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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리제마가 해질녘에 동헌으로 돌아오니 책방이 마주나와 방금 인편에 받았다면서 봉인한 종이말이를 내주는것이였다.
황도연이 보낸 글월이였다.
이번에는 또 어떤 소식을 보내왔을가.
리제마는 몹시 궁금하여 동헌방에 들기 바쁘게 봉인을 뜯고 종이말이를 펼치였다.
급히 글을 읽어내려가던 리제마는 소스라치게 놀라 종이말이를 떨구었다.
세상에 이럴수도 있는가. 뭐, 왜놈들에게 굴복하여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란걸 맺었다고?
리제마는 혹시 잘못 보지나 않았는가 하여 다시 종이말이를 집어들고 들여다보았다.
틀림없었다.
그의 입에서 비통한 음성이 새여나왔다.
《아, 나라에 망조가 들었구나.》
리제마는 종이말이의 글줄들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병자년(1876년) 2월 3일(음력 2월 27일).
7척의 군함에 800여명의 병력을 싣고 조선에 기여든 일본침략자들은 리조봉건정부에 강요하여 강화도에서 침략적이며 예속적인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강화도조약》으로 하여 조선은 왜나라에 부산포를 포함한 10개 지점의 항구를 개방해주며 왜인들은 조선의 항구에서 조선국법에 저촉되는 죄를 져도 자국의 법으로 《조사판결》을 받게 되였다.
아, 이거야말로 조선의 수치가 아닌가.
리제마는 억이 막혀 숨을 쉴수 없었다.
세상에 맞붙어 싸움 한번 안 해보고 적에게 굴복하는 나라도 있는가.
리제마는 날이 밝는줄도 모르고 한자세로 앉아 통탄하고 또 통탄하였다.
일개 평백성도 아니고 큰 고을의 군수라는 사람이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눈을 펀히 뜨고 앉아 보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차라리 벼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어느 산속깊이로 들어가 숨어버리고싶었다.
허나 가난에 쪼들리는 불쌍한 백성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힘이 진할 때까지 그들을 돌봐야 하며 때가 오면 반드시 의병을 일으켜서라도 나라와 겨레를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다잡았다. 하여 그는 이전보다 더 분발심을 안고 고을정사를 돌보는 일에 힘을 다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에 이르러 고원땅에 대풍이 들었다.
가을걷이를 와닥닥 해제낀 마을들에서는 조세를 바치느라 분주했다.
덕지강가에 자리잡은 군자창은 고을에서 제일 큰 창고이다.
해마다 여기에 조세를 받아두었다가 갑산진이며 혜산진 같은 군진들에 군량으로 실어보낸다.
군량을 대지 못하면 군수가 목을 바쳐야 하는 까닭에 력대로 고을원들은 농사가 안될수록 더욱 악을 쓰고 백성들을 털어냈다.
요즘 리제마가 매일이다싶이 군자창에 나가보는것은 군량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가봐 걱정되여서보다 창리 같은 쌀창고에 붙어사는 아전들이 롱간질을 부릴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리제마는 걸음을 다그쳐 군자창에 이르렀다.
넓은 군자창의 마당에 곡식섬을 가득 실은 달구지들이 붐비고있었다. 리제마가 마음이 흐뭇해서 곡식섬을 부리는 사람들을 지켜보고있는데 등뒤에서 책실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또님!》
리제마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보니 책실이 두손을 모아잡고 서있었다.
관가를 나서면서 그동안 송사한걸 문건으로 꾸며놓으라고 책실에게 이르고 나왔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는가.
《사또님! 방금 한성에서… 례조에서 좌랑이란 어른이 오셨소이다.》
《례조에서?! …》
모를 일이다. 주로 외교나 향교 등을 맡아보는 례조에서 무엇때문에 좌랑(정6품)이란 사람을 이런 산골고을에까지 내려보낸단 말인가. 향교나 향약의 실태를 알아보자고?
리제마는 책실을 뒤에 달고 시답지 않은 걸음을 다그쳤다.
동헌뜨락에 들어서니 한성풍의 맵시나는 관복을 쭉 빼입은 량반이 섬돌아래에서 오락가락하고있었다.
리제마는 공손한 자세로 그에게 다가가 선절을 두번 하였다.
《먼길을 오시느라 고생했겠소이다.》
리제마의 인사말에 례조좌랑은 시를 읊듯 대꾸했다.
《산천구경이 하도 좋아서인지 몸도 마음처럼 가볍기만 하오이다.》
례조좌랑은 울퉁불퉁하게 생겼는데 입술이 지나치게 두툼한것으로 하여 몹시 미욱해보였다.
《실은 함흥본궁에 가서 가을철제사를 차리고 한성으로 올라가던 길에 리조참판대감의 분부가 있고 해서 잠간 들렸소이다.》
리제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리조참판이라니? 그가 이 리제마를 어떻게 잘 안다고 사람까지 보낸단 말인가.
례조좌랑은 리제마의 심중을 들여다라도 본듯 다시 입을 열었다.
《리공은 대단한 인물이요. 리공께서 임금님의 외숙부이자 중전마마의 제일 큰 총애를 받으시는 리조참판 민대감어르신과 자별한 사이라니 참말 앞날이 창창하오.》
리제마는 흠칫 놀랐다.
그러니 다름아닌 민겸호가 리조참판이 되여 자기 심복을 보냈구나. 민비의 날개가 되여 적수들을 제끼는 선두에서 날뛰던 민승호가 대원군에 의해 폭사당했으니 그의 동생 민겸호가 제 패당의 큰 두목이 되였을것이다. 헌데 민겸호가 왜서 사람을 보냈을가.
례방이 다가와 리제마에게 귀띔하였다.
《사또님! 안에 모실 차비가 다되였소이다.》
리제마는 례조좌랑에게 말했다.
《마침 점심이라 안에 들어가십시다.》
례조좌랑을 앞세우고 동헌방에 들어선 리제마는 내심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상다리가 부러지게 잘 차려낸 음식상은 보지 못했다. 일여덟사람이 둘러앉아도 넉근할 큰 교자상우에 울긋불긋한 음식이 가득하다. 물고기음식도 갖가지이고 산짐승고기음식, 집짐승고기음식도 갖가지이다.
지어는 민겸호네 집에서 본적 있는 료화라는 음식까지 올라있었다.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섞어만든 료화는 유밀과의 한가지인데 주로 궁중에서 내는 별식이다.
례조좌랑이 본궁제사에 참가하였다더니 거기에서 꿍져가지고 온것일가.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인가 례방은 고을거리에 한성의 어느 대감집에서 부엌데기를 하던 녀인이 와 사는데 음식솜씨가 기막히다고 칭찬한적이 있었다.
하여간 자기 상전의 체면이 깎일세라 애쓴 6방아전들의 성의가 엿보였다.
례조좌랑은 당연한 대접이라는듯 스스럼없이 음식상에 나앉았다.
리제마는 음식상이 너무 요란하다보니 혼례식날 큰상에 불려나간 신랑처럼 불편스레 웅크리고 앉았다.
방문이 살며시 열리고 행수기생이 동료기생 하나를 달고 들어왔다.
그들은 깍듯이 절을 차리고서 행수기생은 리제마의 곁에, 다른 기생은 례조좌랑의 곁에 앉았다. 례조좌랑의 입이 가로 째졌다.
《허- 한성기생들도 울고 가겠는걸. 좋아, 좋아.》
기생의 가는 허리를 한팔로 감아안은 례조좌랑은 유식을 뽐내려는지 우쭐해서 말했다.
《한성에서 먼 여기 산골고을에서 진수성찬을 마주하고보니 천하시재 오산(차천로, 1556-1615)이 쓴 <성종의 일화>가 생각나오.》
기생이 례조좌랑의 입에 술잔을 가져다 대며 애교를 부렸다.
례조좌랑은 더욱 우쭐해서 떠들었다.
《하긴 산골사람들이 그런 기이한 일화야 알수가 없지.》
리제마는 례조좌랑의 허세에 입이 쓰거웠지만 《성종의 일화》는 생각해보았다.
성종왕때 어떤 사람이 어느 도에 감사로 나갔다가 승선(어명을 받아 아래에 전하는 벼슬)이 되여 임금을 면대한적이 있었다.
성종왕은 그날 승선에게 그대가 감사로 있을적에 음식대접을 놓고 고을원들의 업적을 평가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고 물었다.
승선은 그렇다고 숨김없이 대답했다.
임금은 기분이 언짢아서 배를 불리는 음식대접이나 받은것을 가지고 어떻게 고을원을 평가할수 있느냐고 책망하였다.
《상감마마! 음식을 차리는 일조차 입에 맞지 않게 하는 사람이 다른 일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이까?》
그만에야 성종왕은 노기가 풀려 《듣고보니 그렇겠소.》 하고 수긍하였다고 한다. …
기생을 껴안고 성종의 일화에 대해 한참 열변을 토하고난 례조좌랑은 제 흥에 겨워 계속 떠들었다.
《마가을에 찾아와서 북관미녀를 끼고 앉아 뜻 통하는 사또와 산해진미를 마주하니 어찌 술맛이 달다 하지 않으리오. 자, 리사또! 마음껏 즐기자구.》
례조좌랑은 제가 주인인듯 큰소리를 쳤다.
그 꼴이 쓰거워 리제마는 빈입을 다시였다.
어쩜 노는 꼴이 저다지나 방자할가. 민겸호의 턱에 붙어 돌아가는 량반자들은 다 저런가. 나이로 보나 벼슬품계를 보나 한참 아래인 작자가…
리제마의 심중을 엿보았는지 행수기생이 그의 손에 술잔을 들려주었다.
리제마는 억지로 술 한잔을 마시고나서 행수기생을 눈여겨보았다.
행수기생의 얼굴에 피기가 도는것을 보니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행수기생에게는 관격만이 아니고 몇가지 잡병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자랐다더니 그래서 잡병에 든 모양이였다. 약을 내주어 그 병을 거의다 고쳤으니 이제야 고운 얼굴이 활짝 피여나는것 같았다.
리제마는 행수기생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진해에서는 《세상에도》집의 모녀가 그의 눈과 귀가 되여주었는데 고원에서는 행수기생이 향청것들과 관가에서 쫓겨나간 이전 구실아치들의 못된짓을 제때제때에 알려주어서 배심이 든든하였다.
향청것들이 마주앉기만 하면 온갖 뒤시비질을 하다못해 나중에는 사또란게 도처에 처첩을 두고서도 부족하여 부인병을 봅네 하고 과부집들에까지 버젓이 드나들며 고을의 풍기를 문란시킨다는 말까지 내돌렸다는데 정말 몹쓸놈들이였다. 하긴 몹쓸놈이니 그런 몹쓸짓밖에 꾸며낼 일이 있겠는가.
《리사또!》
례조좌랑이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였다.
《민대감으로 말하면 리조참판이라지만 실은 조정의 제일가는 큰어른이지요. 민대감앞에선 리조판서든 형조판서든 다 설설 긴단 말이요. 삼정승도 그렇지요.
그러니 리사또야말로 인복을 타고났단 말이요. 민대감이 아니였다면 리공이 어떻게 진해현감에 고원군수를 할수 있었겠소?》
례조좌랑은 눈이 깨깨 풀려가지고서도 기생을 껴안고 그냥 지절댔다. 꼴이 술과 계집밖에 모르는 소인배 같았다.
《리사또! 리사또에 대한 민대감의 기대가 몹시 크오. 우린 한집안이라 내가 온건… 리사또가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쌀 오… 오천… 석, 오천석이 당장 소용되오.》
리제마는 꿈을 꾸는것 같았다. 저 사람이 누굴 놀려보자는건가. 아니면 취중에 헛소리를 줴치는걸가. 쌀 오천석이 뉘 집 아이 이름인가 하나부지. 쌀 오천석이면 군사 천명을 한해 먹여살릴수 있다.
리제마는 이 자리에 더 앉아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랑! 그댄 취했으니 맑은 정신에 다시 마주앉기요. 얘들아, 이 어른을 잘 돌봐드려라.》
리제마는 팔을 휘두르며 만류하는 례조좌랑을 방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섰으나 숨막히도록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세상에 큰도적이 있다 해도 이런 큰도적도 있는가. 이제 보니 민겸호 그놈이 여간 어벌찬 큰도적이 아니다. 나중에는 나라까지 삼켜먹자고 할 큰도적이다. 어떻게 한다? …
다음날 아침 해가 하늘공중에 높이 떠올라서야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던 례조좌랑이 깨여났다.
밤새 쌀 오천석의 일로 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리제마는 마침내 결단이 서서 관속들을 삼문밖에 대기시켜놓고 대청마루로 례조좌랑을 불러냈다.
이제는 안면을 익혀 허물없는 친구로 여겼던지 례조좌랑은 인사말도 없이 리제마의 곁에 와 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산골대접치고는 궁색하지 않구만. 계집들이 착착 감겨 얼마나 꼬리를 잘 치는지 데리고놀 맛이 있었소. 리사또! 내게도 인심을 써주구려. 밤새 내 시중들던 고 계집을 내주면 그 신셀 잊지 않겠소.》
리제마는 시시껄렁한 수작에 눈살을 찌프렸다.
《그건 그렇고, 어제 취중에 내 하자던 얘길 다 못한것 같은데… 민대감께선 리사또를 고을에 두기엔 아까운 인물이라고 하였소. 내의원의 제조(우두머리)자리나 호판, 병판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하셨소.
옛말에 인정은 바리로 싣고 진상은 꼬치로 꿴다고 했는데 민대감이 믿어줄 때 그 뜻을 따르면 립신양명을 할수 있소. 그러니 쌀 오천석을 내주겠지요?》
리제마는 잠시 대답을 피했다.
례조좌랑의 말대로 민겸호의 욕심을 채워준다면 진짜 6조판서로까지 될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쌀 오천석이면 당상관벼슬도 넉근히 살것이다.
리제마는 민겸호의 검은 배속을 좀더 들여다보고싶었다.
《민대감은 그 많은 쌀은 해선 뭣 하려 한다오?》
례조좌랑은 천진한 물음이라는듯 껄껄 웃었다.
그는 시골량반의 생각이 기껏 그렇지 뭐 하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조정을 주무르자면 그까짓건 새발의 피요. 중전마마가 하루에 써버리는 재물이 얼만줄 아오? 자그만치 만냥이야, 만냥! 병약한 세자의 무병을 바래 전국의 명산대찰들에서 비는 제사에만도 수십만냥이 들지요. 그 많은 돈을 대자니 민대감이 오죽이나 고달프겠소?》
리제마는 억이 막혔다.
수군에는 신식병선 한척 변변히 없고 군사들마저 굶주리는데 국모라는 녀인은 방종과 방탕을 일삼아서 강물처럼 돈을 퍼쓰니 이래가지고서야 나라가 일떠설수 있는가.
《허- 참말 딱하오. 우리 고을의 쌀은 한성으로 내여가지 못하게 되여있는줄을 모르지 않겠는데.》
《거야 왜 모르겠소. 국법에 고원쌀은 북관의 군량으로만 쓰게되여있다는걸! 허나 국법도 조정이 만든것인데 그런것 가지고는 념려마오.》
리제마는 될수 있으면 말로 민겸호의 청을 물리칠가 해서 입씨름에 말려들었다.
《쌀 오천석을 한성으로 끌고가자면 배길로는 안되는것이고 륙로로도 엄청나게 품이 많이 들겠는데…》
례조좌랑은 씩 웃었다.
《별걱정을 다하오. 리사또! 쌀만 내놓소. 그럼 내 말 한마디에 랑성포의 병선들이 덕지강으로 밀려올거요. 그 쌀을 병선들에 싣고 원산진에 가면 얼마든지 돈으로 만들수 있소.》
《어떻게?》
《챠, 이렇게 어둡다구야. 원산진앞바다엔 조선쌀을 사러 온 왜나라장사배들이 가득하오. 왜인들이란 쌀이라면 오금을 못쓰오.》
리제마는 하마트면 례조좌랑의 귀뺨을 후려칠번 하였다.
나라의 방곡령까지 시골아낙네의 푸념소리처럼 여기는 민씨네야말로 진짜 나라를 망쳐먹자고 달려드는 역신의 무리가 아니고 뭔가.
리제마는 참을인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할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번 더 말씨름을 하였다.
《허- 아쉽게도 민대감의 분부가 한발 늦었소구려. 난 이미 조세가 얼마라고 수자를 눌러서 관찰사대감에게 아뢰였단 말이요.》
《앗따, 사흘도 못 가는게 조정정사이고 고을정사인데 별걸 다 가지고 걱정하오. 올해 고원에 풍작이 들었다는데… 사또가 쥐를 보고도 노루라고 하면 6방관속들모두가 노루라 하겠는데 너무 우는소리 마오.》
리제마는 말로는 통할수 없다는걸 깨달았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리제마의 큰소리에 삼문밖에 대기했던 관속들이 우르르 동헌뜨락으로 밀려들어왔다.
리제마는 대청마루를 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벽에 걸려있던 장검을 벗겨들었다.
제포수군첨절제사가 리별을 슬퍼하여 내준 장검이였다.
리제마는 장검으로 례조좌랑을 가리키며 호령했다.
《이 역신을 묶어내려라!》
웬일인가 하여 리제마를 쳐다보던 례조좌랑은 깜짝 놀라 와들와들 떨었다.
라졸들이 대청마루로 달려와 례조좌랑을 끌어내렸다.
정신이 들었는지 례조좌랑이 악이 나서 호통쳤다.
《이게 무슨짓인고? 감히 촌것들이 조정충신을 욕보여?》
리제마는 성이 나서 발을 탕- 굴렀다.
《뭐가 어째? 국법을 탕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내여 왜놈들에게 섬겨바치려는 너같은자도 조정충신이야? 네가 감히 무엄하게도 민대감을 모해해? 뭐, 민대감이 쌀 오천석을 빼다가 왜놈들에게 바치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만장앞에서 그렇다고 떠들어라.》
형틀에 묶이운 례조좌랑은 자기가 진퇴량난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입이 열둘이래도 변명할수가 없다. 만장앞에서 사실을 토설한다면 이편과 저편에서 두 화살을 면할수 없게 된다.
고원군수에게 쌀을 내라고 한 사람은 민겸호인데 뜻밖에 쌀을 내주어야 할 당사자가 저렇듯 무섭게 나오니 만일 사실그대로 발설한다면 당장 민가네의 눈밖에 나서 신세를 망칠수밖에 없다. 이런 땐 그저 민가의 비행을 혼자 안고 넘어져야 후날 그 상전의 비호를 받아 다시 출세할수 있다.
리제마는 한성에서 멀리 떨어진 고을에 앉아 도적의 왕초 민겸호와 맞서는것은 맨발로 바위치기인 까닭에 민가네의 심부름군이라도 꼼짝 못하게 눌러놓고 이 사실을 조정에 폭로하여 적수들을 혼내우고싶었다.
책실은 마루바닥에 종이말이를 펼쳐놓고 문초하는 전말을 적어내렸다.
리제마는 례조좌랑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너는 국록을 타먹고 사는 신하로서 충성은 못할망정 불의한 길로 사람들을 유인하려 했다. 진실도 도리에 맞아야만 리행될수 있다고 하였는데 진실도 아닌 불의한 일로 누구를 꾀일수 있단 말인가. 앉아야 할 지위가 아닌데 임금의 은총을 받아 그 지위에 올랐으면 백골난망 성덕을 잊지 말고 몸바쳐 일할 대신 어느 대감의 분부라고 거짓소리를 꾸며내여 나라에 해를 끼치려 했으니 너는 이 하나만을 가지고도 죽음을 면할수 없다. 네 죄를 시인하느냐?》
례조좌랑은 머리를 떨구었다.
《여봐라! 제입으로 지은 죄를 토설할 때까지 되우 쳐라!》
쌀 오천석을 고원사람들에게서 앗아내여 왜놈들에게 팔아먹으련다는 말을 들은 라졸들이 분이 나서 장형을 휘둘렀다.
례조좌랑은 장형 몇대에 혀를 빼물고 애걸했다.
《리사또! 용서하여주사이다. 살려주소.》
리제마의 생각은 착잡하였다.
이랬든저랬든지간에 오늘로써 벼슬길은 동강날것이다. 열두번 죽었다 살아난대도 들어줄수 없는 민겸호의 욕심을 거역해도 파직이요, 그놈의 죄행을 례조좌랑의 입을 빌어 폭로해도 끝장이다.
하여튼 내친걸음이고 또 한번은 당할 판인데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어서 우아래로 무리지은 탐관오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리라.
《토설할 때까지 되우 쳐라!》
사정없이 떨어지는 장형에 례조좌랑은 질겁하여 아우성쳤다.
《리사또! 인정하오이다. 내가 죽을죄를 졌소이다. 난 쌀 오천석을 빼내다가 왜인들에게 팔아치우려고 했소이다.》
리제마는 손을 쳐들었다.
라졸들이 매질을 멈추자 책실이 문초장을 들고 례조좌랑에게 다가가 죄를 인정한다는 손도장을 받아냈다.
리제마와 매맞아 축 늘어진 례조좌랑을 번갈아 보는 아전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어려있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임금의 허락이 없이 조정신하를 때릴수 있는가 하는 근심때문이였다.
리제마는 즉시 책실에게 문초장을 한장 더 만들게 한 다음 형방에게는 문초장을 가지고 급히 한성으로 올라가 그것을 사헌부에 바치게 하였다.
병방에게는 문초장을 가지고 례조좌랑을 함흥감영으로 압송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