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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도 어린 제마는 겨릅등에 불을 켜놓고 의서를 보군 하였다.
껍질을 벗긴 삼대에 뜨물로 버무린 좁쌀겨를 입힌 겨릅등은 기로사가 손수 만들어준것이다.
겨릅등은 광솔불보다 그을음이 적게 나고 밝아서 책을 보기에 좋았다.
기로사는 책장안의 의서들을 마음대로 보라고 하였다.
책장속에는 고금의 의서들이 다 있는것 같았다. 《향약집성방》, 《의방류취》, 《동의보감》과 같은 큰 형식의 의서들은 말할것도 없고 《침구경험방》, 《치종비방》, 《검시장식》과 같은 크지 않은 의서들까지 비좁게 꽂혀있었다.
이 의서들은 기씨집의 제일 큰 재산이자 가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런 보물을 통채로 물려받았으니 어찌 제마가 성수가 나지 않으랴.
기로사는 제마에게 의서만 읽게 한것이 아니라 병자를 치료할적이면 곁에 앉히고 맥이며 얼굴색, 숨소리며 목소리, 냄새 같은것을 보고 병을 알아내고 그에 따라 침은 어떻게 놓으며 뜸은 또 어떻게 뜨는가, 그리고 약처방을 짓는 비결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서당개 3년에 풍월을 한다는데 이를 사려물고 접어드니 하루가 다르게 의술이 늘었다. 이제는 웬간한 병쯤은 혼자서도 알아맞추고 고칠수 있었다.
제마가 이밤 펼쳐놓은 의서는 리경화란 의원이 쓴 《광제비급》이였다.
기로사는 책장안에 가득한 수많은 의서들중에서 《광제비급》을 선참 꺼내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조정은 우리 북관사람들을 차별하다못해 병을 치료하는데서까지 차별하고있다. 다른 도들에서는 거의 모든 향교들에서 의술을 배워주게 하고있지만 우리 함경도에서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있다.
그러다보니 오늘 함경도에는 의원이 매우 적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병이 나도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죽는수밖에 없구나. 이를 가슴아프게 여긴 의원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이 책을 쓰신 의원이란다.
그분은 다른 의원들과 달리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의방류취>를 비롯한 수십권의 의서들에 담겨져있는 구급치료처방들과 민간료법들을 추려서 간단명료하게 썼을뿐아니라 함경도에서 흔히 쓰는 속방들까지 적어넣어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병을 고칠수 있게 하였단다. 훌륭한 의원이 되려면 이런분을 따라배워야 하느니라!》
이제는 중독, 외상, 종처, 부인병, 소아병으로 나누어쓴 《광제비급》을 뜬금으로 외울수 있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고난 제마는 《례기》를 읽고있었다.
이때 사립문밖에서 《선생님, 계시오이까?》 하는 다급한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제마는 그 목소리에서 어떤 병자집에서 스승을 모셔가려고 찾아왔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스승은 어제 오후 딸네 집에 나들이를 가고 없었다.
그닥 급한 병이 아니여야겠는데 하고 생각하며 제마는 방문을 열고 토방에 나섰다. 한옥이 달려나가 열어놓은 사립문으로 이웃집에 사는 농군이 급히 들어서고있었다.
《이보라구 신동, 선생님이 나들이를 가구 안 계시는걸 알면서도 찾아왔네. 글쎄 안사람이 갑자기 배를 그러안고 죽는다고 소리치는데 이거 정말 야단났네.》
농군도 그렇고 한옥이도 어서 손을 써주었으면 하는 눈길로 제마를 쳐다보고있었다.
배가 갑자기 아파하는 병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주로는 위완통(위경련)일것이다.
더우기 요새는 봄철이라지만 아직은 날이 찬데 하루종일 밭에 나가 씨붙임을 하느라 지친 농사군들이니 속탈이 있는 사람들은 위완통에 걸리기 쉽다.
제마는 배아픔에 쓸수 있는 약들을 찾아들고 밖을 나섰다.
농군의 집에 들어서니 정말 방안에서 녀인이 모로 누운채로 앓음소리를 내고있었다.
제마는 그의 거동을 눈여겨 살폈다.
녀인은 두손으로 웃배를 싸쥐고 어떤 때는 더 크게 신음소리를 냈다. 틀림없이 고된 일로 지친데다 몸을 차게 하였으니 비위가 허해져 생긴 위완통이다.
제마는 가지고온 약재들로 약을 지어 절반을 녀인에게 먹인 다음 농군에게 당부하였다.
《주인님, 이 나머지 약은 점심때 마저 잡숫도록 하소이다. 병자는 좀 있으면 배아픔이 없어질것이오이다. 그렇다고 마음놓지 말고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않게 하고 또 몸을 차게 하지 않도록 잘 돌봐주면 별일이 없을것이오이다.》
제마가 방문을 열고 나올 때에는 벌써 배아픔이 좀 나았다면서 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차리는것이였다.
아, 이런 멋에 의술을 닦는것이 아니겠는가. 내 더욱 깊은 의술을 닦아 고향사람들을 위해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