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과 통일
○ 경계인을 경계하라
(2005. 10. 17)
글제목의 《경계인》의 경계는 영어의 border 혹은 boundary로 변경이라는 뜻이고 뒤의 《경계하라》의 경계는 영어로 caution 혹 warning 즉 조심하라는 뜻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경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이 나의 판단이다. 계급이 생겨나고 민족단위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민족별로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해왔다. 다시말하면 계급 대 계급, 민족 대 민족의 대립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인간의 생명인 자주성과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경계인으로 서서 객관적인 구경군이 될수 없다는것이다. 노예제사회에서 노예 아니면 노예소유주이다.
여기에 경계인(borderman)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노예인데 노예신세를 면하려면 노예소유주들과 생사의 투쟁을 벌려야 한다. 자유, 존엄, 평화, 진리는 쟁취하여 얻는것이지 그냥 주어지는것이 아니다.
진리, 평화, 자유, 인간의 존엄은 편드는(take a side with)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증거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교인들이 믿듯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하느님의 아들처럼 인종, 민족, 모든 가치관을 초월하여 객관성을 지닐수 있는 완벽한 경계인이 어디 또 존재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하느님의 아들도 그 당시의 식민주의자인 로마편을 들지 않고 시종일관 식민지노예신세인 이스라엘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로마의 추종세력인 헤로드도당의 편을 들지 않고 이스라엘민중의 편을 들었으며 유태교지도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일반신도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는 로마의 총독 삐라도와 헤로드도당과 종교지도자 가야바의 합작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 만약 하느님의 아들이 지배자편에 들거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경계인으로 살았다면 십자가를 질 리유가 없었다. 부활은 십자가다음에 오는것이다. 십자가없는 부활을 웨치는자들을 경계하라.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의의 편에 서서 마침내 승리한자들만이 부활의 아침을 찬란하게 맞이할수 있는것이다.
유태교, 그리스도교교인들이 믿는 여호와하느님을 보자.
이스라엘백성들이 에짚트 고센땅에서 종살이하며 벽돌을 굽고있었을 때 가장 편견이 없이 객관성을 지켜야 할 하느님 여호와가 누구의 편을 들었는가? 에짚트탈출기 20장 2절에 다음과 같이 써있다.
《나는 여호와(Yahweh) 너의 하느님으로 너희를 에짚트 즉 속박의 집(house of bondage)에서 해방한자(Liberator)니라.》
전지, 전능, 무소부재한 하느님 여호와가 지배자 에짚트의 편을 들지 않고 고난받고 굶주린 이스라엘노예들의 편을 들어 그들을 해방하였다. 여호와는 에짚트와 이스라엘의 경계에 머무르며 이스라엘노예들의 울부짖음과 굶주림을 구경이나 하고있지 않았다. 진리의 화신인 하느님도 그가 세상에 보낸 아들 예수도 억눌리고 배고픈 약자들의 편을 든 편견자였다. 진리, 평화, 자유, 인간의 존엄을 쟁취하는데는 객관적인 구경군 경계인은 존재할수 없다.
맑스는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 시대의 지배적인 리념들은 그 시대의 지배층의 리념들이였다.》(The ruling ideas of each age have ever been the ideas of its ruling class.)
영어번역에서 ever(아직도)와 have been(현재완료)을 보면 지금까지도 역시 각 시대의 지배론리는 지배층의 론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쉽게 《민중이 력사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쓴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민중이 반드시 력사의 주인이 되여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가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민중》(people as they are)은 우에서 맑스가 지적했듯이 이미 민중이 살고있는 사회의 지배층의 지배론리에 사회화(socialization)될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개인이 태여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리념기구(state ideological apparatus) 즉 학교, 종교, 언론, 출판 등을 장악하고 민중을 쉽게 지배하기 위하여 《거짓의식》 즉 지배론리를 주입하기때문이다. 그러기에 민중은 자기자신을 객관화하기 힘들며 중립을 지키며 경계인이 되기 힘들다. 경계인의 위선이 여기에 있다. 왜냐면 민중은 이미 지배층의 지배론리에 세뇌되여있기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지배층의 편을 들게 되여있다. 나서자라면서 어른이 되여 리해관계의 충돌을 통하여 민중은 지배론리가 《거짓의식》으로 그들의 진정한 뜻을 대변하지 못한다는것을 체험을 통하여 느끼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사회과학적안목이 없이는 지배론리의 허위를 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배층의 대변자들(학자, 언론인, 작가 등)이 내세우는 지배론리가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설사 그 허위를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추어내여 발표하는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지금의 《조, 중, 동》신문들을 포함하여 여러 보수언론들의 횡포를 보면 쉽게 리해할수 있다.
에릭 프롬은 민중이 약한 리유는 《거짓의식》을 가지고있기때문이라고 밝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즉 진실을 알게 되면 민중은 력사를 바꾸는 거대한 힘으로 성장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주체사상에서는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앞세워 인간을 개조하는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민중, 자주적인 사상으로 의식화된 민중만이 력사의 주체가 될수 있다. 경계인은 언제나 기회주의자로서 자기의 리익에 부합되는쪽을 택하기때문에 결국은 지배층에 기생하며 살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객관적관찰자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 자처한다. 그들이 력사발전에 설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경계인이 출타한 사이에 집에 강도가 총을 들고 들어와 가족들을 위협하여 그의 부인과 딸들을 릉욕하고 아들들을 때려눕히고 재산을 몰수한 후 계속 집에 머무르며 살고있다고 가정하자. 경계인은 그것을 목격하고 단지 객관적으로 누가 옳은지를 관찰하며 구경이나 하고있을것인가?
우리 나라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40여년간이나 식민지생활을 했다. 우리 나라에 강도가 총칼을 들고 들어와 부녀자들을 릉욕하고 젊은이들을 군대와 징용에 끌어가고 젊은 녀자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끌어가 군대의 노리개로 삼았으며 쌀을 비롯한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이때도 경계인은 일제와 우리 민족사이의 경계에 중립적으로 서서 구경이나 하는것이 우리 민중들이 택했어야 할 자세였다고 강변할것인가?
지금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져 1천만 리산가족들이 반세기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있고 서로 정전상태에서 언제 전쟁이 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리고 동족끼리 총을 맞대고 무기경쟁으로 엄청난 재원을 랑비하고있다. 미국은 이남을 점령하고 전시군통수권까지 장악하고 실제로 이남을 지배하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계인은 군사분계선이라는 경계에 서서 단지 중립을 지키며 구경이나 하겠다는것인가? 경계인은 미국의 이남지배와 분단을 지지한다고 말하는것이 더 솔직할것이다. 좁혀서 경계인은 자기 집에 강도가 들어와 자기 처와 딸들을 릉욕하고 아들들을 때려눕히고 재산을 도적질해도 자기 살 궁리나 하며 구경이나 하겠다고 솔직히 본색을 드러내는것이 나을것이다.
1970년 칠레에서 처음으로 정식선거를 통하여 알옌데사회주의정권이 확립되였을 때 상당수의 카톨릭사제들은 사회주의리념을 위하여 싸운것이 아니라 신앙심에서 정의를 위해 싸운것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럼 그들은 과연 전혀 어떤 리념도 선택하지 않았던것인가? 그들은 그들이 이미 생활속에서 사회화되여 당연하게 생각되였던 자본주의라는 리념을 자신도 모르게 택했던것이다. 이남의 그리스도교인들중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은 최고의 가치인 영생을 얻는데 관심이 있기때문에 사회주의를 포함한 어떤 리념도 선택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라는 리념을 선택하여 생활속에서 실천하며 살고있다. 그들이 단지 의식하지 못하고있을뿐이다. 자기가 익숙하여 살고있는 자본주의는 리념이 아니고 사회주의만이 리념이라고 생각하는것이 문제이다.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보다 평등하고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것이 사회주의이다. 여기에도 경계인이 설자리는 없다.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력사는 반드시 사회주의의 길로 나간다. 그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 지적하셨듯이 사회주의는 과학이고 정의이고 자주이고 평화이기때문이다. 경계인도 력사의 뒤안길에서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구경이나 하지 말고 정의의 편을 들어 투쟁하기 바란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하게 력사의 방향인 자주의 길,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