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살인악법

 

이남에서는 《야, 보안법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이 《법》이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짓밟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살인악법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나는 이 《보안법》에 억눌리고 결박당한 이남사회에서 살다가 공화국북반부로 의거해온 사람으로서 이 《법》의 살인성을 너무나 잘 알며 나도 피해를 많이 받았기때문에 악법철페를 주장해왔었다.

이 《법》은 1948년 리승만역도가 통일애국인사들과 제놈의 반대파들을 탄압할 목적으로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개악하여 만든 악법중의 악법인것이다.

《보안법》은 지난 60여년동안 7차례에 걸쳐 개악하였는데 처음에 4개 조항으로 최고형이 무기징역이던것이 오늘에는 40개 조항으로 늘어나고 사형을 적용할수 있는 조항만도 수십개로 되여있다.

1980년에 이 《법》은 자기의 속편으로 세계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던 《반공법》까지 흡수, 통합함으로써 참으로 못할것이 없는 반민족, 반민주, 반인권, 반인륜, 반통일적인 악법으로 개악되였다.

이 《법》이 악법중의 악법으로 되는것은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규제함을 목적으로 하여 자주, 민주, 통일세력은 말할것도 없고 권력유지에 장애로 되는 모든 사람들을 탄압, 처형의 대상으로 삼고있기때문이다.

이 악법은 공화국을 《반국가단체》로, 북의 동족을 《반국가단체구성원》으로 규정하고 이를 《소멸》할것과 북을 리롭게 하는 모든 행위를 범죄시하며 애당초 만나는것자체를 처형의 대상으로 삼고있다.

여기에 웃음거리와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72년 5월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간 중앙정보부장 리후락이 박정희를 만나러 청와대로 갔을 때였다.

이때 리후락이 박정희에게 평양의 《성천》담배를 주면서 이것을 받으면 《대통령》자체도 《보안법》에 걸린다고 너스레를 피웠는데 박정희는 너는 평양에 갔다왔으니 나보다 더 큰죄를 지었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이 북남대화자체를 거부하는 반통일적악법이라는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이 악법은 규제사항이 광범위하고 모호하며 추상적이여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전근대적인 파쑈적악법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인권, 인간생명을 귀중히 여겨 사형제도자체를 페기한 오늘의 문명세계에서 사형에 처할수 있는 조항만 하여도 수십개나 있는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것은 실로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지난 60여년간 이 《법》의 력사는 애국자들과 무고한 인민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피로 얼룩진 력사이다.

축소해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49년 한해동안에만 하여도 이 악법에 의해 검거, 투옥된 인원은 11만 8 622명이나 되며 같은 해 9∼10월사이에 132개의 정당, 사회단체가 강제해산되였다.

1980년부터 1988년 9월까지의 기간에 이 악법에 의해 2 230여명이 체포, 기소되여 재판을 받았으며 그중 수십명은 사형언도를 받았다.

1993~1994년기간에 민주, 통일, 생존권을 요구해나선 2만 8 000여명의 각계각층 민중들이 이 악법에 의해 구속되였다.

나의 이모도 이 악법의 희생자였다.

이모는 지난 전쟁때 뜻밖에 헤여진 남편이 이북에 살고있다는 어렴풋한 소식을 듣고 너무도 기뻐 인천에서 북송선을 탔었는데 배가 출항하기도 전에 배에서 체포당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보안법》에 의해 《죄》로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불쌍한 이모는 《불온분자》의 딱지를 쓰고 무려 13년간이나 전주교도소에서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도대체 남편을 찾아가는것이 어떻게 되여 죄로 되며 그것도 13년간이나 옥살이를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교도소에 들어가 고생하는 이모의 소식을 썩 후에야 알게 되였는데 그때 나의 머리에는 이 《보안법》이야말로 한가정의 애틋한 정마저 무참히 짓밟는 반인륜적인 악법이라는 인식을 깊이 새기게 되였다.

내가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에서 중학교 교장을 하고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인 임두현이라는 사람과 가깝게 지냈었다.

그는 전쟁시기 미국놈들의 원자탄공갈에 의하여 우리 가정처럼 이남으로 끌려와 운천리에서 철물점을 경영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이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사망하였다는 뜻밖의 소식이 나에게 전해졌다.

급히 그의 집으로 달려가보니 사실이였다. 그의 안해는 나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것이였다.

어느날 저녁 그는 친구를 만나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갔다가 보름이 지난 어느날에야 피투성이가 되여 돌아왔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그가 친구와 술을 한잔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검은 찦차가 앞을 가로막는것이였다. 차에서 뛰여내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를 강제로 싣고 어디론가 급히 차를 몰아갔다. 거기서 그는 별 고문을 다 당하였다고 한다.

안해는 너무도 억이 막혀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다른 말은 별로 한것이 없고 자기 고향 정주가 참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말을 했을뿐인데 그것이 바로 《보안법》을 위반한것으로 되였다는것이였다.

남편은 눈물만 흘리며 계속 부들부들 떨며 괴롭게 신음하다가 《아, 무서워.》라는 말 한마디를 유언처럼 남기고 눈을 감고말았다.

자기가 태여난 정든 고향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것이 《이북찬양죄》가 되여 죽어야 하는 세상, 바로 이것이 이남의 현실이다.

나도 1975년 가을에 하나의 사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어느날 나는 학교앞에 있는 가게방에서 학부형들과 소주 한잔을 나눈적이 있었다. 그 좌석에서 홍기표라는 학부형이 이북에서는 명태도 많이 잡히고 농사도 잘돼 살기가 이남보다 훨씬 좋다고 말한바 있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사람은 학교앞 논에서 벼가을을 하다가 갑자기 검정찦차를 몰고온 3명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하여 붙잡혀가 《보안법》에 걸려 숱한 매를 맞고 한주일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해에도 통일애국인사 한상렬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였다는 단 하나의 리유로 《보안법》에 걸려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공안당국에 의해 두손을 묶이워갔으며 령어의 몸이 되였다.

《보안법》에 의해 이남에서는 지금껏 수많은 뜻있는 인사들과 인민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불구가 되는 가슴아픈 일이 수없이 빚어졌다.

통일을 원하고 북을 동경했다 하여 《보안법》에 걸려 영문도 모르게 강제련행되여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오죽했으면 실종자유가족협의회라는 단체까지 생겨났겠는가.

이 협의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 자기 가족들을 찾기 위해 무어진 단체로서 죽여서 어디에 버렸는지 알수 없어 야산이나 강가, 모래밭을 뒤지기도 하고 강가나 호수에서 쇠갈구리나 그물을 가지고 바닥을 훑으면서 시체를 찾는것을 업으로 하고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가로막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준 《보안법》은 더이상 용납할수 없는 반통일적, 반민족적살인악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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