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후진을 키우는 길에서

 

1

 

1877년 봄.

해가 한기장쯤 떠오를적에 리제마는 아들 민성이를 데리고 성천강가로 나갔다.

갯버들이 무성한 아늑한 자리에 민성과 함께 앉은 리제마는 말없이 생각에 묻히였다.

무엇이라 쉼없이 주절대며 흘러내리는 강물우에 지나간 옛시절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할머니의 엄한 통제속에 분판(기름에 갠 분을 발라서 결은 널판)에 가로세로 고사리같은 손에 쥔 붓을 어슬프게 그어 삐뚤삐뚤 글을 새기던 모습에 이어 《해동명장전》 같은 력사책들을 읽던 시절 그리고 더 많은걸 배우려고 기로사의 손에 매달려 향교마을로 가던 모습이 겹쳐지더니 이어 의술이라는 학문에 온넋이 끌려 밤낮으로 의서를 번지던 시절이 보이였다.

참말이지 고향은 세상을 알게 해준 따뜻한 품이였고 더 넓은 세상에로 떠밀어준 정다운 품이였다.

허나 그처럼 정다운 고향산천이 오늘은 이 가슴에 장막같은 어둠을 드리워주는 까닭은 뭘가.

아비된 몸으로서 부모의 묘를 지키고 집안의 크고작은 일을 떠메여야 할 직분을 어린 자식에게 지워주지 않으면 안된, 그로 하여 느껴지는 죄의식때문이였다.

지금이라도 자식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있는 멍에를 벗겨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리제마는 귀향길에 올라 집으로 돌아오던 때의 일을 돌이켜보았다.

청나라로 가서 4상의술을 파고들 마음안고 고향땅에 들어섰건만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집을 멀리 떠나 《광제창생》에 뜻을 두었던 벼슬길에서 파직이라는 감투를 쓰고 처자와 고향사람들앞에 나서야 하니 어찌 마음이 즐겁다 하랴.

심기가 무직하여 사립문앞에 천천히 들어서니 할아버지 산소곁에서 려묘살이를 하다가 잠간 집에 내려와있던 민성이 달려나오는데 그의 모습이 몇해사이에 영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시험을 치러 집을 떠날 때는 키가 아비 겨드랑이아래에 들던 녀석이 이제는 아비보다도 한뽐은 더 커서 15살 소년 같지 않았다. 한옥이쪽을 많이 닮아 훤칠했다.

여간 조숙하지 않은 아들을 보고 리제마는 목메여 불렀다.

《얘야.》

리제마가 감격하여 민성을 부둥켜안으려는데 그가 털썩 집뜨락에 꿇어엎드리는것이였다.

《아버님!-》

리제마는 와락 민성을 부둥켜안았다.

《얘야, 아비란게 살아있으면서도 너에게 상복을 입게 하였구나. 나야말로 죄많은 아비로다.》

려묘살이로 여윈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리제마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한옥이와 딸 달래가 방안에서 뛰쳐나와 리제마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한옥을 보았을 때 또 한차례 눈물이 쏟아졌다.

한옥이 몇해사이에 이렇게까지 늙을수 있단 말인가. 새까만 윤기가 흐르던 머리에는 흰서리가 내리였고 주름이 많아진 얼굴은 볕에 타서 새까맣다. …

《아버님!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렇게 안색이 무거우시오이까?》

리제마는 민성이 손을 포근히 감싸쥐고 흔들어서야 울적한 상념에서 깨여났다.

《오, 내 가끔 이럴 때가 있구나.》

《아니오이다. 소자는 그 말씀을 믿을수가 없소이다.》

《허- 그건 무슨 말이냐?》

민성은 빙긋 웃었다.

《소자는 아버님의 마음을 잘 아오이다. 아버님께선 이곳만이 고향이 아니고 온 나라가 고향이며 온 나라 사람들을 다 가까운 이웃으로 여긴다는걸!》

쌍까풀진 반달눈은 꼭 제 어미를 닮았다. 어린시절에 한옥의 정찬 반달눈에 마음이 이끌려 친누이처럼 따랐던 제마였다.

《아버님! 어머님한테 다 들었소이다. 아버님은 또다시 집을 떠나 청나라로 가야 하고 그 나라에서 의술을 더욱 다지려고 한다는것을…》

리제마는 할 말이 없게 되였다. 사실 민성을 데리고 한적한 강가로 나온것은 그 말을 하려고 해서였다.

허나 어린 자식에게 아비가 맡아야 할 집안일을 네가 대신 감당하라는 말이 나가지 않아 입을 열수 없었다.

《아버님! 효도는 부모님들을 봉양하는데만 있다고 생각지 않소이다. 부모님들이 세운 뜻을 펼치는 길에 주추돌도 되여주고 디딤돌로도 되여주는 자식이 진짜 효자라고 생각하오이다.

그러니 자식들 걱정이랑, 집걱정이랑 마시고 큰일에 힘써주사이다. 제 더 잘 어머님을 도와 집일을 해나가겠소이다.》

리제마는 눈물이 솟구쳐 저 멀리 하늘에로 눈길을 돌렸다. 이런 자식에게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한옥이, 고맙소. 아들을 잘 키워주어서…)

내세운 뜻을 굽힘없이 더욱 분발하여 의술로써 백성들을 도우리라. 그리고 어머니를 도와 집일을 하느라 공부를 못한 민성이를 의원으로 키워 뜻을 이어주리라.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