도 더욱 정비보강되고 조직의 발전을 재정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도 강구되는 등 위력한 해외동포조직으로서의 체모를 더욱 갖추게 되였습니다.
대회에 상정된 모든 안건들에 대한 토의는 회의참가자들모두의 전적인 지지와 찬동을 받았으며 대회흐름의 전과정도 질서정연하고 문제토의에 적극적이였습니다.
대회기간 문제를 고의적으로 복잡하게 만드는것과 같은 서방식《자유화》현상은 단 한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조직의 통일과 단결이 강화된 뚜렷한 증거라고 봅니다.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 제2차대회의 진행기간 아쏘크청년대회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지지하는 서명운동, 조선의 도서, 사진, 민예품전시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되였습니다.
쏘련조선통일촉진위원회 제2차대회가 온 민족의 기대와 관심속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끝난것과 관련하여 로씨야신문 《쁘라우다》도 《조선인들 단합에로》라는 제목을 달고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우리들은 자기들이 하고있는 사업에 대한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동포애국사업에 더욱 전심전력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우리들은 당면하여 새롭게 출범한 국제고통련이 중앙으로부터 공화국, 주, 구역기층조직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조직구조와 지도체계를 갖추도록 하였으며 전임 또는 비전임을 배합하여 기구직제에 따르는 간부들을 꾸리고 중앙으로부터 하부말단까지 움직이는 사업체계를 완벽하게 세워나갔습니다.
동시에 동포들속에서 신망이 있고 지도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선발배치하고 그들의 지도능력을 높여주기 위한 대책도 세워나갔습니다.
이리하여 제2차대회가 있은 이후 국제고통련의 조직구조와 지도체계가 완비되였으며 새로 9개 주에서 고통련조직이 창설되고 적지 않은 동포들이 조직에 새로 들어옴으로써 국제고통련조직은 더욱 확대강화되였습니다.
또한 국제고통련산하에 사회단체들이 늘어남으로써 대중적지반도 다져지게 되였습니다.
이 성과속에는 강일위원장의 공로가 적지 않게 깃들어있습니다.
그는 반통일세력의 갖은 모해와 위협속에서도 동요없이 어떻게 하나 국제고통련을 힘있는 애국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불편한 몸이였으나 모스크바와 따슈껜뜨를 비롯한 여러곳을 자주 오가면서 조직강화를 위해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심장이 매우 좋지 않아 언젠가 제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지금 시한탄을 안고있는것과 같다, 언제 넘어질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는것은 두렵지 않은데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죽을가봐 그게 두렵다, 끝까지 국제고통련사업을 하다가 죽을 결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자기에게 민족의 넋을 안겨주시고 내세워주신 민족의 어버이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동포들을 위하여, 겨레를 위하여 온넋을 깡그리 바쳐가는 한 인간의 고결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 결심을 지켜 운명하는 마지막순간까지 고통련조직의 강화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강일선생만이 아니라 조선의 통일을 위해 고통련조직의 강화발전을 위해 자신의 심신을 깡그리 불태우며 활동한 동포들은 헤아릴수 없습니다.
1990년대 후반기 이전 쏘련지역에서 변화되고있는 정세는 국제고통련의 사업체계를 보다 개선완비할것을 절박하게 요구하고있었습니다.
국제고통련이 조직될 당시에는 쏘련이 하나의 련방국가였던 관계로 우즈베끼스딴의 수도 따슈껜뜨시에 본부를 두고있으면서 여러 가맹공화국들에 조직되여있는 고통련조직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데서 별로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쏘련이 붕괴되면서 독립국가로 된 이전 가맹공화국들이 제각기 자기 민족의 리익을 앞세우는 원칙에서 국가체계와 법체제를 정비강화하고있었습니다.
특히 국제고통련의 본부가 있는 우즈베끼스딴공화국에서는 1999년초 까리모브대통령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있은 후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출국을 제한하고 국경경비를 전례없이 강화하였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국제고통련중앙조직은 이전 쏘련의 넓은 공간에서 활동하고있는 수많은 공화국 고통련조직들에 대하여 그에 맞는 지도와 대책을 세워주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각 공화국 고통련조직들이 확대강화되고 동포핵심들도 늘어나 공화국 고통련조직을 독자적으로 이끌어나갈수 있는 조건들이 성숙되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변화된 정세와 고통련내부의 실정에 맞게 국제고통련의 사업체계는 그대로 유지하되 실정에 맞게 매개 나라에 있는 고통련의 독자성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조직의 활동을 조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9년 10월 28일 모스크바에서는 변화된 정세와 조직의 실태를 토의하고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며 법적으로 고착시키기 위한 국제고통련 3차대회가 진행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첫째 의정 《총결기간 국제고통련사업과 금후과업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대회에서는 국제고통련강령과 규약을 수정보충하였습니다.
새 강령과 규약에는 국제고통련중앙이 필요에 따라 나라별 고통련조직들에 사업방향을 주며 각 나라별 고통련조직들이 공동으로 해야 할 사업에만 국제고통련이 관여하면서 협의체적조절기능을 수행하도록 밝혀져있습니다. 또한 각 나라별 고통련조직들이 해당 고통련사업과 관련한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책임지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도록 규제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게 고통련중앙조직의 지도기관을 새로 구성하였습니다.
여러 나라와 지역의 고통련위원장들은 이번에 나라별 고통련조직들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장한것은 현실에 부합되는 아주 정당한 조치라고 한결같이 말하였습니다.
국제고통련은 제3차대회이후 나라별 고통련을 강화하는 사업체계로 전환함으로써 아래단위를 강화하는 사업에 힘을 넣게 되였습니다.
국제고통련은 대회와 매해 진행하는 리사회에서 고통련조직들의 사업성과를 총화하고 다음해 활동방향을 제시해주며 그들의 독자성을 높여나가고있습니다.
국제고통련은 또한 기관지 《통일》과 뷸레찐 《통일》의 편집수준을 높이는데 힘을 넣음으로써 내용이 보다 풍부해져 동포교양에 적극 이바지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준비에 이전보다 더 힘을 넣어 국제고통련예술단이 특색있게 준비한 종목들을 가지고 축전에 참가하게 함으로써 금상 1개, 은상 2개, 동상 2개를 축전조직위원회로부터 수여받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나라별 고통련조직들의 독자성이 강화되여 조직들의 사업체계가 서가고 주, 시, 구역 등 지역고통련조직들이 확대강화되였으며 조직이 동포대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게 되였습니다. 갓 결성된 원동고통련만 보더라도 짧은 기간에 동포들이 많이 살고있는 싸할린주와 깜챠뜨까주, 연해변강과 하바롭쓰크변강을 망라하는 조직으로 확대강화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당 나라와 지역의 실정에 맞게 민족문화전통을 고수하고 민족통일을 위한 활동을 능동적으로 벌려나갈수 있게 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국제고통련은 변화되는 정세와 현실적요구에 맞게 조직을 더욱 완비강화한데 기초하여 새 세기에도 조선의 통일을 위한 운동을 변함없이 힘있게 이끌어나갈수 있게 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