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양의 품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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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김일성동지는 우리 인민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시며 우리 혁명의 최고뇌수이시고 위대한 수령이십니다.》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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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이였는가
나는 주체34(1945)년 3월 1일 강원도 철원군 북면 보막리에서 농사짓는 가정의 5남 1녀중 넷째아들로 태여났다.
해방직후 부모님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땅을 분여받아 해마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국놈들의 원자탄위협공갈바람에 온 가족이 남으로 나가게 되였다. 당시 5살이였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 형제들과 함께 캄캄한 야밤에 제절로 걷기도 하고 업히워도 가면서 삼엄한 38°선을 넘었는데 아홉살난 누이는 나를 업고 가다가 가시철조망에 걸려 넘어지면서 넙적다리의 살덩어리가 뭉청 떨어져나가는 부상을 당하였다. 후에 나는 그 흉터를 볼 때마다 나때문에 생긴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미안한감을 느끼는것과 함께 미국놈들에 대한 증오심이 불끈 일어나군 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에 질려 향방없이 남으로 남으로 걸음을 옮기던 우리 가정은 대전에 이르러 피난민수용소에 거처하게 되였다.
낯설은 땅에 그것도 감옥과 같은 수용소에 안착될수 없었던 부모님은 다시 짐을 꾸려가지고 고향인 철원군을 찾아 북으로 오다가 38°선이 막혀 더는 갈수가 없게 되자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에 정착하게 되였다.
나는 여기에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군생활을 하다가 1967년 6월에 제대되였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게 된 나의 머리는 복잡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형제들모두가 장사를 하는 바람에 생활에서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나도 형제들과 같이 장사를 하면 그럭저럭 살아갈수 있었다.
허나 나는 세상에 나서 그저 무맥하게 살아가기 싫었고 돈만 아는 인간으로 되고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1년의 계획이라면 곡식을 심고 10년의 계획이라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의 계획이라면 사람을 돌봐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고 깨우쳐준 일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 말을 늘 명심하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때 아버지의 말대로 돈없어 헤매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중학교를 하나 설립하고 무료로 공부시켜보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는것이 바로 보람있게 사는 길이며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하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돈이 한푼도 없었다. 새 살림을 꾸린 형들에게 손을 내밀수도 없었다. 물론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매한가지였다. 모대김과 안타까운 나날이 흘러 반년가까운 세월이 지나갔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어머님에게 말씀드리고 조심히 사업자금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펄쩍 뛰는것이였다.
《얘 규진아, 너 제정신이냐. 이 험악한 세상에서 제 돈으로 숱한 아이들을 공부시키다니. 안된다.》
어머니의 립장은 완강했다.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생각한 나의 희망이 이것으로 끝난단 말인가?!
나는 며칠동안 번민속에서 헤매였다. 허나 나는 일단 결심한 일을 포기할수가 없었다. 다시 어머니를 설득했다. 끈질긴 설득의 나날은 흘러 근 한달이 지났을 때였다.
드디여 어머니는 나를 불러앉혀놓더니 《이 돈은 너한테 주는 세간분배몫이다. 난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허나 사업을 하다가 자금이 떨어지면 또 돈을 달라고 하지 말아라.》고 하면서 500만원의 돈이 저금되여있는 예금통장을 주는것이였다.
나는 고마움에 눈시울이 젖어났다. 날아갈것만 같은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길로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으로 달려갔다. 운천은 포천읍에서 60리 떨어진 곳이며 경기도와 남강원도의 도경계에 있는 비교적 큰 농촌도시로서 주민은 약 2만여명이 살고있었다.
이곳에는 미군과 소위 유엔군에 소속된 타이군이 주둔해있었는데 수천명의 륜락녀성들과 실업자, 거지,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고아들로 득실거렸다. 남에서 빈곤층이 많이 모여사는 곳들중의 하나였다.
나는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큰 포부를 가지고 23살의 나이에 혼자서 일판을 크게 벌려놓았다.
우선 비싼 값의 터전을 사고 건설로동을 청부하여 학교와 강당, 합숙과 식당, 부대건물을 짓는 일을 다그쳤다.
한편 국어, 수학, 화학을 비롯한 과목별선생들을 물색하고 그들을 동원하여 학년별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을 벌리였다.
그리고 학년별교과서와 교구비품, 학용품과 필기도구 등을 준비하는 사업을 동시에 밀고나갔다. 나와 선생들은 그때 힘든줄 모르고 성수가 나서 뛰고 또 뛰였다.
드디여 10칸짜리 번듯한 학교가 일떠섰고 선생과 학생들이 모집되였으며 교과서와 학용품 등이 다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1968년 3월 20일 운천재건중학교를 설립하고 개교하여 교장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학교는 남에서 제일 큰 자선중학교였다. 나는 돈없어 거리에서 헤매던 270명을 받아 공납금도 받지 않고 교과서와 학용품들을 모두 무상으로 주면서 공부시켰다.
나는 그때 류랑걸식자들이 아담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일깨워준 말씀과 어머니가 준 돈으로 후대교육에 몸잠그었다는 긍지로 하여 마냥 기쁘기만 했다.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찾아가 중학교의 개교정형을 이야기하면서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였다.
나는 학생들의 향학열과 근면성을 키워주기 위하여 학교교훈을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자!》로 정했다.
학교를 운영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부모없는 람루한 거지아이가 학교주변에서 맴돌고있었다. 나는 그의 정상이 너무도 가긍하고 불쌍해 목욕과 리발을 시키고 의복을 사입히고 신발을 사신겼더니 어디서 나타난 미남이였던지 정말 미끈절싸했다. 나는 친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를 합숙에 기숙시키면서 개별지도하여 인차 국민학교과정을 떼게 하였으며 또 몇달만에는 중학교 1학년과정을 떼게 하여 나이에 맞게 2학년에 편입시켜주었다. 그의 이름도 열심히 일하면서 배우라는 의미에서 《일배》라고 고쳐주었다.
나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성수가 났다.
그런데 한 1년동안 지내다보니 그 500만원의 밑천이 다 드러나게 되였다.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수도 없었고 설사 요구한대도 어머니에게는 실지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운영을 중단할수도 없었다. 나는 생각하다못해 선생들과 토론했다. 선생들은 일치하게 부업을 하자고 했다. 나의 생각도 그러했다.
이튿날부터 뽕밭을 조성하고 집짐승우리를 짓고 돼지, 닭, 오리, 염소 등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방학때에는 과일, 남새장사를 하면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나는 가정사정이 어려워 점심밥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점심때에는 국수를 삶아주군 하였으며 선생들과 나도 같이 먹군 하였다.
나는 이때 여러 기회에 학생들과 학부형들속에 파쑈적인 《보안법》과 《련좌제법》의 부당성을 해설해주면서 그의 철페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도록 하였다.
《련좌제법》이란 가족, 친척들중에 어느 한사람이라도 《보안법》에 걸리면 그 집안모두가 피해를 받게 되는 세상에 둘도 없는 파쑈적악법인것이다.
나는 이 악법의 부당성을 교직원,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나의 처지와 결부하여 해설해주군 하였다. 그때 나의 이모가 《보안법》에 걸려 13년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고있었는데 바로 우리 가족모두가 이 《련좌제법》에 걸려 항상 감시속에 있었고 6남매중 누구 하나도 공무원으로 되지 못하고있었다.
불우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또 악법철페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게 되자 우리 운천재건중학교의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였다. 신문, 잡지들에서는 《인간상록수》라는 제목으로 저와 우리 중학교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고 제지주식회사를 비롯한 많은 기업소들과 뜻있는 정계, 사회계인사들로부터 학용품 등을 지원받고 견학, 관람 등의 초청도 받았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나를 아니꼽게 보면서 감시와 압력을 가하여왔다.
1978년 5월 남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란 유신독재자가 장기집권을 위하여 꾸며낸것으로서 《대통령》을 직접선거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2 578명 대의원들의 간접선거를 통하여 뽑는 꼭두각시기구인것이다.
나는 이 대의원의 신분을 리용하면 악법철페를 위한 투쟁에서 유리하리라는 생각밑에 선거에 출마하였다. 나는 경기도 포천에서 출마하여 학부형들과 군내 주민들의 지지속에 경쟁률이 가장 높았던 7:1의 관문을 뚫고 33살의 젊은 나이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였다. 나는 이때부터 악법철페투쟁을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벌려나갔다. 그랬더니 당국의 압력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날 포천지역에서 공화당 《국회》의원이 된 오치성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는다는 기별을 보내왔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에 응하지 않고 그날 밤으로 남해가 려수에 있는 친척집에 피신하였다.
한 보름후에 집에 돌아와보니 그사이에 군의 경찰서와 교육당국에서 여러번 사람들이 찾아왔다는것이였다.
나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오치성이라는자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무부 장관을 하면서 사람잡이에 이골이 난자였고 그의 동생은 중앙정보부 4국장을 하고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독사를 보는것만 같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서슬푸른 기상을 하고 나에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라는 사람이 《정부》와 공화당편에 서야지 어째서 야당과 짝짝꿍이를 하면서 《보안법》철페만 떠드는가, 왜 젊은 교장이 삐뚤게만 나가는가, 계속 그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하는것이였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아니나다를가 얼마 있더니 당국에서는 포천군교육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학교를 페교시키는 파쑈적조치를 취하였다.
하여 어머니가 한푼두푼 모아준 돈으로 세운 우리 운천재건중학교는 1980년 2월 제12기 졸업식을 마감하면서 문을 닫게 되였다. 나는 너무나 억울해 통곡하였다. 아니, 나만이 아니였다. 학생들과 선생들, 학부형들도 서로 붙잡고 울면서 군사파쑈도당을 저주하며 규탄하였다.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혐오감을 가지게 되였다.
처음에 나는 그 달콤한 《선거공약》에 속히워 그 무슨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박정희도 뽑아보았고 최규하도 전두환이도 《대통령》으로 뽑아보았다. 그러나 그들모두는 《대통령》감투를 쓰자마자 《선거공약》을 다 집어던지고 리승만역도와 다름없는 미국의 철저한 주구가 되여 온갖 매국배족행위를 다 일삼았다.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된 자신을 원망했다. 원통함을 더이상 참을수 없었던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사무국에 최초로 대의원 사퇴서를 냈다.
그랬더니 통일주체국민회의사무국, 공화당, 포천군경찰서 등에서 연방 얼리기도 하고 위협도 하면서 야단질이였다.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퇴의사를 완강히 뻗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박정희가 미국의 부추김을 받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사살되고 이어 전두환군사깡패들의 12.12숙군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였으며 그 와중에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자기 사명을 끝마치게 되였다.
그후 나는 반《정부》적투쟁을 벌릴 목적으로 민주사회당 경기도 포천군, 련천군, 가평군을 망라한 경기도 제12지구당 위원장으로 당선되여 야당생활을 하게 되였다.
이때 나는 11대《국회》의원선거에 공천을 받았으나 혁신계인물이며 당국의 정책에 불순하다는 리유로 미행을 당하고 압력을 받아 선거 20일을 앞두고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할수없이 경제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나는 1983년 9월부터 1989년 2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규모가 큰 주식회사맛샘 영업부장으로, 이어 화남화학주식회사 리사로 근무하였다.
고등학교때 체육대회 송구종목에서 우승한바 있는 나는 1972년 뮨헨올림픽경기에 대표선수로 선발되기도 했으며 경기도 권투련맹에서 심판위원노릇도 해보았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경기대회때에는 상무성원으로 동원되여 일하기도 하였다. 1989년 3월에 나는 다시 정계에 들어가 《보안법》철페투쟁을 계속할 목적밑에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생활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정계와 교육계, 경제계와 체육계 등에서 중견인물로 일해온 사람이다.
남에는 97살의 나이많은 어머님과 3명의 형, 누이, 동생이 있으며 안해와 1남 2녀의 자식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왜 이러한 생활터전과 보금자리를 버리고 의거입북을 단행하게 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