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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몇해가 흘러 리제마의 나이 12살이 된 가을날이였다.

여전히 향교마을의 기로사네 집에서는 제마의 글읽는 소리가 울리고있었다.

기로사는 기분이 좋아졌다.

제마가 벌써 4서를 거의다 외웠고 이제 몇해만 더 3경까지 따라외우면 얼마든지 초시(지방에서 치는 문과예비시험)에 나가 급제할수 있을것이다.

제마의 할머니 김씨는 숨을 거두기에 앞서 기로사에게 장손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그 부탁이란 리진사의 뜻대로 제마를 문과에 내보내여 급제시켜달라는것이였다.

그것이 곧 기로사의 뜻이기도 하니 어떻게 하나 성사시키리라.

제마가 리진사집가문의 장손으로 호적에 올라있고 또 본인의 학식이 깊다고 온 고을에 알려지면 감영에서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할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흡족해진 기로사는 황철나무가 키돋움하며 자라는 마당을 거닐고있었다.

제마가 처음 오던 날 심었던 손가락같던 나무가 이제는 그애의 다리통보다 더 굵어졌다. 세월이란 참으로 빨랐다.

이때 다급한 발걸음소리와 함께 《선생님!》 하는 부름소리에 기로사는 자기 생각에서 깨여났다.

한마을에 사는 김첨지와 어떤 사람을 업은 그의 아들이 사색이 되여 서있었다.

즉시 그들이 급한 병자를 업고 왔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일은 매일같이 빈번한것이여서 그닥 놀랍지 않았다.

안방에 병자를 눕히게 한 기로사는 침착하게 그의 왼손을 잡아당겨 맥부터 짚어보았다.

김첨지의 아들과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젊은 병자는 오른손으로 배를 싸쥐고 끙끙 앓음소리를 내는데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돋힌것을 보아 참기 어렵게 아픈 모양이였다.

김첨지는 병자를 들여다보면서 얼굴이 어두워지는 기로사를 보자 숨가쁘게 물었다.

《어떻소이까?》

김첨지와 그의 아들은 물론 책읽기를 그만두고 병자곁에 다가와 앉은 제마도 근심가득한 얼굴로 기로사를 쳐다보았다.

기로사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우는소리가 나왔다.

《허? 이걸 어쩐다? 이 젊은인 심복통에 걸렸는데 후박이나 오수유 같은 딱 맞춤한 약재들이 떨어졌으니…》

김첨지의 아들이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소인이 얼른 장거리에 나가보겠소이다. 약재이름만 똑똑히 알려주사이다.》

기로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장에도 없네. 내 집에 떨어진게 장에 있을리 있겠나?!》

김첨지 부자는 얼굴이 컴컴해졌다.

그때 아까부터 숨을 죽이고 병자와 기로사를 번갈아 보던 제마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심복통에는 약이 정 없으면 배꼽우의 세치 되는데를 문질러주어도 아픔이 멎는다고 하던데…》

《엉?!》

기로사는 깜짝 놀라 제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놀라움은 겹쳐진것이였다. 그런 비방이 사실 있다는것보다 그것을 어린 제마가 잘 알고있다는 놀라움이였다.

날마다 력사책이며 4서를 읽는 제마가 심복통이 어떤 병이고 그보다는 의술을 어지간히 배운 기로사 자기도 제꺽 생각해내지 못한 비방을 어떻게 알고있을가.

하여간 놀라움은 놀라움이고 병자의 고통부터 덜어주어야 했다.

기로사는 제마에게 베개 하나를 더 가져다가 병자의 머리를 높이 고이게 하였다. 그리고 병자의 무릎을 세워놓고 그의 배꼽우의 세치 되는 곳을 찾아 손으로 누르며 문질러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한동안이 지나자 하얗게 질렸던 병자의 얼굴에 피기가 서서히 돌기 시작하였다.

좀더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죽는 시늉을 하던 병자가 입을 여는것이였다.

《선생님! 다… 다 나은것 같소이다.》

김첨지가 믿어지지 않는지 따지듯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병자는 천천히 일어나앉아서는 자기 배를 슬슬 문질러보며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야, 거참 신기하다. 언제 아팠던가 하게 배도 가슴도 이렇게 편안하니…》

김첨지는 너무 좋아 입이 함박만 해졌다.

《선생님! 전 오늘 십년감수했소이다. 글쎄 이 조카애가 내 집에 놀러 와서 갑자기 배를 그러안고 데굴데굴 굴며 죽는다고 소리칠적엔 눈앞이 새까맸댔소이다. 이젠 됐소이다.》

기로사는 제마가 어떻게 되여 심복통을 다스리는 비방을 알고있는지 그 까닭을 알고싶어 김첨지네들이 돌아간 후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여 그 비방을 알게 되였느냐?》

그러자 제마는 대답대신 무릎을 꿇고앉아 고개를 푹 숙이였다.

《선생님! 용서해주사이다.》

기로사는 더욱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용서란건 또 뭐냐? 난 너에게 의술을 한번도 가르쳐준적이 없는데 넌 오늘 의술을 알아도 잘 아는 의원처럼 급한 고비에 그 비방을 내놓았다. 대관절 어찌된 일이냐?》

기로사의 재촉에 고개를 든 제마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있었다.

《아니, 너 우는게 아니냐?》

《선생님! 용서하여주소이다. 사실 소생은 선생님 모르게 책장에서 <향약집성방>을 꺼내보았소이다.》

《뭐, 의서를? …》

제마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 소생은 그동안 생각한것이 하나 있었소이다. 불쌍하신 어머님은 소생을 낳은지 석달만에 앓다 돌아가시고 할아버님과 할머님마저… 외할아버님도 외할머님도 다 병들어 잘못되시지 않았소이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는 몹쓸병으로 죽지 않게 할수 있을가 하는 생각으로 선생님께서 병자들을 고치려고 침도 놓고 뜸도 뜨고 약도 달여먹이는걸 자세히 눈여겨왔소이다.

그러다가 다른 책장에 의서가 가득한것을 보고 몇책 읽었소이다. 어찌나 머리속에 쏙쏙 들어오는지… 의서보다 백성살이에 더 긴요한 책이 없는것 같소이다.》

기로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4서와 같이 까다롭고 난해한 책을 외우는 속에서도 의서를 읽었을뿐아니라 방금처럼 요긴한 대목에서 처방을 정확히 되살려내는 정도면 의원으로서의 천성도 타고난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음순간 기로사는 머리를 저었다.

《제마야, 넌 잘못 생각하였다.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에게 당부한것은 너에게 의술을 배워주는것이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살게, 나라를 위한 재목으로 되게 해달라는것이였다.

그런데 네가 아까운 정력과 시간을 의술에 쏟아부어서야 되겠느냐?》

《…》

여느때라면 기로사의 한마디에 《예, 명심하겠소이다.》라고 했을 제마가 지금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있었다.

《내 말뜻을 모르겠느냐?》

그제야 입이 열렸는데 그가 하는 말에 기로사는 대답할 말을 잃고말았다.

《선생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측은하고 가엾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나라에 소용되는 사람이 될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소이까. 사람이 집안식구들과 고향마을사람들이 병에 쓰러지고 굶주리는것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학문을 닦아선 무엇에 쓰겠소이까. 의술을 닦으면 아무때나 불쌍한 병자들을 도울수 있지 않소이까.

소생은 병고에 시달리는 불쌍한 병자들을 보기만 하지 못하겠소이다.

선생님! 소생에게도 의술을 가르쳐주소이다. 소생은 더욱 분발하여 유학도 의술도 다 배우겠소이다.》

기로사는 제마의 타는듯 한 눈길을 피했다.

강심품고 나선 사람의 마음은 돌리지 못하는 법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일은 바로 돼가는셈이다.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벼슬길에서 의술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격이 아니겠는가. 대를 두고 모아들인 집안에 가득한 의서들이 진짜 주인을 만난셈이 아닌가.

읽지 말란다고 하여 결코 자기의 마음을 돌릴 제마가 아니다.

마침내 기로사는 머리를 끄덕이고말았다.

《고맙소이다. 선생님!》

제마는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에 넘쳐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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