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품이 그리웠다

 

내가 의거입북하게 된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품이 몹시 그리웠기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나의 고향은 공화국북반부이다. 비록 철모르는 5년동안 북에서 살았지만 나의 머리에는 언제나 고향생각뿐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덤이 있는 보막리의 아늑한 언덕, 언제면 그 정겨운 언덕을 밟아볼수 있을가, 그 언제면 소꿉시절에 뛰놀던 향수넘치는 맑은 시내가에 가볼수 있을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남몰래 눈물짓던 일은 얼마인지 모른다.

하기에 나는 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과 북을 다녀온 사람들, 신문, 방송을 통하여 고향소식과 북의 실상을 알려고 무척 애를 썼다. 바로 이러한 때 나는 충청북도 수안보의 주민들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이라는 제목으로 국문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시를 해병대 동기생으로부터 전해듣게 되였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가,  가난한 농가에서 탄생하신 수령님

나,  나라없는 설음안고 이국땅으로

다,  다정하신 부모님의 큰뜻을 이어

라,  라침판과 같이 앞길을 밝히시며

마,  마을마다 민중을 불러일으키셨네

바,  바다같이 깊으신 지혜를 담으시여

사,  사시장철 긴긴밤을 지새우시며

아,  아침처럼 밝은 나라 구상하셨네

자,  자나깨나 조국광복 일편단심에

차,  차거운 만주벌판 주름잡으시며

카,  캄캄하던 우리 조국 빛내여주셨네

타,  타국에서 이십성상 광복의 나날

파,  파란곡절 다 헤쳐 나라찾은 그이

하,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히 빛나리

 

나의 동기생은 내가 시에 깊은 감동을 금치 못해하고있는데 수안보가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지난 전쟁시기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시고 몸소 현지에 나가시여 1차진공작전을 승리에로 이끄신 사적이 깃든 불멸의 전적지라는것을 알려주면서 당시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된장맛까지 보아주시였다고 하여 이곳 주민들이 해마다 된장을 정성껏 담그어놓고 장군님의 만년장수를 기원해왔다는 가슴뜨거운 이야기도 들려주는것이였다.

이것은 나의 의거를 추동한 첫 사상적동기로 되였다.

한편 나는 심야에 하는 김일성방송대학과 평양방송에서 하는 강의를 자주 귀담아듣군 했다. 이 과정에 나는 위대한 태양의 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고있던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에 린접해있는 산정리에는 산중에 호수가 있다. 남에 있는 호수가운데서 해발고가 제일 높고 경치 또한 아름다워 소문이 난 큰 호수인것이다. 이 호수가에 수수한 조선식기와를 얹은 집 한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태양별장》이다.

1969년 가을이였다.

나는 어느날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태양별장》이라는 이름은 해방직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당시 북반부지역인 이곳을 찾으신 사적이 깃들어있어 이곳 주민들이 흠모의 정을 담아 붙인 이름인것이다.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곳에 친히 찾아오시여 주변농민들과 허물없이 마주앉아 담화하시면서 호수를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농사를 잘 지을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남녘하늘가를 오래도록 바라보시며 미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의 처지를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였다.

학생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별장에 올라가니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마중나오며 이렇게 찾아와 고맙다고 반가와하는것이였다.

고향이 강원도 원산이라는 이 할아버지는 북의 실상을 묻는 나의 물음에 고향에 있었으면 김일성장군님의 치하에서 잘살고있었을터인데 하고 눈물이 글썽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는것이였다.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분은 김일성장군님밖에 어데 또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김일성장군님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네. 나는 이곳에 와서 누가 보건말건 이렇게 별장관리를 한다네. 이것이 나의 락이고 하루일과이네. 누가 돈을 주는것도 아니지만 나는 벌써 19년째 이 일을 하고있네.》

참으로 흥분을 금할수 없는 가슴뜨거운 이야기였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이날부터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존경심이 움트기 시작했다.

나는 그 할아버지처럼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려는 결심밑에 학생들을 데리고 《태양별장》에 자주 찾아가 할아버지와 함께 주변청소도 하였으며 학교에서 산정호수로 가는 4km의 도로량옆에 코스모스를 심고 나무도 심어 가꾸면서 김일성장군님을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하였으며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마음속에도 흠모심을 키워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북방송에 더욱 귀를 기울이면서 《태양별장》할아버지의 말이 진실인가 하는것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였다. 전설적영웅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은 일제의 백만대군을 때려부시고 조국의 해방을 이룩하시였으며 해방후에는 인민적시책을 실시하시여 북을 민중의 지상락원으로 일떠세우시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였다.

그러던중 나는 1978년말에 또한 충격적인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이때 당국에서는 남산에 있는 반공쎈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게 북의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영화상영에 앞서 군당국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게만 보여주는 이 영화는 2급비밀에 속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영화내용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오금을 박는것이였다.

기록영화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최전연을 시찰하시는 장면을 방영하고있었다.

나는 꿈결에도 그리던 위대한 주석님의 영상을 처음으로 뵈옵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건강에 넘치시여 근엄하신 안광으로 전연일대를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시고 동행한 군간부들과 말씀도 하시는것이였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아! 저분이 바로 백두산의 호랑이로 소문난 천출명장 김일성장군님이시로구나.》하고 환성을 지를번하였다. 그날 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영채빛나는 안광, 환하고 인자하신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룰수 없었으며 이튿날도 그후에도 그이의 영상이 눈앞에 환히 안겨오군 했다.

그로부터 시일이 퍼그나 흐른 1985년 10월 어느날이였다.

당시 주식회사맛샘 영업부장을 하던 나는 영업관계로 서울에 있는 외국어대학교를 찾아갔었다.

정문으로부터 떨어져있는 대형게시판에 수백명의 대학생들이 웅성거리고있는것을 보고 웬일인가 하여 그곳으로 다가갔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게시판에는 붉은 마지크로 《백두광명성 만세!》라고 쓴 대자보가 나붙어있었던것이였다. 모조지전지 7장에다 가로 큼직큼직하게 쓴 대자보는 멀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나는 이름할수 없는 큰 충격으로 가슴이 세차게 높뛰는것을 걷잡을수 없었다.

이미 평양방송을 통하여 백두광명성이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존칭하는 표현이라는것을 알고있었지만 파쑈가 살판치는 서울 한복판에서 이처럼 문득 그분을 우러르는 대자보를 직접 대하게 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 흥분하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나는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며 옆의 대학생들과 함께 대자보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거기에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남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줄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을 받드시고 전당, 전국, 전민을 총동원하시여 세계구제력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막대한 량의 쌀과 세멘트, 천과 의약품을 긴급히 보내주기 위한 철야투쟁을 몸소 진두에서 지휘하시였다는 감동없이는 읽을수 없는 내용이 씌여져있었다. 글을 다 읽고난 나는 그이를 직접 만나뵈옵는것만 같아 진정할수 없었다. 나의 옆에 있던 한 학생은 《참말로 김정일장군님은 이남민중의 구세주,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시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의 앞에 있던 후리후리한 키의 학생은 손을 번쩍 들더니 《오! 백두광명성! 그이는 광휘로운 빛발로 어두운 이 강산에 통일의 새 아침을 밝혀주리니, 100만학도들이여! 떨쳐나서자, 그이를 따라 통일운동의 광장에로!》하고 즉흥시를 읊어대는것이였다. 이에 화답하여 모여섰던 수백명의 대학생들이 《옳소!》, 《옳소!》 하며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는것이였다. 나는 열광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흥분을 금할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여러가지 떠오르는 생각으로 진정할수 없었다.

(진정 내 삶의 곳은 어딘가?), (내가 안겨살아야 할 품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어느덧 나의 가슴속에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빛이 한가득 안겨져왔다.

내가 의거입북을 단행하던 그해 5월에도 나는 이와 류사한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그때에도 볼일이 있어 외국어대학교에 갔댔는데 그 게시판에 《친지김동 만만세!》라고 쓴 큰 대자보가 나붙어있었다.

《친지김동》이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라는 존칭존함의 첫 글자만 따서 부르는 애칭이였다.

역시 전지 7장의 규격에 웃단에 가로 《친지김동 만만세!》라고 쓰고 그 밑단에는 친애하는 그이께서 이룩하신 사상,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보건, 체육, 군사 등 각 분야의 업적을 상세히 전하고있었다.

대학생들이 대자보의 내용을 한창 읽고있는데 정문쪽에서 사복을 하고 나타난 안기부놈들과 경찰들이 쓸어들어 학생들에게 해산하라고 고아대며 대자보를 마구 뜯는것이였다.

이에 맞서 학생들이 《왜 대자보를 뜯는가, 손대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고 하면서 놈들에게 돌벼락을 안기며 완강히 저항해나섰다.

내가 특히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 매혹된것은 이무렵 그이의 로작발취본을 보게 된 때부터였다.

어느날 서울 종로5가에 있는 지하철도로 내려가던 나는 전대협 학생인듯 한 20대안팎의 젊은이가 8절지규격의 종이 한 뭉치를 뿌리고 앞서가는것을 보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것을 줏느라고 붐비였다. 나도 한장 얼른 집어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나타나 그것을 회수하느라고 미쳐날뛰였다. 나는 용케도 안주머니에 넣고 빠른 걸음을 한 관계로 압수당하지 않게 되였다. 호기심이 동해 집에 들어서자바람으로 펼쳐보았더니 그것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집필하신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요약발취한것이였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읽었다. 마디마디 철의 론리로 엮은것이여서 나는 밤가는줄 모르고 읽고 또 읽었다. 《사람은 모든것의 주인이며 모든것을 결정한다.》,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존재이다.》, 《인민대중은 사회력사의 주체이다.》 이 모든 명언들은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였고 처음으로 대하는 철의 론리였다.

나는 갑자기 머리속에 차있던 자본주의사상, 반공사상, 숭미사대주의사상 등 온갖 잡탕들이 일시에 날아나버리는것 같았고 앞이 밝게 탁 트이는것 같은감을 느끼였다.

아, 세상에 이런 철의 론리도 다 있는가, 이 세상 모든 리론, 모든 철리를 다 합친다한들 어찌 이에 견줄수 있겠는가, 콜룸부스는 실재한 아메리카대륙을 가본데 불과한것을 유명한 발견이라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였는데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성, 인민대중의 힘을 과학적으로 천명하시고 째인 론리로 정립하시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감탄하고 또 감탄하면서 위대한 김정일동지이시야말로 사상리론의 대가이시며 동서고금의 유명한 사상리론가, 철학가들의 대부이시라는것을 잘 알게 되였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확신하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주석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장군님은 우리 7천만 온 겨레를 한품에 안아 이끌어나가실 민족의 어버이이시며 위대한 태양이시라는것을!

내가 흥분된 마음으로 태양의 품을 한없이 그리고있을무렵 현대그룹 정주영회장, 통일애국인사 문익환목사, 《통일의 꽃》 림수경학생이 련이어 평양을 방문해 위대한 주석님을 만나뵙는 격동적인 사실이 일어났다. 이 경이적인 사실들은 나로 하여금 의거입북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여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저주로운 세상과 결별하고 위대한 태양의 품을 찾아 공화국북반부에로의 의거입북을 단행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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