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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는 터벅터벅 경복궁을 나섰다.
어쩌면 나라에 큰 도움을 줄지 모르겠다는 한가닥 기대와 소망을 안고 왔다가 실망과 환멸에 휩싸여 황필수의 집을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인듯 무겁기만 하였다.
어의를 통해서 대궐소식을 알고있다면서 황필수와 민성이 그리고 제자들이 반겨맞았다.
리제마의 마음을 다소나마 기쁘게 한것은 제자들이 번화한 한성구경도 하고 한성의원들과도 만나 안면을 익혔다는 그것이였다.
황필수가 마음먹고 차려낸 음식상에 둘러앉아 제자들과 점심을 먹고났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민성이 뛰쳐나가 대문을 여니 지석영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서는것이였다.
리제마는 무등 기분이 떠서 뜨락으로 내려가 지석영의 손을 잡았다.
《송촌!》
《무평선생님! 무평선생이 임금의 병을 고치였다고 온 조정이 들썩하오이다.》
리제마는 지석영의 그 칭찬소리에 얼굴을 흐리였다.
임금의 병을 고쳐준건 사실이다. 허나 그게 무슨 큰 경사라고 다들 기뻐하는거냐. 명의라면 사람의 몸에 든 병뿐아니라 정신에 든 병도 고칠줄 알아야 한다.
지석영이 쓸쓸해있는 리제마를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그날 저녁 황필수의 집 사랑방에는 세사람이 둘러앉았다. 리제마와 황필수, 지석영이였다.
황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리형! 제 송촌하고 의논이 있었는데… 이제는 4상의학을 거의다 밝혀냈다고 하니 한성에 올라왔던김에 그걸 책으로 썼으면 하오.》
지석영이 맞장구를 쳤다.
《더는 미룰수 없소이다.》
지석영이 리제마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
《무평선생! 제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시국형편이 날로 나빠지고있으니 시일을 끌면서 책쓰기를 늦잡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기에… 더는 미루면 안되오이다.
그래서 제 황형과 의논해서 남산에다 집을 한채 마련해놓았으니 거기로 옮겨가셔야 하겠소이다.》
리제마는 그들의 마음에 감동되여 눈을 슴벅였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껏 밝혀낸 4상의학을 의서로 남길 생각으로 틈틈이 적어넣은 자료들과 처방들을 가지고 왔고 또 제자들도 데리고 온것이였다.
이제 더는 4상의학의 집필을 미룰수 없다. 시급히 의서를 써내여 아들 민성이만이 아닌 후세들에게 물려줌이 선배로서의 할바가 아니겠는가.
리제마는 지석영의 손을 뜨겁게 마주잡았다.
《고맙소. 그대들의 마음을 따르겠소.》
황필수가 기분이 떠서 밖에 대고 소리쳤다.
《술상을 들여오게!》
마루에 앉아 사랑방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제자들이 와? 환성을 올렸다.
※ ※
1893년(고종 30년) 7월의 더위는 여느해보다 더 물쿠는것 같았다. 황소뿔마저 지글지글 녹아 꼬부라들것 같은 무더위였다.
리제마는 황필수와 지석영이 마련해준 남산기슭의 조용한 집에 들어 책상에 마주앉아있었다.
낮에 이어 밤은 깊어가건만 그의 손에 쥔 붓은 멎을줄 몰랐다.
대황초 불빛아래 56살의 리제마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였다.
좀 두드러진 넓은 이마의 굵은 주름살들에는 간고한 인생의 자취가 력력히 배여있는듯 하였고 숱진 눈섭아래의 어글어글한 두눈과 꾹 다문 입에는 모진 풍파를 뚫고헤쳐온 자욱이 어려있었다.
손에 틀어쥔 붓이 자나깨나 《광제창생》의 한뜻을 품고 파란곡절속에 터득해낸 4상의학을 종이우에 새겨나갔다.
리제마는 4상의학을 자자구구 천연바위에 쪼아새기는 심정이였다.
《제1권…》
리제마는 1권에서 사람과 인간세상 그리고 세상만물과의 관계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준 《성명론》에 이어 심(심장)을 제외한 페(페장), 비(비장), 간(간장), 신(신장)의 크고작은 모양에 따라 4상인을 구별하는 《4단론》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불합리한 조화가 인체에 영향을 주어 질병을 생기게 하는데서도 4상인에 따라 다르므로 그를 알고 늘 주의해야 함을 밝히였다.
4상인에 따르는 성격과 그 우단점을 지적하고 단점을 극복할데 대한 《확충론》에 이어 4장, 4부, 4초, 4해의 리론을 밝힌 《장부론》에서는 두뇌는 정신이 들어있는 집이고 심은 한몸의 주재가 되여 인체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는것을 밝히였다.
《제2권…》
리제마는 2권에서 먼저 의술의 력사와 함께 선행자들의 저술을 연구하여 4상의학을 창시했음을 서술하였다.
그 다음 《소음인신수열표열병론》과 《소음인위수한리한병론》에서는 선대의원들의 처방의 부족점을 지적하면서 4상론에 의거한 치료법과 새 처방들을 내놓았다.
《범론》에서는 병자는 응당 약을 써야지만 병없는 사람이 약먹기를 좋아하면 장기의 기능이 약해져서 질병에 더 잘 걸린다는것과 세상에 인삼, 록용을 자주 먹는 사람이 일찍 죽지 않는자가 없다는것을 깊이 경계하라고 밝히였다. 마감으로 경험방 23개, 새 처방 24개를 주었다.
《제3권…》
3권에서는 소양인의 병증과 치료법, 처방을 준 《소양인표한병론》과 《소양인리열병론》, 소양인이 약을 쓰는데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서술한 《범론》에 이어 경험방 10개, 새 처방 17개를 주었다.
《제4권…》
리제마는 4권에서 태음인과 태양인의 병증, 치료법, 처방을 《태음인위완수한표한병론》과 《태음인간수열리열병론》, 《태양인외감요척병론》, 《태양인내촉소장병론》에 서술해주고 사람들을 나이에 따라 유년, 소년, 장년, 로년의 4기로 구분한 다음 그들의 심리에 맞게 정신수양을 하면 장수할수 있다는 《광제설》, 4상인의 감별원칙과 체형기상, 성격, 생리적특성, 병증에 의한 감별법을 주는 《4상인변증론》을 밝히였다.
여기에 모두 67개의 처방이 서술되였는데 태음인처방과 소음인처방이 각각 24개, 소양인처방이 17개, 태양인처방이 2개였다.
또한 태양인에게 쓰이는 약재 10여종, 태음인에게 쓰이는 약재 120여종, 소양인에게 맞는 약재 80여종, 소음인에게 맞는 약재 100여종, 모두 합쳐 삼백수십여종의 약재들을 서술함으로써 조선에서 나는 약재 거의 전부를 4상인에 따라서 구별해놓았다.
1893년 7월 13일에 시작하여 불철주야로 달리던 리제마의 붓이 1894년 4월 13일에 그 종지부를 찍었다.
리제마는 꼭 8달에 걸쳐 집필한 의서의 표제를 사람들을 무병장수할수 있게 해주기 바란다는 뜻에서 《동의수세보원》이라고 하였다.
의서의 표제까지 써넣은 4월 13일 밤부터 리제마는 한생에서 두번다시 없은 가장 길고 달콤한 굳잠에 들었다. 무려 사흘밤 삼일낮에 걸친 단잠이였다.
며칠후 리제마는 고향을 향해 한성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