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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거침없이 흘렀다. 리제마가 을순이와 교배잔을 나눈지도 어언 여러해가 지났다.
학당은 없어졌지만 리제마는 여전히 병치료도 하고 북관땅의 각지에 흩어져가있는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4상의학을 파고들었다.
오늘도 리제마는 봄씨붙임으로 바쁜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고 학당골로 들어섰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있었다.
《인제 오시나이까?》
을순이 집앞에서 반겨맞으며 관가에서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관가에서?》
《한성에서 온 사람인데 꼭 선생님을 뵙겠다 하오이다.》
리제마는 한집안사람이 된 오늘도 여전히 《선생님》이라 깍듯이 공대하는 을순이 밉지 않아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오던 길을 되돌아내렸다.
관가에 들어서니 새로 부임되여온 홍원현감이 반색하며 동헌으로 이끌었다.
《리공에게 운이 텄소.》
몇번 대면하여 안면을 익힌 현감은 다사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리공의 의술이야 온 8도강산이 다 공경하는터이니 어찌 구중궁궐에 계시는 임금님께서 몰라보겠소. 리공을 입궐시키라는 교지를 가지고 내의원에서 당상관 어의가 사령들을 거느리고 내려왔단말이요. 이런 경사가 어데 있소?》
현감에게 안내되여 동헌에 드니 어의라는 젊은 사람이 먼저 절을 하며 자기소개를 하는것이였다.
《전 혜암선생의 문하에서 의술을 배웠소이다. 혜암선생님의 자제분에게서 무평선생에 대한 얘길 들었소이다.》
리제마는 구면친구를 만난 심정이였다.
어의는 자리에 앉자 인차 사연을 털어놓았다.
《지금 상감마마의 병이 심상치 않소이다. 우리 내의원에서 할수 있는껏 손을 쓰긴 했는데… 상감마마께서 웬간한 약은 바라보시지도 않으니 병이 차도가 나겠소이까. 게다가 상감께서 서양의원에게 혹해있으니 참 안타깝소이다.》
《서양의원에게 혹해있다니?》
《예, 몇해전 미국공사관의 알렌이란 의원이 재동에 <광혜원>(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차려놓았소이다. 알렌은 갑신정변때 개화파들에게 얻어맞아 다친 민씨네를 치료해준것으로 하여 그네들의 총애를 받게 된 까닭에 대궐에 드나들며 상감마마의 병을 보아주게 되였소이다.
헌데 알렌 그놈이 우리 조선의술을 깔보기를 동방의술은 뭐 의술이 아니라나요. 그러면서 서양의술을 똑 제일이라며 호르톤이란 의녀까지 중전마마곁에 붙여놓고 하는짓이란 미국을 숭배하게 하는짓뿐이지요. 그러니 상감의 병이 나을게 뭐겠소이까?》
리제마는 분개하여 이를 갈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형(황필수)도, 송촌도 그렇고 빨리 무평선생을 청해오라는것이였소이다. 그래서 상감께 여쭈었더니 제꺽 상경시키게 하라는 하교가 떨어졌소이다.》
무심히 어의의 말을 듣던 리제마는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것이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가. 이 기회에 임금님께 의학당을 내오도록 해주십사 청도 드리고 아울러 조정의 쇄신과 10만양병의 지론을 절절히 아뢰인다면 어떨가.
그렇다. 때는 이때로다. 이 기회에 임금님의 마음만 움직인다면 의술의 후진을 키우는 일도 그렇고 생각밖에 큰것을 이룰수도 있을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윽고 리제마는 한성에 있는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물었다.
《송촌(지석영)은 잘 있소?》
《예, 잘 있소이다. 잠시도 손에서 의술을 놓지 않소이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어 고맙소. 그런데 언제 떠나야 하오?》
《빠를수록 좋소이다.》
리제마는 즉시 결심을 내리였다.
《그럼 래일모레 떠나도록 합시다. 제자 몇을 데려가도 일없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리제마는 급히 관가를 나섰다.
학당골에 들어선 그는 의봉을 불러 가까운 고을들에 나가있는 제자들을 래일 저녁까지 불러오라는 분부를 내리였다.
스승이 부른다는 기별을 받은 제자들은 지체없이 학당골로 달려왔다.
리제마는 한성길에 함흥에 들려 아들 민성이도 데리고 갔다.
일행은 한성에 입성하였다.
제마는 제자들을 황필수의 집으로 데려갔다. 황필수는 한성구경도 시켜주고 시국형편도 알려주고 한성의원들과도 낯을 익히도록 제자들을 맡아달라는 그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다.
제자들을 황필수에게 맡긴 리제마는 어의의 안내를 받아 내의원으로 향하였다.
내의원에 자리를 잡은 다음날 그는 을순이 새로 지어준 중치막(벼슬하지 않는 선비나 량반들이 흔히 입는 겉옷)을 차려입고 경복궁에 입궐하였다.
임금은 강녕전이란 침전에 있었다.
리제마가 어의와 함께 강녕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평상에 앉아있었다.
리제마는 정중히 꿇어엎드려 문안인사를 하였다.
《상감마마, 신 리제마 상감마마의 어명을 받고 입궁하였나이다.》
임금은 쓸쓸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대를 처음 만난 때가 20년전이였지.》
임금은 리제마가 진해현감의 벼슬을 받던 때를 기억하고 한마디 한것이였다.
리제마는 임금이 구태여 진해와 고원사또때의 일을 상기시키지 않는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사실 고원군수에서 파직된것은 분노한 군사들에게 죽음을 당한 민겸호 그놈의 작간때문이지 임금의탓이 아니지 않은가.
《이리로 와서 과인의 병을 보라.》
리제마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임금의 얼굴을 살피였다.
이마에 주름들이 깊이 패인것을 보니 10여년전의 젊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맥도 짚어보고 숨소리도 들어보니 어의한테 말을 듣고 생각했던것보다 임금의 병은 그리 깊지 않았다.
간기울결증(간기가 몰려 량옆구리가 뻐근하고 아픈것)으로 인한 우울증에다 몇가지 잡병이 겹쳐있었다.
잡병들중에서 좀 과한 병은 결대맥(부정맥)인데 그로 하여 임금은 가끔 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것이였다.
나이 서른댓이면 아직 한창나이라 할수 있건만 임금은 이런 잡병때문에 맥을 추지 못하였다.
리제마는 곧 임금의 병을 고칠수 있는 처방을 내리였다.
약으로만도 자신이 있었다.
임금은 소음인에 속한다. 그러니 보중익기탕을 쓰면 우울증과 복통따위를 단번에 다스릴수 있고 결대맥에는 적백하오관중탕이 제격이다. 내의원의 의원들이 얼마든지 고칠수 있는 임금의 병을 두고 근심하는것은 그들이 여러가지 잡병을 한번에 고치는 명처방을 찾지 못하고 이약저약을 쓰다보니 임금의 실망을 샀기때문일것이다.
병자의 실망을 일단 사면 그때는 어떤 명의일지라도 용빼는 재주가 없다.
리제마는 임금의 심금까지도 울릴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자 신심에 넘쳐 입을 열었다.
《전하! 래일부터 손을 써도 일없겠사옵니까?》
임금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강녕전을 나서는 리제마는 벌써 병을 털고일어난 임금의 혈기어린 모습을 그려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