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리제마가 대궐에 머무르고있는지도 스무날이 썩 넘었다.

오늘도 리제마는 강녕전에서 임금에게 탕약을 마시게 하고 그의 등에 부항을 붙이였다.

《리공! 오늘은 력사이야길 들려주지 않겠소?》 하고 허두를 뗀 임금은 미소를 지었다.

《공은 전조(전대의 왕조)의 명군(이름난 임금)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고려 태조대왕은 내놓고 세명만 꼽아보오.》

리제마는 임금이 정직한 신하들을 측근에 두고싶어할 때면 이런 질문을 한다는것을 알수 없었다. 만일 그 신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각을 달리한 임금이였다.

《상감마마! 굳이 고려의 명군들을 꼽는다면… 신의 생각엔 고려 4대임금 광종대왕(재위기간 950-975)을 먼저 꼽고싶소이다. 개경을 황제의 도읍이라는 뜻에서 황도라 일컫고 고구려를 이은 나라답게 년호까지 제정해썼으니 천하에 고려의 위엄을 떨친것이 아니겠소이까. 담대무쌍한 명군이 아니고서는 그런 용단을 내릴수 없소이다.

다음은 8대임금 현종대왕(재위기간 1010-1031)을 들수 있소이다. 강감찬장군, 강민첨장군과 같이 뛰여난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여 두번씩이나 쳐들어온 거란오랑캐무리를 통쾌하게 쳐부시여 천하가 고려를 공경하도록 하였소이다. 현명한 명군이 아니고서는 뛰여난 인재를 가려볼수 없소이다.》

임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리제마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나서 다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은 31대 공민왕(1352-1374)을 꼽을수 있소이다. 공민왕이 등극하였을 때 고려의 형편은 몹시 나빴소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후세들은 어려운 때 나라를 맡아 겨레를 보존시킨 명인들의 공적을 언제나 잊지 않을것입니다.》

《어쩜 공의 대답은 김옥균과 같소? 김옥균도 군력을 길러 외적을 물리친 임금을 명군이라 하였소.》

리제마는 임금에게서 김옥균의 이름을 들을줄 몰랐다.

민비일파가 죽이지 못해 몸살을 앓는 김옥균이 왜나라에서 이리저리 숨어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있다니 얼마나 통분한 일인가.

리제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임금의 잔등에서 부항을 떼여냈다.

부항을 떼낸 리제마는 임금앞에 꿇어엎드렸다.

《전하! 신은 래일 귀향할가 하오이다.》

임금이 놀라 벌떡 일어나앉았다.

《귀향이라니?》

《전하! 전하의 룡체에 든 병은 다 나았소이다. 앞으로 병이 도질것 같으면 이번 처방대로 약을 쓰시면 되겠소이다.》

《가만! 과인은 그대를 어의로 두도록 하겠소.》

리제마는 입궐하면서 임금의 눈에 들게 되면 어의자리를 하사받게 되리라는 생각을 못해본건 아니였다.

《황송하오이다. 하오나…》

리제마는 한동안 말을 갑잘랐다.

《상감마마!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널리 헤아려주사이다. 일찌기 양평군 구암선생(허준)이 정배를 가지 않았더라면 천하가 보배라 일컫는 <동의보감>이 못 나왔을런지도 모르오이다.》

임금은 한동안 아쉬움을 금치 못해하더니 이윽하여 고개를 끄덕이였다.

《알만 하오.》

임금은 한숨을 내쉬였다.

리제마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이 무엄하게도 한말씀 올려도 되겠소이까?》

《말하오.》

《성현들이 이르기를 명군은 잘못함을 듣기에 힘쓰고 좋은 말 듣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은 고려 공민왕때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오이다.

이러한 때 전하께옵선 룡체의 보존에 주의를 각별히 돌려주시고… 또한 고구려의 후계국으로서 고려 광종대왕이 한것처럼 떳떳하게 황제국이라 일컬어야 할줄 아옵니다.

상감께옵선 <과인>이 아니라 황제로서 <짐>이라 칭해야 하옵고 <페하>라 불리워야 하오며 년호도 제정해쓰고 신하들에게 공, 후, 백, 자, 남의 작위를 봉해야 하리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리고 나라를 하루빨리 문명케 하기 위하여 전국도처에 정사와 군사, 농업과 공업, 상업과 의술 등의 인재들을 키워내는 학당을 내와야 할것이옵니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로 말이 흘러나왔다.

리제마는 침을 모아삼키고 배에 힘을 주었다.

《일찌기 10만양병을 주장한 률곡선생의 지론을 받아들여 신식병기를 갖춘 10만의 정예군사를 길러내옵소서. 상감께옵선 …》

리제마의 온몸은 땀으로 화락하게 젖어들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칼날우에 선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자칫하다가는 어느 순간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허나 이 한순간에 백성들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목숨을 내대고서라도 할 말을 서슴없이 해야 한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리제마는 얼굴을 질벅하게 적신 땀을 팔소매로 훔쳐내고는 정중한 어조로 절절하게 말하였다.

《상감마마! 자고로 고운 언사는 꽃이고 지극한 말은 열매이며 쓴말은 약이고 단말은 병이라 하였소이다.

지금처럼 간신들이 득세하여서는 나라가 언제 가도 동패서상(이르는 곳마다에서 실패한다는 뜻)을 면할수 없소이다.

전하께옵선 결단코 왜놈들과 화친하려는자들을 몰아내고 자수자강하여 나라의 부국강병과 만대왕업을 위하고저 몸을 돌보지 않는 충의지신들로 조정을 쇄신하여 종묘사직(왕실과 나라)을 지켜내야 할줄로 아옵니다.》

임금은 침상을 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무겁게 궁실안을 거닐었다.

이제 어떤 어명이 떨어질는지…

쿵! ?

임금이 뚝 멎어섰다. 리제마의 머리맡에서 멎어선것이였다.

《그런 말은 싫증나게 들었다. 이전에 박규수도 김옥균이도 다 그렇게 말했다. 됐다. 이젠 어데 가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그러다 목숨을 잃을수 있다.》

리제마는 너무도 생각밖이여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임금의 안색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하였다.

리제마가 더 생각할 사이없이 임금의 다음말이 떨어졌다.

《과인은 피곤하오.》

리제마는 쫓기듯 궁실을 나섰다.

밖에 나오니 땀에 젖은 몸에 실망과 고독감이 휩싸였다.

리제마의 귀전에는 박규수도 김옥균이도 그런 말을 했다는 임금의 짜증어린 목소리가 쟁쟁하였다.

아, 이젠 알겠다. 애국충정으로 살자 했던 박규수대감이 뜻을 이루지 못한것도, 김옥균이네들의 갑신정변이 비참하게 실패한것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머리에 골병이 들어가니 나라도 조정도 골병이 들어 망해가고있는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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