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지루한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리제마는 날이 밝자 밥을 먹고 동헌을 나섰다.
오늘도 마을들을 돌아볼 생각이였다.
천천히 동헌뜨락을 거닐며 어느 마을쪽으로 가볼가 하고 궁냥하는데 의봉이와 기달이 말을 끌어왔다.
《오늘은 좀 쉬게. 날마다 병자들을 찾아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예.》
리제마는 곧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였다. 쉬라고 해서 쉴 제자들이 아니다. 거처지에 들면 약을 짓고 밖에 나서면 병치료에 전심하는 제자들이다.
리제마는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는 동산마루로 거슬러오르고있었다. 좀 있으면 관속들이 나올것이다.
국법에 관리들은 해가 길 때면 묘시(5~7시)에 출근하였다가 유시(17~19시)에 퇴근하며 해가 짧을 때는 진시(7~9시)에 나왔다가 신시(18시 30분~19시 30분)에 들어가도록 되여있다.
요즘은 봄철이니 아직 낮이 짧아 진시에 아전들이 관가로 나와야 한다.
문득 《아뢰오-》 하는 웅글은 소리가 삼문밖에서 들려왔다.
활짝 열려진 삼문밖의 퇴돌아래에 누군가 엎드려있었다.
그러니 오늘도 아침부터 송사로구나.
어제는 첫아침에 중평마을의 늙은이가 찾아와 하소연을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리부자가 자기 손자 하나를 빚값이라며 끌고갔는데 3년전에 꿔다 먹은 피쌀 두말에 그럴법이 있느냐며 눈물을 흘리였다.
마을에 나가 리부자의 빚문서를 까보니 거기에는 피쌀 두말이 아니라 기장쌀 두섬 두말이라고 씌여있었다. 기장쌀 두섬 두말을 3년안에 갚지 못하면 아이 하나를 종으로 내놓겠다는 서약서에 늙은이의 손도장까지 박혀있었다.
마을사람들에게 알아보니 리부자가 지금껏 남에게 기장쌀은커녕 피쌀도 두말이상은 꾸어준적이 없다는것이였다.
리제마는 까막눈인 농사군들을 속여 거짓계약서를 꾸며낸 리부자의 죄를 밝혀내고 엄히 다스렸다.
오늘은 어떤 상소를 하려고 아침일찍 사람이 찾아왔을가.
대문으로 다가가니 퇴돌아래에 엎디여있는 사람은 관평마을 리정이였다.
마을에서 신망이 높다기에 새로 리정으로 앉힌 사람이였다. 읍에서 서쪽으로 백수십리나 먼 마을에서 아침일찍 찾아오다니.
《일어나게.》
리정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서서 대꾸했다.
《마을에 분쟁이 생겨 어제 저녁 읍에 와서 잤소이다.》
《무슨 분쟁인가?》
《소인은 두해전에 관평마을로 이사를 가다보니 아직 마을실정에 어둡소이다. 마을의 백부자와 관가에 조세를 바치는 농군 세사람이 밭을 가지고 다투는데… 농군들은 백부자가 해마다 자기들의 밭을 한이랑씩 빼앗아 가졌다고 들이대고 백부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우기는데… 소인으로서는 판결해주기 어렵소이다. 그래서…》
《알만 하오. 그런 일이라면 어찌 천리인들 마다하겠소.》
리제마가 말을 끌고 길에 나서니 방금 나온 아전들이 꿇어엎드려 아침인사를 하였다.
《다들 일어나게. 형방은 나를 따르고 다른이들은 자기 일을 보게.》
리제마는 형방과 리정을 뒤에 달고 서향길을 다그쳤다.
지세가 갈수록 험해지고 올리막이 많아서 해가 서녘으로 기운 무렵에야 관평마을로 들어섰다.
별나게도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룡흥강가에 마을이 자리잡았는데 백산, 강계산, 제비산 같은 큰 산들을 배경으로 하고 강줄기를 따라서 전답이 펼쳐져있었다.
리제마는 하루밤을 쉬고 일을 보았으면 하는 리정의 청을 물리쳤다.
어서 판결을 내려주어 사람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인차 리정이 백부자와 농사군들을 밭으로 데려왔다.
명주바지저고리를 입은 몸집 좋은자가 백부자일것이고 누덕누덕 기운 베옷입은 농사군들이 분쟁을 일으킨 당자일것이다.
그들은 리제마를 보고 황급히 땅바닥에 꿇어엎드렸다.
리제마는 다시한번 밭을 둘러보았다.
분쟁거리가 된 밭은 강변에서 시작하여 자그마한 야산중턱에 이르렀는데 한이랑의 기장이 꽤 길어 백장(한장은 3.03m)은 실히 돼보였다.
이랑을 잘 지은 밭에서는 구수한 흙내가 풍겨왔다.
리제마는 눈길을 돌려 궁둥이가 실한 백부자에게 물었다.
《네가 이 밭 주인이겠다?》
《그… 그렇소이다.》
백부자는 개기름이 질벅한 얼굴에 아첨기를 가득 담고 리제마를 쳐다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백부자부터 고하라.》
《예, 소인네 밭은 강뚝에서 시작하여 두결인데 3등전입지요. 그리고 저 세사람의 밭은 소인네 밭과 이어서 산자락에까지 붙어있는데 꼭같은 두결이오이다.
소인은 병인년에, 그러니까 열세해전에 황갑동이한테서 이 밭을 샀소이다. 그런데 다음해 저 세사람이 와서는 관가의 허가가 있었다면서 소인네 밭을 이어 땅을 개간했소이다.
그때는 이우로 온통 잡덤불투성이였소이다. 소인은 왜 진작 그 땅을 일굴 생각을 못했던가 후회를 하고 다음해부터 한이랑씩 강쪽으로 밭을 일구어나갔소이다. 그렇게 해오기를 10년이라 오늘날엔 열이랑이 더 늘어났소이다.
그런데 이런 생벼락이 어데 있겠소이까? 저 세사람이 소인의 밭을 탐내서 서로 짜고들어 열이랑을 제것이라며 내놓으라 하니 실로 통분하기 그지없소이다.》
리제마는 농사군들에게 물었다.
《이번엔 그쪽에서 이실직고하라.》
세사람은 서로 마주보더니 그들중 나이많아보이는 늙은이가 대꾸했다.
《사또님! 언감생심 소인네들이 세도가 등등한 백부자의 밭을 탐내여 거짓고소를 하겠소이까. 소인네들은 해마다 백부자가 한이랑씩 밭을 올리갈아 제것으로 차지하는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면서도 뻐꾹소리 한번 못했소이다. 관가와 친한 백부자에게 접어들다가는 거꾸로 어진 사람을 험구했다는 죄에 걸려들가봐서였소이다. 하는수없이 벙어리 랭가슴 앓듯 하면서 백부자가 한이랑을 빼앗으면 소인네들은 산쪽으로 한이랑을 일구고 그렇게 하기를 10년에 이르렀소이다. 소인네들은 관가에서 백성들의 묵은 원한을 풀어준다기에…》
《알겠다.》
리제마는 천천히 발걸음을 가로질러간 밭최뚝을 따라 옮기였다.
말을 들어보면 량쪽의 주장이 다 그럴듯해서 선자리에서 판결해주기 어려웠다.
땅이라… 땅은 농사군에게만 소중한것이 아니다. 땅이야말로 자자손손 물려주어야 할 나라의 소중한 재부이다. 땅에 피땀을 묻고사는 농사군들은 그 땅을 가지고 롱간을 부릴줄 모른다.
어떻게 해야 땅에 진심을 바치는 농사군들이 옳다는것을 보증하겠는지…
하여간 무슨 흔적이 있을것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도 흔적이 남기마련인데 농사군들의 자취가 생생한 땅에 흔적이 없을리는 만무하다.
밭이 끝나는 산중턱에까지 밭최뚝을 따라서 올라간 리제마는 다시 돌아내려오면서 찬찬히 흔적을 더듬었다.
농사군들의 말대로 한해 한이랑씩 밭을 올려 개간한 흔적은 뚜렷했다. 밭최뚝이 끝나가는 웃쪽일수록 새로 추어낸듯 한 돌무지들이 그대로 있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전에 추어낸 돌무지들은 흙에 묻혀 걷기에 지장이 없어보이였다.
백부자네 밭최뚝에서는 돌무지 하나 찾아볼수 없었다. 강변에는 돌이 더 많은데 왜서 백부자가 새로 일구었다는 강뚝쪽의 밭최뚝에는 돌무지가 없을가.
리제마는 다시 밭최뚝을 따라 밭웃쪽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불쑥 발에 걸채는것이 있었다.
돌부리겠지 하고 무심히 굽어보는데 나무그루터기였다.
둘레가 두뽐은 실히 잘되는 나무밑둥을 보았을 때 리제마는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리제마는 뾰족한 돌멩이를 찾아쥐고 나무밑둥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형방과 리정이 달려와 도와주었다.
서너치 깊이로 파헤쳐보니 뽕나무밑둥이였다. 뽕나무라면 누군가가 심었을것이다. 아마 여름철에 밭일을 하다가 쉬는 그늘나무로 심었을것이다. 길가의 그늘나무로는 크게 자라는 느티나무가 좋고 밭머리의 그늘나무는 키가 크지 않은 뽕나무 같은것이 좋다.
리제마는 짚이는것이 있어 뽕나무밑둥으로부터 10이랑을 우로 세여갔다.
열한번째 밭이랑에 멈춰선 리제마는 백부자를 불렀다.
그때까지 흠흠해있던 백부자는 눈이 휘둥그래가지고 뛰쳐왔다.
《여기까지가 네 밭이렷다?》
《그… 그렇소이다.》
이때라고 리제마는 백부자에게 들이댔다.
《너는 왜 뽕나무를 베여버렸는가?》
《베… 베여버리다니요?》
형방이 쩔쩔 매는 백부자를 몰아댔다.
《사또님께 바로 아뢰이지 못할가?》
《예, 예, 그… 그… 그건…》
리제마는 쓰겁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대신 말해줄가? 너는 일부러 네 땅이 끝나는 밭머리에 있던 뽕나무를 베여버렸다. 너는 저 사람들이 밭을 개간할 때 벌써 밭을 야금야금 떼여먹을 나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후날 말썽이 일어나면 뽕나무가 우환거리라고 여겼던거다. 어찌 그뿐이랴. 넌 저 사람들이 새로 일군 밭쪽의 밭최뚝에 무져있는 돌무지를 보지 못했느냐. 너도 저 사람들처럼 새로 밭을 일구었다면서 네 밭쪽에는 왜 밭에서 추어낸 돌무지가 없는거냐. 그래도 사실을 바로 아뢰이지 못할고?》
백부자는 발명했댔자 죄만 커질것 같아 리제마의 발치앞에 꿇어엎드렸다.
《사또님!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용서해주사이다.》
리제마는 나직이 물었다.
《밭 한이랑에서 해마다 곡식이 얼마씩 났는지 바로 아뢰여라.》
완전히 압도당한 백부자는 대답하기에 급급했다.
《보통 열아홉되는 났소이다.》
《좋아, 백부자는 듣거라. 너는 저 세사람들에게 이제 당장 네가 빼앗아가졌던 밭 열이랑을 넘겨주어라. 알겠는가?》
《예, 예.》
《그리고 일천 마흔다섯되, 다시말해서 열섬 너말 닷되의 곡식을 내여주어라.》
백부자는 눈이 희뜩 뒤집힐듯 하였다.
《사또님! 소인이 그렇게 많은 곡식을 내주어야 하오이까?》
리제마는 엄하게 소리쳤다.
《너는 셈도 셀줄 모른단 말이냐? 생각해보아라. 열번째 이랑은 네가 지난해 빼앗았은즉 한해 부쳐먹었다. 그러니 한이랑으로 되지만 아홉번째 이랑은 두해 부쳐먹었기에 두이랑으로 된다.
여덟번째 이랑은 세해 부쳐먹었으니 세이랑으로 된다. 이렇게 셈을 세여나가면 마지막이랑은 10년이나 부쳐먹어 열이랑으로 되는거다.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쉰다섯이랑이 된다.
너는 네 입으로 한이랑에서 한해 열아홉되의 곡식을 걷어들였다고 했다. 쉰다섯이랑에 열아홉을 곱하면 그것이 바로 네가 뱉아놓아야 할 곡식이로다.》
백부자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너는 래일로 곡식을 전량 저 사람들에게 내주어라. 만일 조금이라도 늦잡으려 한다면 그땐 형벌로 엄히 다스릴줄 알어라.》
《예, 예, 분부대로 따르겠소이다.》
백부자는 념불 외우듯 정신없이 뇌이였다.
리제마가 사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리제마는 나머지 일감을 리정에게 맡기고 귀로에 올랐다. 돌아갈 길은 멀고 험했지만 백성을 위해 걷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