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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러해가 흘러 리제마는 17살의 어엿한 젊은이가 되였다.
좀 두드러져나왔으나 시원스레 펼쳐진 넓은 이마, 그아래에 짙은 눈섭, 어글어글한 눈, 날이 선 코, 한일자로 꾹 다물린 입…
키만 좀더 컸더라면 틀림없는 미남자라고 할수 있었다.
제마는 17살이 되는 올초에 관례식(남자가 결혼할 나이에 이르면 어른이 된다 하여 갓을 쓰게 하는 례식)을 하였다.
리제마는 겉보기만 어른티가 나는것이 아니고 속도 어른이 되였다고 할수 있었다.
이미 12살전으로 유학의 4서를 떼고 이제는 5경까지 읽었을뿐아니라 기로사가 물려준 의서들을 다 읽은것이였다. 그것도 그저 읽어본데 그치지 않고 글귀들을 따져가며 무수한 반문속에 그 의미를 파고들었다.
의서들가운데서 리제마가 제일 애착을 가진 의서는 《동의보감》이였다.
세상은 이름난 의학자였던 허준(1546-1615)이 자기의 남은 생을 깡그리 초불처럼 태워 10여년동안에 완성한 《동의보감》만 바로 알아도 명의라고 일러준다.
그 말대로 하면 전 5편에 25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동의보감》을 머리에 새기였으니 리제마는 명의나 다름이 없다고 말할수 있었다.
제마는 《동의보감》의 머리글에 서술된 허준의 명구를 외우기 즐겨했다.
《우리 나라는 동방에 자리잡고있으면서 의학의 전통이 끊기지 않고 하나의 줄처럼 이어왔으니 우리 나라 의학은 동의라고 할수 있다.》
리제마는 이웃나라 사람들이 《동의보감》을 얼마나 숭상하는지 알아도 잘 안다.
의서들중에는 청나라에서 1763년에 찍은 《동의보감》도 있다.
청나라에서도 견문이 넓고 박식하기로 소문이 난 명사 릉어는 자기가 쓴 머리글에서 《책의 이름을 보감이라고 한것은 마치 해빛이 조그마한 구멍으로 스며들어오기만 하여도 오랜 어둠이 당장 가셔지고 피부의 실금까지 환히 보이는것처럼 이 책을 펴보는 사람은 거울처럼 환히 알수 있기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첫 의서가 나온 이후 지금까지 력대의 명의들이 쓴 저서가 소 한바리에 다 실을수 없고 집 한채에 채우고도 남지만 치료효과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지금까지 나온 의서들의 부족점을 보충하고 누구나 건강을 유지하게 하였으니 이 책을 많이 찍어 널리 보급하는것은 천하의 보배를 온 천하 사람과 나누어가지는것으로 된다.》고 격조높이 찬탄하였다.
리제마는 왜나라의 후지하라가 쓴 《동의보감》의 머리글도 외울수 있었다.
그는 책에서 의서는 론거가 명백하고 세밀해야 의혹이 생기지 않고 인명에 도움이 될수 있는데 조선의 《동의보감》은 현재는 물론 먼 후세에 가서도 찬양할만 하니 이 책이 나옴으로써 사람들이 더는 의술의 진보를 걱정하지 않게 되였다고 하였다.
리제마는 《향약집성방》은 물론 1477년에 나온 《의방류취》도 통달했다.
《동의보감》이 동방의술의 전반적인 성과를 집대성한 의학전서라면 《향약집성방》은 각이한 질병의 원인과 증세, 치료방법 그리고 조선에서 나는 약재와 그 제조법을 개괄한 의서이며 《의방류취》는 수많은 의학고전들을 집대성해놓음으로써 우수한 치료법과 처방, 민간료법들이 풍부히 담겨져있는 의학백과전서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하기에 사람들은 이 의서들을 가리켜 《완벽한 의술의 수록》이라면서 이 3대의서를 통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연 의술의 천재, 천하명의로 일러주어야 한다고 했다.
리제마는 선대의원들이 이룩한 의술을 밑천으로 하여 병자들을 보아주었는데 어찌나 신통하게 병을 알아맞추는지 《함흥명의》라는 호평을 받게 되였다. 그가 지어주는 약을 받아쓰고 또 그가 놓아주는 침과 뜸으로 병을 고친 사람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리제마가 오늘까지 쌓은 학식이면 얼마든지 알성급제도장원(임금이 문묘에 례하는 의식을 한 다음 직접 나와 실시하는 과거시험에서의 장원급제자)을 이룰수 있을것이다.
리제마는 그날도 굳어진 관습대로 꼭두새벽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뜨락에 서있던 기로사가 아침식사를 서둘러야겠다고 하여 리제마를 의아케 하였다.
또 급한 병자가 생겼는가부다. 어느 마을에서 병자가 생겨 급히 와달라는 청이 들어오면 매번 아침식사를 서두르라고 이르군 한 그였다.
한옥이 들여온 아침밥을 마치자 기로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나와 함께 가자구.》
리제마가 침통과 약통을 꿍지려 하자 기로사는 손을 내저었다.
《빈손으로 갑세.》
리제마는 더욱 영문을 몰라하는데 기로사가 벌써 방을 나서기에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사연인즉 간밤에 집 한채가 불탔는데 관가의 기생명부에 올라있는 반월이란 기생집이였다.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불을 껐으나 부엌곁에 붙은 나무광은 무너져내렸다. 나무광을 치웠는데 바로 거기에서 죽은 반월의 시체가 나졌다.
마을좌상은 관가에 사고신고를 내고 향교마을의 리제마에게는 시체검시를 부탁하였다.
기로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불탄 시체를 검시하는 일에 리제마를 보내고싶지 않았다. 허나 의술을 닦는데 죽은 사람도 다루어보아야 하겠기에 응한것이였다.
반룡산너머로 한 10리 되는 곳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수십호가 넘었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여 마을에 들어서니 좌상로인이 맞아주었다.
그를 따라 불맞은 집으로 가니 타서 무너진 서까래며 벽체를 치운 나무광바닥에 녀인의 시체가 있었다.
리제마는 눈을 딱 감았다. 금시 몸이 으시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림을 어찌할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라구. 의술을 하려면 산 사람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다루어야 한다네.》
기로사의 엄한 귀띔에 힘을 얻은 리제마는 큰숨을 한번 내쉬고는 눈을 똑바로 떴다. 뼈에 가죽만 남아서 산송장이라 할수 있는 병자들은 많이 보았어도 불타죽은 녀인을 보기는 처음이다.
죽은 녀인의 얼굴을 얼핏 보았는데도 살아있을적엔 퍽 고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제마는 기운을 내여 죽은 녀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불에 그슬린 머리에는 은비녀가 꽂혀있었다. 풀색저고리는 팔소매만 남았고 하늘색꼬리치마는 뭉청 타서 없어졌다. 옥색당혜(울이 깊고 코가 작은 가죽신)만은 옹글게 남아있었다. 종아리며 허벅다리, 가슴부위가 새까맣게 탄것이 끔찍스러웠다.
그런데 시체를 보면 볼수록 의심스러운 생각이 갈마들었다.
아무리 나무광에 불이 달려 급해맞았기로서니 아직은 한창이라 할수 있는 젊은 녀인이 뛰쳐나오지 못하고 맥없이 불타죽을수 있는가. 천번중의 한번은 불을 끄려 허겁지겁 덤비다가 무엇에 잘못 부딪쳐 쓰러질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다치고 나무광에 불이 당겼다는것이 이상스럽다.
아무말없이 시체를 살펴보기만 하는 리제마를 보다못해 기로사가 물었다.
《그래, 어떤가?》
리제마는 서뿔리 생각나는대로 대답하고싶지 않았다.
《선생님! 좀더 생각하게 해주소이다.》
그리고는 대담하게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시체에 손을 가져갔다. 섬찍한 감촉에 손이 떨렸다.
(이래선 안된다.)
리제마는 마음을 다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죽은 녀인의 머리카락을 세세히 헤쳐보았으나 무엇에 부딪쳐 생긴 상처같은 흔적은 찾아볼수 없었다. 목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리제마는 숨을 죽이고 죽은 녀인의 턱을 두손으로 움켜잡았다. 그 다음 힘껏 손에 힘을 주어 입을 벌리였다.
벌려진 입안을 들여다보니 금시 양치질을 한듯 깨끗하였다. 그것을 재삼 확인하였을 때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러니 녀인은 불에 타기 전에 이미 죽어있었다. 불속에서 타죽었다면 숨을 몰아쉴적에 재티나 그을음 같은것이 입안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럼 어떻게 되여 이 녀인이 죽었을가.
제마는 죽은 녀인의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들고 마을좌상에게 종이 한장을 부탁했다. 인차 그가 종이를 가져왔다.
리제마는 종이를 받아 죽은 녀인의 입을 봉한 다음 은비녀를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바른 대답을 드릴수 있소이다.》
얼마간 기다리던 제마는 녀인의 입에서 은비녀를 뽑아들었다. 은비녀는 검푸르게 색이 변해있었다.
그것을 본 제마의 얼굴은 분노로 이그러졌다.
《선생님! 이 녀인은 불타죽은것이 아니고 나쁜 놈의 작간에 죽었소이다.》
마을좌상로인은 소스라치게 놀라워했다.
《그건 무슨 소린가?》
《범인은 녀인에게 독약을 먹여 죽인 다음 나무광에 끌어다놓고 제놈의 범행을 가리우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소이다.》
마을좌상은 얼굴이 질려서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리제마는 두손을 모아잡으며 나직이 대꾸하였다.
《좌상님, 이건 소인이 밝혀낸것이 아니라 법의서에서 밝혀준것이오이다.》
《법의서에서?》
《예.》
1744년에 구택규라는 의원이 쓴 《증수무원록》의 중독에 관한 대목에는 독을 먹고 죽은것으로 의심되는 시체에 대한 독물검사방법이 구체적으로 씌여있다.
시체검사법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은차법》(은비녀를 리용하는 방법)과 《반계법》(닭에게 먹이는 방법)이다.
《은차법》은 시체의 입안에 은비녀를 한동안 넣었다가 꺼냈을 때 그 색이 검푸른색으로 변하면 중독임을 확인한다.
《반계법》은 밥덩이를 시체의 입안에 깊이 넣고 종이로 봉한 다음 반나절가량 지나서 그것을 꺼내 닭에게 먹이는데 이때 닭이 죽으면 중독으로 인정한다.
《그럼 어느 망나니가 이 녀인을 죽였겠나?》
리제마는 마을좌상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죽은 기생과 잘 아는자일겁니다. 그리고 기생을 죽인 독약은 값이 매우 비싸고 흔히 구할수 없는것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돈냥도 있고 권세도 있는 아전패들 아니면 부자집 망나니들속에 있을것이옵니다.》
후에 판명된데 의하면 기생을 독살한 범인은 함흥감영에서 호방비장을 해먹던 아전놈이였다.
그놈은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을 뭉청뭉청 떼여먹은 자기의 죄행을 잘 알고있는 반월을 꺼려 그런 악행을 저지른것이였다.
이 일로 하여 리제마의 이름은 함흥일대에 더 자자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