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고 투쟁이 있는 법이다.
이남에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은 1946년 10월인민항쟁으로부터 시작하여 1960년 4월인민봉기를 거쳐 1980년 5월 영웅적광주인민봉기로 이어졌다.
1980년 4월 남강원도 정선군 동원탄광 탄부들의 폭동으로 시작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이 거세차게 번지게 되자 12.12숙군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군사파쑈도당은 5. 17폭거로 도전해나섰다.
군사파쑈도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격분한 민중은 중요도시들마다에서 투쟁에 떨쳐나섰다.
특히 광주시민들은 《계엄령철페!》, 《대통령직선제실시!》, 《구속자석방!》 등 여덟가지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대중적시위에 떨쳐나섰다.
이에 당황한 군사파쑈도당은 《전국비상계엄령》확대를 선포하고 계엄군무력으로 광주를 포위하였으며 전기와 수도물공급을 중단하고 전화를 단절하는 한편 일체 차량들의 광주출입을 봉쇄하였다.
그들은 계엄군에 술과 환각제까지 먹여가면서 시위진압에 광분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5월 18일 마침내 봉기에 일떠섰다.
이날 도청에 집결했던 시민들은 계엄군과 맞서자면 무장을 잡아야 한다는것을 절감하고 즉시에 시민군을 조직하여 경찰, 《향토예비군》들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때 량심적인 일부 경찰들도 시민군에 합세하였다.
시민군은 도청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시내 요소마다에 바리케드를 쌓고 계엄군에 저항하였다.
봉기에는 광주시의 남녀로소와 주변의 주민들까지 연 100여만명이나 참가하였다.
그들은 시민군에게 피를 헌혈하고 돌과 기와장을 날라다 주었으며 음식물과 물을 공급하고 은신처를 제공해주면서 시민군과 한마음한뜻이 되여 불사신처럼 싸웠다.
10일간 무장을 들고 완강히 싸운 광주인민봉기는 가장 높은 형태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이였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동방인민들의 현대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가장 크고 가장 격렬한 대중적봉기였고 미제와 전두환군사파쑈도당의 식민지파쑈통치를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영웅적반미자주화투쟁이였다.
이때 이남민중은 미제침략군이 자기 휘하의 《국군》 7만명이나 풀어 봉기군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미국제헬기가 기총사격을 하는 치떨리는 광경을 직접 제눈으로 보고난 다음부터 미국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였다.
나도 이때 서울에서 이 광경을 TV에서 목격하면서 미국놈들을 증오하였다.
이남민중은 미국을 《미국놈》이라고 부르면서 반미성전에 결연히 일떠섰다.
이것은 결코 말바꿈만이 아니였다. 이른바 원조자, 벗으로 알고있던 그 미군이 바로 조선사람을 마구 쏴죽이고 깔아죽이는 철천지원쑤라는것을 깨달은 사상정신적변화에서 일어난 비평인것이다.
당시 이남에서는 미군철수, 자주통일을 기본투쟁강령으로 내세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출범하여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민중의 투쟁을 선도하였다.
1982년 3월에는 애국적청년학생들이 부산미문화원을 불질러 미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련이어 서울의 청년학생들도 미국대사관을 기습하여 미군철수의 구호를 웨치며 완강히 싸웠다.
이남도처에서 청년학생들은 《미군기지반환》, 《미군철수》를 강력히 주장해나섰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살면서 시내 중심지인 퇴계로, 을지로, 종로의 큰 건물들에 《미제는 제 소굴로!》라고 쓴 프랑카드가 매일과 같이 내걸려있는것을 볼수 있었다.
이남민중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은 1987년 6월인민항쟁에서도 힘있게 과시되였다.
6월 10일 전두환군사파쑈도당의 군사독재연장음모에 격분한 서울의 60여만명의 청년학생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은 《독재타도》, 《직선제개헌》, 《미국의 간섭반대》, 《미제축출》, 《민족통일》등의 구호를 웨치며 독재의 아성 청와대로 육박하였다.
한편 광화문네거리에서 항쟁자들은 아스팔트도로에 누워 서로 어깨를 겯고 북녘을 향해 한치한치 판문점으로의 돌파투쟁을 벌리였다.
나도 그날 병원으로 가다가 시위군중들의 영웅적투쟁에 고무되여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파쑈적인 《보안법》과 《련좌제법》의 철페를 주장해오던 나는 그들과 함께 속시원히 구호를 웨치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내가 속한 시위대렬이 동대문에서 행진하여 종로5가를 거쳐 종로2가에 이르렀을 때 경찰들과 백골단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의하여 더 전진하지 못하게 되자 시위대렬은 그 자리에서 놈들과 대치하여 밤늦게까지 싸웠다.
항쟁은 급속히 파급되여 전지역에서 20여일동안이나 계속되였으며 여기에는 300여만명의 각계각층 군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파쑈독재를 반대하는 6월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에는 37개 도, 시, 군들에서 100여만명의 군중이 참가하였다.
이에 당황한 군사파쑈도당은 인민들을 회유기만하기 위하여 이른바 6. 29선언이란것을 들고나오게 되였다.
6월인민항쟁은 미국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으며 파쑈와 독재를 반대하고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이였다.
그후 전대협에서는 뷸레찐 《100만학도》를 발간하고 평양방송을 록취해 각지 대학들에 배포하면서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이북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지지할것을 호소해나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학교들에는 공화국기발이 뻐젓이 게양되고 강당에서는 주체사상강의가 진행되였으며 북을 찬양하는 대자보가 련일 나붙게 되였다.
서울의 책방들에는 《김일성선집》들이 대대적으로 출판되여 나돌리고 경애하는 장군님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사상에 대하여》와 《영화예술론》이 널리 출판보급되게 되였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전하며 《중앙일보》는 《김일성체제를 지지하거나 고려련방제를 선전하는 내용의 도서들이 각 도시와 지역들의 서점들에서 공공연히 팔리고 대학들에서 리념교재로 읽히우고있다.》고 했으며 미국의 《워싱톤 포스트》지는 《김일성주석의 주체사상이 남조선대학가에 널리 보급되고있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은 《대학가에는 북의 선전문구와 리론을 소개한 인쇄물이 공공연히 나도는가 하면 대낮에 대학강의실에서 주체사상강의가 진행된다. 이런 현상이 결코 영웅심리에서 나오는 일시적인것이 아니라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확신적주장이라는데 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207호 강의실에서는 실내가 떠나갈듯 한 힘찬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고려대구속청년학생동지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성원들이 〈김일성주체사상을 따라 행동하자!〉라는 의식화강의를 끝내고 실천을 다짐하는 자리였다.》고 전하였다.
1987년 가을에 현 《헌법》과 관련한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인천의 한 투표소에서는 《김정일령도자는 현세와 래세를 밝히는 찬란한 향도성!》이라는 글쪽지와 함께 《위대한 김정일장군》이라고 쓴 투표지가 나와 이남사회를 격동시켰다.
1990년대 미군에 의하여 감행된 윤금이살해사건때에는 동두천의 전체 시민들이 떨쳐나서 미제의 야수적만행을 규탄하면서 《미군 나가라!》고 웨치며 시가행진을 단행하였다.
특히 2002년 미군이 길가던 두 녀학생을 장갑차의 무한궤도로 무참히 깔아죽인 치떨리는 만행을 계기로 이남민중의 반미투쟁은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고 신효순, 심미선살인사건범국민대책위원회》주최로 서울광화문에서는 초불대행진이 있었다.
분노한 서울시민들은 《미군 나가라!》, 《양키는 제 소굴로!》라는 구호밑에 련일 초불시위를 벌리였고 이에
호응하여 각 지역들에서도 수십만명의 각계각층 군중들이 참가하여 초불을 들고 집회, 추도문화제, 평화대행진 등을 벌리였다.
이 대중적인 반미시위에 화답하여 로씨야, 미국, 일본, 도이췰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 해외동포들속에서도 광범한 반미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이 나날 범국민적인 반미투쟁을 벌려나가기 위한 사회적분위기속에 반미련대련합운동단체들이 수많이 생겼다.
2008년 범민련 남측본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군산미군기지 우리 땅 찾기시민모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미군철수운동본부를 비롯하여 계층별, 부문별, 련대련합단체들은 《한미동맹, 해외파병반대집회》, 평화군축집회와 같은 각종 반미, 반전집회들을 벌려나갔다.
지난 시기에는 《미군사과》, 《범죄자처벌》, 《피해보상》 등의 요구에 국한되여있던 반미투쟁은 미군의 재판권포기, 남조선미국《행정협정》전면개정, 미군철수 등 높은 요구로 이어지며 전개되였다.
반미투쟁의 앞장에는 언제나 피끓는 청년학생들이 앞장에 서있었다.
《한총련》소속 대학생들은 반미실천단을 결성하고 《한총련이 앞장에서 미군 몰아내자!》, 《한총련의 결심 자주통일 안아오자!》는 구호높이 미국의 반공화국강경정책철회와 핵전쟁도발책동분쇄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언론인, 문화인들의 반미투쟁도 새로운 양상을 띠고 진행되였다.
언론인들은 미군만행을 규탄하는 글들을 련이어 써내여 사회적여론을 고조시켰으며 전국대학신문기자련합(전대기련)소속 청년기자들은 반미반전평화선전의 선봉에서 적극적인 문필활동을 벌리였다.
문화인들은 반미주제의 소설들과 반미적인 노래들을 창작보급해나섰다.
작곡가 윤민석은 《더러운 미국》, 《기특한 과자》, 《종이비행기》, 《또다시 너를 묻으며》, 《또라이(머저리) 부쉬》 등 반미대중가요와 시들을 창작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대중의 반미의식을 더욱 높여주는데 기여하여왔다.
그중 시 《빌어먹을 미국》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더러운 나라 빌어먹을 미국
이래도 미국이 정의론 나란가
도대체 왜 우린 할 말도 못하는가
우리가 식민지나라의 노예인가
우리는 웨치리라 미국반대
금메달 훔쳐간 비렬한 도적놈
힘으로 모든것 빼앗으려 날뛰는
추악한 강도 빌어먹을 미국
뻔뻔한 나라 빌어먹을 미국
북엔 전쟁압박 남엔 내정간섭
깡패의 나라 빌어먹을 미국
아직도 미국이 아름다운 나란가
아직도 북이 죽여야 할 적인가
이제는 웨치리라 양키고홈
미국놈들 통일되면 두고보자
당당한 나라 통일조국
민족의 힘으로 통일을 하리라
이외에도 여러 문화인들은 《이제는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 《오만한 나라 미국》과 같은 반미의식이 강한 도서들을 써냈는가 하면 《성조기》와 같은 반미적인 시들도 창작하였으며 반미적인 만화들도 창작하여 전시회도 벌리였다.
미제의 신천학살만행을 고발하는 《MBC》방송특집 《이제는 말할수 있다》를 비롯하여 방송시사프로, 특별방송시사프로들이 TV를 통해 방영되여 큰 파문을 주었다.
철없는 아이들도 《미군 나빠요.》 하면서 한편에서 《미군》이라고 소리치면 다른 편에서는 《나가라》고 화답하는 놀이를 벌리였다.
반미투쟁은 또한 미국상품불매운동과 《미군출입금지》라고 쓴 간판을 내건 식당, 상점들이 늘어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중단없이 각계각층 군중들속에서 세차게 벌어지고있는 이 격동적인 사실은 이남민중의 민족자주의식, 반미의식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를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이전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이 놀라운 현실에 대해 세계여론은 《세계최저의 반미무풍지대가 세계최고의 반미태풍지대》로 변했다고 하면서 《그 결정적요인이 북조선의 선군정치》에 있다고 평하였다.
미국신문 《뉴욕 타임스》는 《이남의 대다수 국민이 미군주둔을 원하지 않고있다. 원하지 않는 곳에 미군이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고 평하였으며 《월 스트리트 져널》은 《남조선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미군을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할것이다.》고 주장해나섰다.
이남민중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은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을 리행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남민중은 서울범민족대회, 제주도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 대구, 부산국제체육경기 등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며 북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려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힘있게 과시하였다.
국제체육경기대회들에 북과 남의 선수들이 손잡고 같이 입장하고 북의 어여쁜 처녀응원단이 《조국》하면 이남의 수만명 관람자들이 《통일》하며 화답하면서 조국통일의 열망을 온 세계에 힘있게 과시했다.
이북의 노래 《우리는 하나》가 제주도 한나산마루에서도 힘있게 울려퍼졌고 이남의 녀가수의 노래가 평양의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의 무대에서도 격정의 눈물속에 불리워졌다.
이남민중의 통일열기는 6. 15공동선언발표 10돐을 계기로 또다시 분출되였다.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발표 10돐을 기념하여 서울의 각계각층 인사들은 평화통일범국민대회를 가지고 모략적인 《천안》호침몰사건을 계기로 조선반도에 전쟁위험을 고조시키는 이남당국에 《대북정책의 근본적인 전환》과 함께 《6. 15정신으로 되돌아갈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회에서는 《다시 6. 15공동선언을 리행하자!》, 《전쟁반대!》, 《조선반도평화를 실현하자!》는 등의 함성이 연방 터져나왔고 통일기를 흔들면서 《6. 15》를 웨치며 행사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행사에 참가한 민주당, 민주로동당 등 야당인사들도 《6. 15로 돌아와야 조선반도에 평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민중과 함께 6. 15공동선언을 실현시켜나가자!》고 열렬히 호소하였다.
이날 광장의 곳곳에서는 사진전시회, 북녘특산물판매, 통일쌀떡치기 등의 행사들도 벌어졌으며 이어 6월 15일에는 《6. 15공동선언 10돐기념 평화통일민족대회》가 열리였다.
당시 통일운동행사중 특별히 주목을 끈것은 통일마라손대회였다.
창원, 대전 등지에서는 엽서띄우기, 통일기손수건만들기 등의 행사에 이어 참가자전원이 잔등에 통일기와 《통일되여 백두산에 가고싶다》는 글발을 새기고 6. 15㎞의 거리를 달리는 행사를 벌리였다. 이때 시력을 잃은 10여명의 사람들까지 서로 손을 맞잡고 전구간을 쉬임없이 달려 시민들의 통일열망을 높여주었다.
이에 앞서 이남민중들은 광주인민봉기 30돐에 즈음하여 광주에서 5. 18자주통일대행진을 진행하였다.
참가자들은 《남북단합, 평화번영의 상징 금강산관광 즉각 재개하라!》, 《남북공동선언 실천하자!》등의 구호판과 현수막을 들고 전남대학교에서 금남로까지 행진하면서 당국자들의 반민주, 반통일적정책을 단죄규탄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남민중은 미제와 리명박패당의 식민지파쑈통치를 반대하고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리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