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형방이 례조좌랑의 잘못을 적은 문초장을 사헌부에 갖다 바친지 달포가 지나서 함흥감영의 《고석배기》판관이 고원에 들이닥쳤다.

얼굴이 속돌같이 얽혔대서 《고석배기》라 불리우는 판관은 군수보다 두 품계나 낮았지만 함흥감영의 관리라며 폼을 잡았다.

그러나 리제마앞에서는 눈치를 엿보며 감히 하대하려 들지 못하였다.

민겸호의 심복인 례조좌랑까지 꽁꽁 오라지워 보낸 리제마앞에서 객기를 부리다가는 그보다 더 심한 봉변을 당할가봐서였다.

행수기생의 말에 의하면 《고석배기》는 향청의 좌수와 절친하다고 한다. 이전 군수들이 좌수와 단짝인 《고석배기》의 뒤긁는 재간에 골탕을 먹고 쫓겨갔다고 했다.

《고석배기》는 리제마에게 급히 리조에 올라가 분부를 받으란다는 함경도 관찰사의 령을 전달하고는 아전들에게 관가의 고간들을 전부 봉하라고 을러멨다.

마치나 봉고파직을 시키듯 경망스럽게 놀아대는 《고석배기》를 혼내우고싶었지만 후날에 관속들이 해를 입을가봐 꾹 참아냈다.

함흥감영을 생각하면 괘씸스럽기 그지없다. 도대체 함흥감영이 무슨 권한으로 묶어보낸 례조좌랑을 놓아보낼수 있단 말인가. 제입으로 쌀 오천석을 빼내여 왜놈들에게 팔아먹으려 했다는 음모를 토설하고 손도장까지 찍은 죄인인데 그대로 오라지워 의금부로 압송하지는 못할망정 후히 대접까지 하고 말을 태워보냈다고 하니 정말 썩을대로 썩은 함흥감영이다.

밉다니까 떡 사먹으면서 서방질한다고 《고석배기》는 향청의 좌수를 불러 고을정사를 보게 하였다.

좌수 그자는 자기를 고을정사에서 밀어낸 악감을 먹고 관가에 들어서자마자 쫓겨났던 아전들을 불러들이고 문서장들을 까보며 조세를 적게 받았다고 떠들었는데 고을백성들이 녹아나게 되였다.

이로써 고원정사는 도루메기가 돼버렸다.

리제마는 한성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향교를 찾아갔다.

한두달만 더 시일이 있었어도 향교에서 의술도 배워주도록 하는건데…

향교의 교수에게 어떻게 하나 향교생들에게 의술을 배워주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지만 좌수 그놈이 알면 그것도 말공부로 끝나고말것이다.

리제마는 고원을 떠나자고 하니 마음이 구슬프고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진해를 떠나올 때는 고을백성들의 뜨거운 배웅을 받았는데 고원에서는 어둑컴컴한 꼭두새벽에 함흥으로 떠나보내는 의봉이와 기달이, 을순이들과 눈물속에서 헤여졌다.

 

이번 가면 아주 가나

아주 간다 잊을소냐

 

처량한 호곡속에 상여군들이 부르는 《상여의 노래》가 귀전에 들려오는듯 하였다. 죽어서 간 사람처럼 다시는 고원군수로 되돌아갈수 없을것이다.

마음속의 위안이랄가. 고인은 가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잊지 않듯 고원사람들이 이 리제마를 잊지는 않을것이다. 고원군수로 있은 기간은 길지 않았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악독한 부자놈들에게 한풀이를 하였고 또 많은 병자들이 병을 고치였다.

한성에 이르러 리제마가 리조의 뜨락에 들어서니 수직당하관인듯 한 사람이 맞아주었다.

리제마가 그에게 찾아온 용건을 꺼내놓으니 그는 어느 한 방을 가리켰다.

《바로 저 방이 정랑의 방이요. 들어가보오.》

정랑이라면 정5품관으로 벼슬품계는 높지 않아도 문관들의 임명과 해임을 직접 주무르는 리조의 노란자위라고 할수 있다.

리제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옥죄이며 조심히 기척을 내고 리조정랑의 방에 들어섰다.

《고원군수 리제마 문안드리오.》

리조정랑은 칼칼하게 생긴 사람인데 답례를 하고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 측은해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이윽고 리조정랑은 종이말이를 펼쳐들었다.

《교지요-》

리제마는 황급히 방바닥에 꿇어엎드렸다.

짧은 순간에 이런 생각이 머리속을 고패쳤다. 그렇다면 례조좌랑을 혼쌀낸 일이 사헌부를 통해서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단 말인가. 임금에게 알려졌다면 차라리 잘됐다. 임금이 그 전말을 알았다면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것이다.

리조정랑의 석쉼한 소리에 리제마는 귀를 강구었다.

《고원군수 리(제마)는 부친의 상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신의 권세와 부귀를 탐내여 상중임을 속이고 벼슬을 하였다니 실로 량반의 수치가 아닐수 없다. 마땅히 십악죄인으로 엄히 다스려야 하나 세운 공이 하도 가상하여 파면만 시키노라.》

리제마는 천정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환각으로 몸을 떨었다.

아,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도 있는가. 자기의 배를 불리려 나라의 쌀에 손을 대려던 민겸호 그놈이 제놈의 죄를 숨기고저 도리여 무고한 사람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다니. 그것도 거짓과 생억지로 임금을 기만하고 지엄한 나라님의 어명으로 꾸며내여 충정을 바치고저 애쓰는 사람의 목을 조이는구나.

하긴 무도한 민겸호 그놈이 무슨짓인들 못하겠는가. 왜놈들에게 굴복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고 자기 일파의 리득만 얻을수 있다면 나라도 팔아버릴 민가네들이 조정에서 살판치는 한 임금이 아무리 어진 정사를 펼치여도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을리 만무하다.

력대로 조정이 간신들의 세상이라는 말을 이젠 똑똑히 알겠다. 일신의 치부와 권세욕이라는 무서운 정신병에 든 간악한 추물들이 패당을 뭇고 임금의 이목을 가리웠으니 고을은 고사하고 작은마을 하나에서도 가난을 구제할수 없다.

이렇게 썩은줄도 모르고 벼슬길에 올라 마을들과 고을들을 백성들이 잘사는 무릉도원으로 꾸리려고 하였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아, 허무하다. 너무도 허무하구나. 벼슬길에선 백성을 구제하는 세상을 이룰수 없으니 이 더러운 벼슬길에 침을 뱉고 돌아서리라.

리제마는 결연히 돌아서 리조를 나왔다.

경복궁이 굽어보이는 둔덕우에 올라선 리제마는 해가 서녘으로 기우는지도 모르고 서있었다.

과연 앞길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을 깊이하여도 이렇다할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이런 때야말로 친지분들의 조언을 받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리제마는 황도연과 박규수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 두사람의 조언이 신통히도 같았다.

그들은 민가일당이 그를 파직시키는것으로 일처리를 그치지 않을것이니 당분간 청나라로 몸을 피해가서 4상의술을 더 깊이 파고드는것이 상책이라고 하였다.

박규수는 병석에서도 청나라 례부의 한 벼슬아치에게 소개신까지 써주었다.

리제마는 친지분들의 조언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벼슬살이로는 가난을 구제할수 없어도 의술로는 백성살이에 도움을 줄수 있다. 내 힘껏 4상의술을 파고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리라.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