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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있었다.
훈훈한 방안에서 리반오는 아들 제마와 마주앉아있었다.
반오의 얼굴에는 이제는 당당한 어른이라 할수 있는 아들 제마에 대한 미더움과 함께 기로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어려있었다.
사실 따져놓고보면 나이 17살에 고향사람들로부터 《함흥명의》라 떠받들리는 아들을 위해서 너무도 바친것이 없는 아버지였다. 땅마지기나 가지고 밥술을 들면서도 아들에게 품 한자루 변변히 들인것이 없었다.
혈연의 부자지간이래도 제마를 내 아들이라고 부를 체면이 없는 반오였다.
《옥도 쫏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한다.》고 제아무리 리제마가 총명을 타고났다 해도 그것을 알아주고 키워준 기로사가 없었다면 아들도 초부신세를 면할수 없었을것이다.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일종의 서운한 느낌, 달랠길 없는 허전함이 어리여있었다.
제마가 소실의 몸에서가 아니라 본댁의 몸에서 떨어진 적자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리제마가 떳떳하게 적자였다면 이길로 문과에 내보내서 본때있게 장원급제를 시키고 소리치며 벼슬자리에 오르게 할수 있겠는데…
하필 하늘은 제마에게 화물단지같은 서자의 운명을 안겨줄건 뭐람.
생각해보면 력대로 서자들속에서 남다른 재주를 지닌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동양에서 의술로 명망이 높았던 허준도 서자이다.
제마로 말하면 남달리 뛰여난 머리가 있겠다, 꾸준한데다 열성도 있어 얼마든지 큰일을 할수 있으련만…
한편 제마는 입을 꾹 다물고 자기 생각에 묻혀있는 아버지를 보느라니 불안하기만 하였다.
별로 찾지 않던 아버지가 불쑥 집으로 오라 한건 필경 긴요한 일이 있어서일텐데…
올해로 장가를 들이겠다고 하더니 색시감을 보아둔 모양이다. 어떤 처녀를 색시로 맞으라고 할가.
《얘야.》
리제마는 은근하게 자기를 부르는 아버지의 부름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내대장부라면 마땅히 제 집이 있어야 하느니라. 제 집이란 뭐겠느냐? 그건 안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사내대장부에게 있어서 안사람은 대를 이어줄 자식을 낳아 키울뿐아니라 품은 뜻을 이룰수 있게 떠밀어주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다.》
리제마는 자기의 생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것을 확인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떤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할가? …)
그러나 반오는 아들의 속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하였다.
《내가 아비로서 너를 위해 뛰여다니며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너를 받들어줄수 있는 좋은 처녀를 골라주는것이다.
난 이미 네 색시될 처녀의 집어른과 통혼을 해놓았다.》
리제마의 고개가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 이제는 마음에 있든없든 아버지가 골라주는 처녀에게 장가드는수밖에 없다.
《네 색시감으로는 10년세월을 하루같이 너의 뒤바라지를 해준 한옥이만 한 처녀가 없는줄로 안다.》
리제마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한옥이라니? 세상에, 나를 친오랍동생으로 여겨주고 돌봐주는 누이에게 장가를 들라는게 아닌가.
《아버님! 한옥누님한테는 장가들수 없는줄 아오이다.》
리반오의 얼굴이 험해졌다.
《뭣이? 그래 한옥이 무엇이 모자라서 네 색시가 될수 없다는것이냐?》
리제마는 애원하듯 말했다.
《아버님! 한옥누님은 저에게 친누이나 다름없지 않소이까?》
《허허허?》
리반오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리제마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옛날부터 부부오누이라는 말이 있느니라. 부부간은 오누이처럼 서로 닮고 자별하다는 뜻인데 한옥이 성씨는 달라도 친누이같다고 하니 그거야말로 부부연분이 아니겠느냐. 내 한옥이네 집 대답을 받아들였다.》
《예?!》
리반오는 사실 몇해전부터 은근히 아들의 배필감으로 한옥을 점찍고있었다.
한옥이 나이가 제마보다 두살우이긴 하나 둘이 서로 진속까지 다 잘 알테니 더욱 좋고 그보다는 처녀의 일솜씨가 마음에 들어 좋았다.
한옥이 여러해째 외할머니를 여의고 홀로 사는 외할아버지인 기로사를 도우려고 부모집을 떠나 여기 와 사는데 반오가 아무때 가봐도 세간붙이들이 알른거린다. 그가 지은 음식은 또 한결같이 정갈하다. 그래서 아들가진 집들에서 서로가 한옥을 탐내는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혼사말은 기실 기로사가 먼저 꺼내왔다.
그가 하는 말이 혼담은 대개 남자쪽에서 먼저 꺼내는 법이지만 다른 의향이 없다면 그 집 아들에게 한옥을 시집보내겠다는것이였다.
반오는 너무 기뻐 기로사의 손을 덥석 그러쥐고 《고맙소이다.》하고 소리쳤다.
한옥이만큼 여기저기서 중매가 많이 들어오는 처녀는 드물것이다.
그런데 한옥은 부자집 도련님이든 량반집 귀공자든 청혼해오는 족족 다 싫다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기로사조차도 외손녀가 지내 문턱을 높이는가 하여 걱정스러웠다. 세상에 열흘 가는 고운 꽃 없다고 저러다 처녀로 늙겠다고 근심도 하였다.
그렇다고 싫다는데도 억지시집은 보낼수 없고 하여 마음이 무거웠는데 하루는 한옥이 부르는 노래소리에 불쑥 깨달아지는것이 있었다.
…
양천전촌에 전갑섬이
당포김촌에 말이 났소
나는 좋소 나는 좋소
화목하고 일 잘하니 나는 좋소
닐리 닐리리 닐리리야
화목하고 일 잘하니 나는 좋소
한옥이 안방에서 리제마의 바지를 손질하며 부르는 《전갑섬의 노래》였다.
그 노래에는 양천전촌마을에 사는 전갑섬이란 처녀가 세도쓰고 욕심사나운 량반집들이나 땅많은 부자집들에서 해오는 청혼은 다 싫다 하고 화목하고 부지런한 농사군집의 아들에게 시집가겠다는 뜻이 담겨져있었다.
그때 마침 20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한옥의 어미가 딸을 찾아왔다.
기로사는 그에게 한옥의 마음을 알아보라고 했다.
어머니만큼 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고 딸은 어미한테는 숨기는것이 없다.
한옥은 제 어미에게 진속을 터놓았다.
그 마음을 전해들었을 때 기로사는 무릎을 쳤다. 과시 한옥의 눈이 바로 배겼다. 눈이 바로 배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리제마를 사내같은 사내로 보았을것인가.
기로사는 그들이 한지붕밑에서 같이 살아온 날들을 새삼스레 돌이켜보았다.
8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리제마의 인생은 한옥이와 친근하게 련결되여있었다. 참말이지 한옥은 누이와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되여 제마는 한옥에게 장가들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