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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소리없이 깊어가는데 자리에 누운 배기달은 눈이 말똥말똥해서 천정을 쳐다보고있었다.
곁방에서는 의봉의 코고는 소리와 그의 자식들의 쌕쌕 코부는 소리가 들려온다. 스승집에서 한방을 내주어 온 식솔이 함께 사는 의봉이네다.
그러나 이밤따라 기달이 잠에 들지 못하는것은 한성에 두고온 처자 그리운 생각에서만은 아니였다. 그것은 리제마때문이였다.
리제마는 래일 청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민성이와 함께 아버지의 묘를 지키러 려막으로 나가고 없어 기달은 홀로 자리에 누웠다.
기달이 삼경이 기울도록 이불을 안고 엎치락뒤치락하는것은 낮에 리제마에게서 당한 초달때문이였다.
오늘 낮 스승은 몹시 성이 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내보내고 기달이만 뜨락에 남게 하였다.
기달은 10여년세월 리제마를 따라다니면서 이번처럼 성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루에 걸터앉아 두주먹을 불끈 쥐고 두눈섭을 꿈틀거리며 눈을 치뜬 리제마의 모습은 꿈에서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이놈! 먼저 네가 지은 죄가 뭔지 그것부터 이실직고해라!》
뜨락에 빳빳이 선 기달은 한동안 머리가 뗑해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달은 스승이 따지고들려는 죄가 무엇일가 하는 생각으로 허둥거렸다.
리제마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며 하지 말라고 하는 금기는 너무도 많은데 그것을 다 지킨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함부로 혀를 놀리다간 스승이 모르는 결함을 내뱉아 죄를 더 크게 할수도 있다.
그저 죽었소 하고 엎드려있는게 상수다.
그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입을 열지 못하자 지은 죄를 자책하는것으로 여겼는지 리제마의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다.
《자네는 스승의 얼굴에, 아니 4상의학에 흑칠을 하였네. 4상의학은 점쟁이, 미신쟁이들이 떠벌이는 그런 관상이 아니란 말이네. 그런데 뭐 4상인이 어떻다구?》
기달은 그제야 숨이 좀 나갔다. 그러니 스승이 다른 잘못은 모른다는것이로구나. 그까짓 4상의학을 관상에 비긴것쯤이야 무슨 큰일이겠는가.
한달전 기달은 함흥향교에 나갔었다. 리제마의 스승 기로사가 교수로 지내던 향교였다. 그때는 파직을 당하려 한성에 간 스승이 돌아오지 않아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심심풀이삼아 향교생들과 한담을 나누고싶었다.
그날 향교생들은 기달이 리제마의 제자라는걸 알고 4상인에 대해서 물었다.
이때라고 제 자랑을 하고싶어하던 기달은 4상인을 가르는 여러 특징들중에서 체격과 용모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사람의 생김새를 가지고 그 사람이 앞으로 무슨 병에 걸릴수 있으며 무슨 재액을 당할수 있다는걸 알수 있는데 자기는 얼마든지 그 흉화를 막아줄수 있다고 떠들었다. …
기달은 고개를 떨구고 《소생이 그만 입건사를 잘못해서…》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뭐라구? 입건사를 잘못했다구? 아니다. 너는 입건사를 잘못한것이 아니라 4상의학을 잘못 공부한때문이야. 한두해도 아니고 10여년세월이나 따라다닌 네가 어찌 그럴수 있단 말이냐?
그래 네가 전혀 맞지도 않는것을 옳다고 하고 없는것을 있다면서 사람들을 속이는게 미신인줄 모른단 말이냐?
그런데도 너는 미신쟁이나 관상쟁이처럼 사람의 생김새가 어떠하니 어떤 불화를 당할수 있고 액막이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니 정녕 4상의술을 배운 녀석이 옳단 말이냐?》
기달은 억지로 울상을 짓고 《죽을죄를 졌소이다.》 하고 대답했다.
리제마는 숨을 길게 내쉬고나서 엄하게 말했다.
《네가 잘못을 알았다면 향교에 나가 학도들앞에서 네 잘못을 빌어야겠다.》
기달은 그 말에 울기가 뻗쳤다.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까짓 미신같은 말 몇마디에 큰죄를 지은 죄인을 사람들앞에 끌고다니며 망신을 주는 조리돌림같은 벌을 주자고 하는가.
그러나 당장은 급한 고비를 넘기고보자는 생각에서 기달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흥! 내가 개코망신을 사서 하자고 향교에 나가 빌수 있는가. 안될 말이다.》
기달은 부아가 나서 씨벌였다.
이번에는 이태전 가을 진해에서 고원으로 가는 길에 들렸던 한성의 처가집이 떠올랐다.
그때 장인은 또다시 스승의 의술을 빨리 배워오라고, 사실 딸을 준것은 의술을 닦아 잘살기 바래서였지 떠돌아다니는 가난뱅이신세가 되라는것은 아니였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다 사위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장모의 말을 골수에 새기고온 기달이였다.
그런데 지금 같아서는 언제 가도 리제마의 의술을 다 배워낼것 같지 못하다.
처음 리제마를 따라다니며 의술을 배울 때에는 흥취가 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흥취가 나지 않으니 욕망도 나지 않는다.
그건 다 스승이라는 사람때문이다.
무슨 놈의 하지 말라는것이 그리도 많은가.
의술을 닦지 못하면 못했지 리제마가 살라는대로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
재물욕심도 가지지 말래, 주색질도 멀리하래, 놀음도 삼가하래, 하라는건 오로지 날마다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침이나 꽂고 약이나 지으라는것뿐이다.
속세를 멀리 떠나 산속에서 사는 승려들도 그렇게는 안 산다. 그들도 념불이나 외우고는 시주를 받아다 먹고살지 않는가.
《더는 이대로 못살아. 못살겠단 말이야.》
기달은 이불을 쥐여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지금에 와서 리제마에게서 바랄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스승이 벼슬살이를 할적엔 고을원이라는 그의 권세를 턱대고 사람들앞에서 행세를 하였다.
또 스승이 앞으로 높은 관직에 오를것이라고 믿었기에 집떠나 겪는 고생살이를 참을수 있었다. 앞으로 자기 의술을 펴게 되면 그 덕을 입을수도 있었기에 말이다.
허나 조정의 권세를 독차지한 민가어른네들의 비위를 거슬려서 파직당한 스승이니 망친 인생이다. 오죽했으면 스승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수 없는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하자고 하겠는가.
이제 더는 인생을 망친 사람의 뒤를 따라다닐수 없다. …
려막에서 밤을 지샌 리제마는 먼동이 터오는듯 한 기운을 육감으로 느끼자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떠나는 날이다.
정작 고향을 떠나 멀리 타국으로 가야 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하였다.
이제는 고인이 된 기로사며 《포태선생》의 얼굴이 눈앞에 보여왔고 지난해 섣달에 잘못된 박규수의 모습도 떠올랐다.(정초에 황도연이 글월을 보내왔는데 글월에는 박규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씌여있었다.)
리제마는 멀리 청나라로 집을 떠나기에 앞서 어머니며 할아버지, 할머니, 외조부모님들과 기로사의 묘들도 돌아보고싶었다.
산소들을 차례로 돌아보고 산을 내리는데 의봉이 숨을 헐썩이며 마주 달려왔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가.
《선… 선생님!》
리제마는 미간을 찌프렸다.
처자를 거느린데다 이제는 35살이면 나이든 축이라 할수 있는데 의봉은 아직도 애들처럼 덤벼치군 한다.
이건 다 스승된 사람의 잘못이기도 하다. 이 리제마라는 사람이나 제자인 의봉이라는 사람이나 다 소양인이고 성미도 급한 축이다.
세살적 버릇 여든 간다고 하였다. 스승이라는 사람이 의봉이의 좋지 못한 성격을 고치게끔 엄하게 대하지 못했으니 그럴수
밖에…
그러고보면 이 리제마가 제자를 키우는 일에서 스승에 미치지 못함을 알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의봉이의 좋지 못한 성격을 고쳐주리라.
《선생님! 기달이 어… 없어졌소이다.》
리제마는 머리를 저었다.
어제 된꾸중을 들은 기달이 생각이 많아서 어데 잠간 나갔겠지. 그가 스승을 저버리고 떠나버릴 리유는 아무도 없다.
《이 사람! 길에서 떠들지 말고 날 따라오게.》
삽짝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선 리제마는 집안의 분위기가 썰렁하다는걸 느끼였다.
토방아래에 집안사람들이 나와섰는데 인상들이 이전과 다르게 침울해보였다.
리제마는 먼저 한옥을 바라보았다. 시집을 와서 오늘까지 남정네가 할 일까지 맡아 농사도 짓고 살림살이를 하느라 고생을 하여서 나이보다 겉늙은 한옥이였다.
리제마는 달래에게로 다가갔다.
달래의 나이 17살이면 방년의 나이이다. 아버지의 3년상이 인차 끝나겠으니 그때 시집을 보내야지.
《얘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
달래가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아버님! 기달오라버니가 무과시험을 치러 갈 때 어머님이 사준 백마까지 타고 갔어요.》
달래의 볼부은 소리에 의봉이 성나서 소리쳤다.
《그런 놈이 무슨 놈의 오래비야? 인두겁을 쓴 못된 놈이지.》
리제마는 마구간을 바라보았다.
벼슬살이에 남은것이란 자기의 말 한필뿐인데 그 말이 정말 마구간에 없었다.
《선생님!》 하는 을순이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었다.
《그까짓 달아날 사람이 달아나는거야 무슨 변이겠소이까. 기달이 그놈이 선생님이 쓰신 그 4상의술책을 쏙 뽑아가지고 달아났으니 어찌하오리까?》
리제마는 그제야 허둥지둥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이 그대로 펴있는 방 한켠에 마구 헤집어진 부담짝이 나딩구는데 그 주위로 책들이 너저분하게 내던져있었다.
을순이 스승에게 그대로 보여주려고 방을 정돈하지 않았던것이였다.
리제마는 급히 부담짝안을 헤쳐도 보고 나딩구는 책들도 살펴보았지만 10년세월 4상인을 연구하면서 적어놓은 책만은 없었다.
의봉이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부르짖었다.
《선생님! 이건 다 소생탓이오이다. 이런 너절한 놈인줄 알고있으면서도…》
《그건 무슨 소리인가?》
《진작 선생님께 아뢰였어야 하는건데… 기달이 그놈은 오래전부터 딴꿈을 꾸고있었소이다. 내놓고 저에게 선생님이 의술을 제대로 넘겨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였고… 진해때 선생님 몰래 관가돈을 달래가지고 처가집에 보내주었고 고원에 가서도 여전히 기생집들을 찾아다녔소이다.》
리제마는 기가 막혔다.
《아, 기달이 그런 놈이라니… 내 눈이 멀었구나.》
한옥이 리제마의 팔을 부둥켜잡았다.
《민성 아버지! 진정하소이다.》
의봉이 독이 나서 소리쳤다.
《내 한성에 쫓아가서 그놈을 징벌하고 책을 찾아오겠소이다.》
《그만하여라.》
《선생님!》
《책이야 열번이고 다시 쓰면 되지만 사람이 변한것이 가슴이 아파 못 견디겠구나. 이랬든저랬든 10여년이나 날 따라다니며 고생한 제자가 아니냐?》
리제마는 털썩 주저앉고말았다.
아, 제자를 키운다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알겠구나. 머나먼 옛시절 기로사나 《포태선생》이 나를 키울 때도 이렇듯 안타까운 때가 많았으리라.
이어 남편의 길떠날 차비를 끝낸 한옥이 아침상을 들여왔다.
《민성이 아버지! 머나먼 인생길에 무슨 일인들 없겠나요?!》
리제마는 한옥의 깨끗한 진정에 목이 메였다.
아마 한옥의 고무와 도움이 없었다면 청나라로 떠날 용단을 내리지 못했을것이다.
더러운 벼슬길에 침을 뱉고 돌아왔을 때에는 말없이 남정네의 마음을 리해해주었고 친지분들의 조언을 따르련다는것을 알고는 청나라로 가는것이 옳겠다면서 기꺼이 로자를 마련해준 한옥이였다.
《민성이 아버지! 어서 드시와요.》
리제마는 한옥이 손에 들려주는 수저를 받아들자 눈앞이 흐려들었다.
긴긴 세월 고향을 떠나 마음놓고 다닐수 있은것은 바로 한옥이가 있어서때문이 아닌가.
아, 내 언제면 이 녀인에게 복을 가져다 줄수 있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