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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는 날이 밝자마자 깨여났다.

밖에 나와보니 온통 세상천지가 두터운 백설을 떠이고있었다. 볼수록 장관이였다.

학도들이 몽땅 떨쳐나와 눈을 치느라 분주히 돌아갔다.

행길로 통하는 길까지 치고나니 한낮이 되였다. 리제마가 점심을 먹고 학당주위를 돌아보고있는데 의봉이 사색이 되여 나타났다.

《선생님!》

리제마는 의봉의 심각해진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을 짐작하였다.

《선생님! 방에 들어가셔야겠소이다.》

리제마는 불길한 예감에 의봉이를 뒤에 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변이 났소이다.》

《이 사람! 천천히 말하게나.》

리제마는 의봉이를 뜨뜻한 구들에 눌러앉히였다. 소금을 구해오겠다며 홍원현감을 만나러 간다더니 무슨 봉변을 당한것이 분명하다.

《선생님! 방금 현감나리가 작의를 입은 포졸들에게 잡혀갔소이다.》

《뭐라구? 홍원현감이?》

이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작의를 걸친 포졸들에게 붙잡혀갔다는건 의금부에로 묶여갔다는건데 그럴수가 있나. 사람됨이 착하고 대바른 홍원현감이 역모를 할리는 없다.

《형방이 하는 말이 현감나리가 김옥균과 가깝다는것이였소이다.》

《김옥균과 가까운것이 어째서?》

리제마는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었다.

얼마전에 김옥균이네 개화세력이 갑신정변을 일으켜서 조정을 차지했다는 통쾌한 소식이 날아들었는데 그와 가까운 사람을 잡아가다니 될말인가.

의봉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개화파가 패하고 민가네들이 다시 조정을 쥐락펴락하게 되였다고 하오이다.》

《무엇이?》

리제마는 눈앞이 아찔하였다. 그렇다면 김옥균이네들이 끝장났단 말인가. 아, 이런 변이라구야.

《선생님! 형방이 귀띔하기를 당분간은 관가를 찾아오지 않는것이 좋다고 하였소이다. 함흥감영에서 <고석배기>가 내려왔는데 그놈이 글쎄 김옥균의 친구인 현감나리와 가까운 사람들도 다 역적이라 했다나 보오이다.》

《<고석배기> 그놈이? 원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선생님! 그놈이 현감나리가 마련해준 학당까지 다 없애버리라고 호통쳤다고 하오이다.》

리제마는 기가 막혀 눈을 내리감았다.

세상에 형세가 불과 며칠사이에 손바닥을 뒤집듯 이렇게 뒤바꿔질수도 있는가.

홍원현감이 잡혀갔다니 장차 앞일이 어찌될는지…

홍원현감이 아니였다면 오늘의 학당이 없었을것이고 마음놓고 수십명의 의원들을 길러내지 못했을것이다.

또 그가 아니였다면 시국형편도 제때에 알수 없었을것이다. 홍원현감이 그시그시 알려주었기에 돌아가는 시국형편에 깜깜하지 않은 리제마였다.

몇해어간에 통쾌한 사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민가일당의 두목노릇을 하던 민겸호가 임오군인폭동(1882년)이 일어나 황천길로 간것이였다.

아쉽게도 폭동이 썩어빠진 조정을 거꾸러뜨리지 못하고 진압당하긴 했지만 하여튼 백성들의 원한풀이는 다소나마 해준셈이다.

보다 기쁜 일은 올해 갑신년(1884년) 10월 17일(양력으로 12월 4일)에 일어난 정변이였다.

오래동안 주도세밀하게 정변을 꾸며오던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교네들이 마침내 민비일파를 쳐부시고 조정을 차지했다는 희소식이 홍원고을에도 날아들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도 못 가서 개화파가 망했다니 이런 분통한 일이 어데 있는가.

리제마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얼마전 김옥균이네들의 거사가 뜻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망국으로 내달리던 민비일파의 썩어빠진 조정을 들어냈으니 이제 곧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격동적인 조치들이 연방 시달되여 렬강국가들을 따라잡게 되리라 믿어마지 않았던 리제마였다.

그때 한편으로는 김옥균이를 섭섭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지난날 박규수로부터 《조정쇄신은 부국강병의 초석》이라는 뜻을 새긴 그가 개화를 선도하고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몇번 만나본적이 있는 김옥균이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힘을 합치자고는 안하였다.

만일 김옥균이 충의계에도 들고 민비일파를 뒤엎는 일에 뜻을 같이하자고 청했더라면 리제마는 서슴없이 한성으로 올라갔을것이다.

그런데 김옥균이 랑패를 당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리제마는 자기를 다잡고 물었다.

《이 사람! 현감네 식솔들도 잡혀갔나?》

《아직 그런것 같진 않소이다.》

《음…》

대역부도죄인의 집안은 련좌죄에 걸려 남정네들은 보통 죽음을 당하고 녀인들은 관비로 박히는것이 나라법이다.

《이 사람! 사람은 도리가 있어야 하네. 오늘밤중으로 그 집 식솔들을 <고석배기> 그놈이 모르게 빼돌려야겠네.》

《알겠소이다. 팔봉골쪽으로 빼돌리겠소이다.》

팔봉골이라면 읍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고을에서 제일 깊은 산골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자네가 학당일을 주관해야겠네.》

의봉은 비장한 기색인 리제마를 놀라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건?…》

《아직은 묻지 말게. 그리고 날 좀 혼자있게 해주게나.》

의봉은 조용히 물러갔다.

리제마는 홀로 남자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 홍원현감이 김옥균과 가까운 사이였을가. 나라의 진보를 갈망하던 현감이 잡혀간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럴만도 하다. 그렇다면 홍원현감과 절친한 황도연도 김옥균과 가깝다는것이 아닌가. 아, 이걸 왜 진작 알려 하지 않았을가. 이제는 김옥균이네까지 망했으니 그 누가 기울어지는 조정을 쇄신할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의 남아로 태여나서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걸 보면서도 그냥 강건너 불보듯 해야 옳단 말인가.

지금이야말로 남아된자들이 한몸을 내던져 나라를 구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어떻게?

역신들의 죄행을 고소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대궐앞에 거적깔고 엎드려서 임금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석고대명으로는 안된다. 이태전 유생 백락관(1846-1883)이 한것처럼 한성의 남산에 올라가 봉화를 일으키고 역신들의 죄를 고발하는 방법으로도 뜻을 이룰수는 없다.

백성들이 붐비는 한성의 시전에 나가 나라에 무겁게 드리운 망국의 비운을 만천하에 큰소리로 알리고 역신들을 몰아내라면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사르는 분신을 하든가 높은데에 올라가 몸을 던지는 투신을 하든가 하는것이 어떨가. 때가 오면 주저없이 손에 칼을 틀어잡고 조정을 쇄신하는 일에도, 나라를 지켜내는 일에도 한몸을 내대리라 마음다졌던 내가 아닌가. 과연 지금 이 리제마가 설자리는 어데인가.

리제마는 마침내 한성에 올라가 결단을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다음날 리제마는 을순이를 불러들였다. 정작 을순이를 마주하니 하고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리제마는 침묵속에 을순이를 바라보았다.

을순이의 얼굴에 퍼그나 늘어난 주름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얼마 있으면 설날인데 그러면 을순이는 서른살이 될것이다.

지난날 을순이를 좀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보라구, 난 한성에 올라가기로 하였네.》

그 말에 을순이는 긴장해서 리제마의 두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리제마의 두눈에 어려있는 비장한 기운을 띠여보았을 때 을순이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꿈자리가 사납다 했더니 그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서 갑자기 한성으로 가려는것일가. 필경 무슨 곡절이 있다. 그 곡절이란 상서롭지 않은 일 지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는 일일수 있다.

《을순이! 내 없는 동안 여기 일을 의봉이와 함께 잘 봐주게. <고석배기> 그놈이 학당까지 없애라고 했다는데… 하여간 고을사람들과 의논해서 학도들에게 의술을 마저 가르쳐주게.》

《선생님!》

《지금까지 4상의학이 도달한 높이를 보면… 백리를 가야 한다고 할 때 칠팔십리는 걸어갔다고 할수 있네.》

리제마는 불쑥 을순이의 팔을 당겨 손을 잡았다.

《부탁하네. 뒤일을…》

을순이는 더 다른 말을 할수 없었다. 생각대로라면 가지 말라고 말하고싶었지만 사내대장부 이미 세운 결심이라니 어찌 막으랴.

《선생님! 먼길에 제발이지 몸을 돌보소이다.》

을순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외로 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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