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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더위가 달려들어 사람들의 진액을 녹여내고있었다. 정말 진저리나는 무더위였다.
허나 리제마에게는 여름날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흥겨운지 몰랐다. 이거야말로 사람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가끔 리제마 당자도 말을 달려 집을 찾아가고 집에서도 한옥이며 딸자식이 여기를 오고가니 일찌기 이런 재미를 보았던가. 게다가 아들과는 함께 있다. 을순이며 제자들은 식솔들을 홍원으로 데려오라고 졸랐다.
그들의 청이 옳은것 같아 한옥이에게 이사를 가자고 하였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의술을 가르치기에 바쁜 남편과 객지에 와 사는 학도들에게 짐이 된다는것이였다.
홍원이 먼데도 아닌 이웃고을이니 자주 오가면 된다는것이 한옥의 대답이였다.
하긴 그 말도 옳다. 그전에는 한해에 한번은커녕 몇해에 한번 집식구들을 만나보았는데 이제는 서로서로 오고가니 함께 사는거나 무엇이 다른가.
어찌 그것만 사는 재미라고 할수 있으랴. 그 못지 않은 재미가 있다.
지금껏 닦아온 의술을 아들과 학도들에게 물려주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값져보이고 긍지가 있어 날마다 신바람이 났다.
시작을 뗄적엔 과연 한해동안에 어렵고 까다로운 의술을 젊은이들에게 전수해주겠는지 위구심이 앞섰댔는데 해보니 공연한 근심이였다.
누구 하나 뒤지지 않으려고 정신을 가다듬고 접어드는 학도들이라 몇달어간에만도 적지 않게 깨우쳤다.
약재의 특성, 약재의 승강부침(작용방법), 보사작용, 귀경(선택작용)으로부터 약재들을 배합할 때의 약효의 변화, 5장6부의 병에 쓰이는 약재들, 약재의 배합금기, 약처방을 짓는 묘리와 약재의 제형 그리고 보약에 대해서도 배워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의술이 뿌리를 두고있는 음양5행설로부터 기항지부(뇌수, 골, 맥, 자궁, 담)와 같은 장상(몸안에 있는 내장장기들의 기능상태와 병리변화가 몸겉면에 나타나는 현상), 병인과 발병, 병증을 가려보는 묘기 그리고 뜸술, 부항술을 배워주었다. 요즘은 침구술을 가르친다.
오전에는 리제마가 주로 리론을 가르치면 오후에는 의봉이 실기를 가르쳤다.
을순이는 고을녀인들의 부인병을 고쳐주는데 4상의술을 받아들여 좋은 효험을 보고있다.
젊었을적부터 애기를 낳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녀인들을 동정하여 달라붙었던 무자(불임증)에 대한 관심을 리제마는 언제나 버리지 않았었다. 리제마는 그동안 무르익혀온 무자에 대한 약처방을 을순이에게 주어 고을녀인들에게 써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놀라운 효험이 있었다.
4상인을 가르고 그에 맞게 약을 쓰는것이 부인병치료에서도 확실히 우월하다는것이 증명되였다.
리제마는 오늘도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오전에 글방에서 학도들에게 식상과 위완통 같은 속탈때 침을 놓는 침구술을 배워주었다.
오후에는 홀로 거처지에 들어앉아 다음날 배워줄 의술과목을 짜는데 어느새 해가 떨어졌다.
긴긴 여름낮 해가 노루꼬리만 한 겨울낮처럼 짧아보이기는 이해가 처음인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난 리제마는 학도들이 낮에 배운 의술을 어떻게 리해하고있는지 알고싶어 거처지를 나섰다.
거처지는 글방에서 좀 떨어져있었다. 홍원현감은 글을 가르치는 스승의 방은 조용해야 한다면서 외따로 떨어져있는 집을 한채 내여주었던것이다.
밖에 나서니 쟁반같은 보름달아래 펼쳐진 밤경치가 볼만 하였다.
락락장송에 묻혀있는 글방에서 비쳐나오는 불빛이 보다 더 리제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저 불빛이 쏟아져나올수록 학도들의 의술이 높아질것이니 스승된 몸으로 어찌 기분이 나지 않으랴.
그래서만도 아니였다. 한옥이도 달래도 다 잘 있다는 집소식이 또한 그의 기분을 흥겹게 해주었다.
오늘 또 을순이 함흥에 갔다 돌아왔다. 한옥이 병약해졌다면서 보약을 지어가지고 갔던 을순이였다.
한옥이를 언니처럼 따르며 그의 건강에 대해 왼심을 쓰는 을순이를 생각할 때면 은연중 그에게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다.
잘하느라고 가락지를 사준노릇이 한 녀인의 신세를 기구하게 정해놓을줄이야. …
향긋하게 풍겨오는 모기쑥타는 냄새에 리제마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글방마당에 솟아있는 느티나무에 다가가 기대여섰다.
열어놓은 방문으로 모기쑥을 태우는 글방안이 들여다보였다.
민성이와 학도들의 틈에 끼여있는 의봉이도 보였다. 오후에 이어 저녁에도 학도들에게 침구술의 묘리를 다져주는 의봉이였다.
《선생님! 한말씀 들려주소이다.》
목청이 거센것을 보아 접장을 맡은 안변총각일것이다. 김준영이라고 부르는데 보통키에 다부지게 생겼다. 몸동작이 민첩하고 성격이 쾌활한데다 통솔력이 있어 접장을 시키였다.
《좋아, 의술을 하루빨리 익히려고 애쓰는 자네들에게 꼭 소용될 얘길 들려주겠네.》
올방자를 틀고앉아 손세를 써가며 말하는 의봉의 모습이 잘 보였다.
《우리 나라에 <세상에 백광현이 없으니 죽을따름이다.>라는 말이 있네. 이 말은 의술을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명구일세. 백광현이란 의원이 죽은지도 어언 이백년이 지나갔건만 지금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해하는건 왜서인가. 우리 나라에서 정저(얼굴이나 목뒤 등에 나는 악성종처)를 고치는 의술은 백광현이때부터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백광현은 집이 몹시 가난해서 늘 기운 베옷을 입고 죽을 먹으며 살았다네. 젊어서 그한테 재주가 있다면 한가지, 병든 말에 침을 놓아 고치는 마의술이였네.
언젠가 그는 종창으로 죽은 사람을 보았네. 백광현이 살던 때까지만 해도 정저 같은 악질의 종창이 몸에 생겨 뿌리가 깊어지면 죽는수밖에 없는것으로 통해왔네.
종창으로 죽은 사람을 본 백광현은 다시는 그런 병으로 사람들이 죽게 해선 안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네.
그날부터 그는 종창을 앓는 말을 찾아내서 그 병을 고치기 시작했네.
마음먹고 달라붙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그는 인차 종창에 걸린 말병을 고칠수 있게 되였네. 여기에서 신심을 가진 그는 종창에 든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달라붙었네. 그런데 처음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병자를 살려내지 못했지. 그러나 손맥을 놓지 않고 달라붙어 끝내는 묘방을 찾아냈다네. 큰침으로 종처를 헤치고 살을 짼 다음 독이 든 뿌리를 말끔히 베여내는 묘방이였지. 이로 해서 백광현은 죽게 된 사람들을 살려냈고 하여 어의로까지 뽑혀나갔네. 늙어서 현감벼슬도 하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네. 어느날 백광현은 우연히 입술이 불에 덴것처럼 부르트고 그속에 고름이 든 병자를 보았네. 그때 그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틀전에 보지 못한것이 분하구나. 이 사람은 때가 늦어 밤에는 숨질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병자는 그날 밤에 죽었네.
이처럼 백광현은 뛰여난 명의였네. 그분이 돌아가신 후 스승의 비방을 전수받은 아들 백흥령과 제자 박순이 종기를 잘 고쳤다네. 그러나 그들까지 죽은 다음에는 선대들만 한 명의가 나오지 못하고있거던.
이 이야긴 스승께서 들려주신거네.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후학들이 선대들의 재주에 미치지 못하는것은 진심으로 병자들을 살려내겠다는 마음이 선대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까닭에 애써 의술을 닦지 않기때문이라고 하셨네.
내가 왜 이 이야길 자네들에게 전해주게 되는가? 자네들은 이제 곧 스승께서 내놓으신 4상의학을 배우게 되네. 아직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4상의학은 사람의 체질에 맞게 약을 써서 고치게 하는 의술인데 명의가 되려면 반드시 통달해야 하는 학문일세.
나는 자네들이 뛰여난 명의를 스승으로 모시고있다는 자부를 안고 <광제창생>을 이루시려는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하루빨리 더 깊은 의술을 닦기 바라네.》
의봉이야말로 훌륭한 제자이다. 스승의 뜻을 저만 아니라 후진들에게 심어주는 제자야말로 진짜배기 제자라 할수 있다. 바로 저런 의로운 제자들이 있기에 선대들의 공적이 후세에 전해지고 더 큰 진보가 마련되는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