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고원관가에 려장을 푼지 여러날이 흘렀건만 리제마는 동헌밖을 나설줄 몰랐다.
임지에 지체말고 가라는 어명을 전달받은터여서 황도연이 있는 한성이 아니라 김해, 경주, 강릉, 문천을 거치는 동해가의 제일 곧은 역참길로 걸음을 재촉하여 고원에 온 리제마였다.
천수백리나 되는 먼길을 열흘만에 왔다 하면 사람들은 혀를 찰것이다.
그 먼길을 다그쳐오면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것은 첫 정사를 어떻게 떼겠는가 하는 그것이였다.
진해에서 겪은것을 보아도 첫시작을 잘 떼야 앞일을 마음먹은대로 펴나갈수 있다.
과연 고을실정은 어떨는지…
부임지에 들어서니 새 군수가 부임되여오기를 기다렸다면서 책방(원에게 종속되여 문서와 사무를 맡아보는 아전)이 고을어귀에서 맞아주었다.
리제마는 진해현감을 하면서 책방을 두지 않았다.
작은 고을에서 문서놀음까지 남의 손을 빌려 하고싶지 않아서였다.
책방은 신관사또의 행차가 너무도 단출한데 놀라 입을 짝 벌리였다.
나라법에 4품관의 행차는 말이 세필에 따라다니는 수종군이 5명이다. 그건 다 말로 하는 법이고 실지로 큰 고을의 군수행차는 앞뒤로 전배후배사령까지 두고 길이 미여질 정도로 마필과 수종군들이 따라다닌다.
허나 리제마는 수종군이라고는 사내 하나에 녀인 하나가 전부였다. 정배가는 량반의 행차와 무엇이 다른가.
리제마는 오는 도중 한성소식도 그렇고 보다는 처가에서 기다릴 처자를 그리는 기달의 마음을 헤아려 그를 한성으로 보냈던것이다.
책방의 안내를 받아 관가에 들어선 리제마는 인사를 차리려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원, 이다지도 관속이 많다니…
국법에 큰 고을일지라도 아전을 22명미만으로 두게 되여있다.
진해에서는 18명 두라는 아전도 많아 그 수의 절반을 데리고 정사를 하였는데 고원관속은 쉰나문명이나 되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는데만도 퍼그나 시간이 걸렸다.
호장(호방의 우두머리), 리장(리방의 우두머리), 수형리(형방의 우두머리), 공방, 례방에 이어 호리(호방의 아전), 호적색리(호적을 맡은 아전), 도창색리(조세를 관할하는 아전), 입번형리(형방의 아전), 감옥색리(옥을 맡은 아전), 군기색리(군기문건을 다루는 아전), 군안색리(군사를 맡은 아전), 창리(창고를 맡은 아전)…
어찌 그뿐이랴.
향청의 우두머리 좌수라는 량반이 인사를 차리자 그뒤로 좌우별감들, 도관, 감관, 창감이라는 사람들이 줄레줄레 절을 하였다.
다음날에는 리정들이 찾아와 인사를 한다는데 수십이나 되였다.
리제마는 고원이 크긴 크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하긴 고원은 삼수, 문천, 단천, 함흥과 함께 함경도적으로 5명밖에 안되는 군수가 다스리는 큰 고을이다.
리정들이 물러가자 좌수가 또 향청의 량반자들을 주런이 달고와서 한나절이나 시간을 빼앗았다.
좌수는 이전 군수들의 잘못을 늘어놓았는데 불만이 보통이 아니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근 몇해어간에만도 여러명의 군수들이 바뀌였는데 거의가 파직이라는것이였다. 구관사또 역시 한성에 불려가서 파직되였다는것이다.
해마다 군수를 번드는 군졸 바꾸듯 했으니 어찌 고을일이 바로 될수 있으랴.
좌수는 이전 군수들이 하나같이 무식하고 탐욕스러워서 오로지 재물 모으는 일밖에 몰랐다고, 그만큼 향청에서 간했건만 리청의 간악한 아전들을 끼고 백성들의 등가죽을 벗기다가 우아래로 원망을 사서 망했다고 사설을 늘어놓았다.
리제마는 고원이 진해와 사정이 다르다는것을 간파했다.
진해현은 웅천군에 소속된 작은 현이다보니 6방아전들이 일을 보는 리청만을 두었다.
그러나 고원은 큰 고을이여서 옛적부터 향청이 있었다.
향청은 고을의 토착량반들이 모여 사또의 정사를 뒤받침해주는 류향소이다.
향청의 우두머리는 향장이라고 하는 좌수인데 그는 고을원이 없을 때 사또의 직분을 대신하고 고을원이 있을 때에는 고을의 정사와 아전들의 일에 참녜하면서 리방과 병방의 공무까지 관할하게 되여있다.
좌수밑에 있는 좌별감은 호방과 례방을, 우별감은 형방과 공방의 일을 관할하며 도관, 감관, 창감은 그시그시 좌수의 분부를 받아 6방의 어떤 일을 분담하여 관할한다.
향청은 이처럼 고을원의 정사를 도우면서 아전들의 전횡을 막고 이와 동시에 백성들에게 유학을 주입하고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하는 토착량반들의 거처지였다.
그런데로부터 새로 부임되여오는 사또들은 임지의 실정에 어둡다는데로부터 조세를 걷어들이고 군역을 지우는 등 일체 정사를 보고받고 결론만 주면서 그 실행은 향청에 맡기기가 일쑤였다.
향청의 량반들은 리청의 아전들을 자기 수중에 넣고 고을원까지 마음대로 움직이려 했다.
향청의 무리가 물러가자 리청의 아전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이전 군수들이 부임되여오는족족 자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파면된것은 다 향청때문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아전들은 향청것들이 우에 뢰물을 듬뿍 먹이고 토관직벼슬을 산 하나같이 음흉하고 야심많은자들이여서 이전 군수들이 그들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나라법에는 전국적으로 평안도의 몇개 고을과 함께 함경도에서는 영흥(금야), 회령, 경원, 종성, 온성, 부령, 경성, 경흥고을들에만 토호들에게 토관직벼슬을 주게 되여있다.
고원은 리태조의 고향인 영흥부와 이웃한 고을이여서 별도로 토관직을 내주었는가.
하긴 감사자리까지 팔고사고하는 판에 그까짓 명색에 불과한 토관직벼슬을 사는것쯤이야 애들장난에 불과한것이다.
아전들은 좌수는 토관직벼슬에서 으뜸가는 정5품의 통의랑을, 좌우별감들은 종6품인 봉직랑의 고신장을 샀다면서 향청이 고을원이 직접 맡아보는 리청일에 간참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눌러놓아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청에 일리가 있었다.
원이 자기 주견대로 정사를 보려면 리청이 향청에 눌려있으면 안된다. 고을원은 향청이 없이도 고을을 다스릴수 있지만 리청이 없이는 곤난하다. 더우기 리청과 향청이 제멋대로 날치면 녹아나는것은 백성들이다.
아전들의 말을 들어보면 리청의 일은 비교적 째인편이다.
고을법에 6방아전들은 향청에서 고을원에게 추천하게 되여있다. 그렇게 추천되여 6방아전이 된 그들이 《배은망덕》하게 향청에 등을 돌려댄것은 왜서일가.
아전들을 내보내고나서 생각해보니 짚이는것이 있었다. 향청과 리청이 앙숙지간이 된데는 틀림없이 리득을 놓고서일것이다. 백성들에게서 앗아들이는 재물을 둘러싸고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는 개싸움이 그들사이를 절치부심하는 사이로 버그러지게 하였을것이다.
탐욕스런 무리일수록 리득을 다투는 싸움을 치렬하게 벌리기 마련이니까.
조정에서 부임되여오는 군수들은 량반행세를 하면서 도적재물을 한몫 크게 차지하려는 향청것들을 미워할수밖에 없다. 그만큼 군수의 입으로 들어가는 몫이 작아지니까.
군수가 향청것들을 미워하니 향청것들은 힘을 합쳐 뢰물을 먹이고 삶아놓은 함흥감영의 벼슬아치들에게 군수의 잘못을 고발하여 파직시키도록 했을것이다.
향청을 서뿔리 다치다가는 도리여 봉변을 당할수 있다. 토관직을 사가진 토호들은 아전과 다르다.
아전들이 량반을 고발하면 역모경우를 내놓고 자식이 아비를 고발한 죄목에 걸려 극형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토호들은 명색이 량반이여서 고을원쯤은 얼마든지 고발할수 있다.
그러다보니 세력이 약하거나 손탁이 세지 못한 이전 군수들이 향청과 다투다가 파직되였을것이다. 어떻게 하면 향청을 눌러놓고 정사를 뜻대로 해나갈수 있을가.
이런 생각으로 리제마는 동헌밖을 나가지 않고 며칠째 방에만 박혀있었다.
해가 서녘으로 기울무렵인데 문밖에서 기척소리가 나고 《선생님!》 한다. 의봉이였다.
아침에 나간 의봉인데 점심이나 얻어먹고 다니는지…
고원에 짐을 풀어놓은 다음날부터 의봉은 고을형편을 알아본다며 동분서주한다.
《들어오게.》
방문이 열리고 의봉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오늘은 팔봉산쪽에 나갔댔소이다. 백성살이랑 농사형편이랑 다른 마을처럼 눈이 딱 감기오이다.》
그럴것이다. 해마다 군수 하나씩 내려와서 뜯어갔겠으니 백성살이가 거덜날수밖에…
농사도 그렇다. 향청, 리청이 승벽내기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겠으니 무슨 재미로 농사군들이 농사에 열성을 내여 일하겠는가.
게다가 고원은 진해와 달리 춥고 지세도 높고 산이 많아 논밭이 적은데 그나마 돌투성이에 척박하여 곡식이 잘되지 않는다.
《선생님! 여긴 별나게 길목마다 라졸들이 지켜서서 오고가는 행인들의 보짐을 뒤지고 낟알이면 피쌀, 좁쌀 가림없이 모조리 털어내오이다.》
리제마의 볼편이 씰룩거렸다.
《그건 왜?》
《방곡령을 어긴 죄라 하오이다.》
《방곡령?》
분이 나서 어성을 높였던 리제마는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무릎을 쳤다.
《그렇지! 이젠 됐다.》
의봉은 스승의 속을 알수 없어 눈을 깜빡거렸다.
《이 사람! 예로부터 도적은 뒤로 잡으라고 했겠다?!》
의봉은 영문을 몰라 부담짝을 뒤지는 리제마를 지켜보았다.
부담짝에서 허줄한 두루마기를 꺼내든 리제마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제꺽 헌옷으로 갈아입게. 그리고 을순이에게 기장쌀 스물댓근을 자루에 담아달래서 망태기에 넣어오라구. 이 일은 일체 다른 사람이 몰라야 하네.》
《선생님! 도대체…》
《이제 알게 돼. 마침 해가 떨어질 때라 잘됐어.》
의봉은 점차 깨도가 되는지 싱글벙글하며 방을 나섰다.
어슬녘에 동헌의 뒤문으로 은밀히 나가는 두사람이 있었다. 둘 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였는데 바지저고리차림의 앞선 사람은 꽤 묵직해보이는 망태기를 어깨에 메였고 허줄한 두루마기차림의 뒤따르는 사람은 등이 좀 굽었다.
그들은 부자지간이 아니면 적어도 한동네에서 오는 젊은이와 늙은이로 보였다.
두사람은 큰길에 나서자 고개를 수굿하고 좀 빨리 걸었다.
앞선 사나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기에-》
《또또!》
《이런 실수라구야. 아버님! 저기 저앞에 라졸놈들이 장승처럼 버티고 선게 보이지요?》
《보인다. 좀더 가다가 저놈들앞에 거의 이르거든 넌 갑자기 돌따서서 저아래로 통하는 소로길로 뛰거라. 뛰되 너무 빨라도 안되고 너무 느려도 안된다.》
《알겠소이다.》
의봉의 뒤를 따르는 리제마는 이제 벌어질 광경을 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까짓것, 바라는걸 이룰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광대놀음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옛적에 박문수란 사람이 유명해진것은 그가 백성살이에 기여를 해서도였지만 그보다는 암행어사시절에 광대놀이같은 아슬아슬한 일을 잘 꾸며가지고 사람들을 해친 범인들을 꼭꼭 잡아냈기때문이 아닌가.
《아버님! 라졸놈들이 우릴 지켜보고있소이다.》
의봉의 흥분한 목소리에 리제마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몇걸음 더 가다가 엉거주춤해 섰거라. 그러다 놀란듯이 홱 돌아서서 뛰거라.》
《예.》
의봉의 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그 다음 잠시 서서 두리번거리더니 돌아서며 소리쳤다.
《아버님! 라졸들이예요.》
리제마는 어깨에 멘 망태기를 두손으로 쥐고 냅다 달아빼는 의봉이의 뒤를 휘청대며 따랐다.
《야! 이놈들아, 게 섰거라. 서지 못할가?》
드디여 라졸들에게 걸려든것이였다.
쿵쿵쿵! …
잦은 발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것을 보아 라졸들이 다우쳐 따라온다.
리제마는 얼핏 뒤를 돌아보았다. 방망이를 손에 든 라졸 두 녀석이 산토끼를 쫓는 사냥개처럼 겅중겅중 뒤쫓아오고있었다.
의봉이 소리쳤다.
《아버님! 빨리요.》
리제마는 라졸녀석들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대꾸했다.
《이녀석아! 어디 다리가 말을 듣느냐?》
리제마가 소로길을 들어서서 얼마 가지 못했는데 등뒤에서 역한 술내에 절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어깨박죽으로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아이쿠!》
리제마는 라졸녀석이 후려친 방망이에 얻어맞고 길에 꼬꾸라졌다.
《요 쌍놈의 두상태기, 뛰여야 벼룩이란걸 몰라?》
그녀석은 쓰러진 리제마의 덜미를 부여잡고 씨근벌떡거렸다.
《아버님!》
의봉이 달려와 리제마를 몸으로 덮었다.
《그럼 그럴테지. 엄지를 잡으면 새끼도 잡게 되는게 바로 사냥이란 말이야. 흐흐흐.》
다른 라졸녀석이 헐썩이며 의봉이의 어깨에서 망태기를 벗겨냈다.
《아이구, 나리님들! 그것만은 안되오이다.》
리제마는 라졸녀석의 팔에 매달려 애원했다.
《요놈의 두상이 륙모방망이맛을 설친가부지?》
그놈은 또 리제마의 등을 호되게 내리쳤다.
《어이쿠-》
리제마는 또다시 길바닥에 쓰러졌다.
《이보게, 이걸 보라구. 또 쌀이야. 오늘은 참말 재수가 좋은데. 깨끗하게 잘 쓸은 기장쌀이 또 생기구.》
한 녀석이 탄성을 지르자 다른 녀석도 어디 보자며 망태기를 안아들었다.
《히야! 이거 서른근이 잘되겠는데. 좋아, 좋아.》
리제마는 두 녀석의 발치앞에 엎드렸다.
《나리님들! 가긍한 촌늙은일 불쌍히 여겨주사이다. 래일이 바로 소인의 장손아기가 태여난지 초이레되는 날이오이다. 그러니 빈손으로야 아기를 보러 갈수 없지 않소이까?》
《초이레?! …》
두 녀석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초이레라는건 《3.7맞이》의 의례에 속하는 날이다.
예로부터 7이라는 수를 길수로 여겨오는 까닭에 아이가 출생하여 7일, 14일, 21일 되는 날들에 례의를 차린다.
그 첫 7일 되는 날을 초이레라 하며 이날에 아기에게 새옷과 새 포대기를 갈아주고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손주와 대면한다.
《흥! 잘은 논다. 가난뱅이들에게도 초이레가 있는가? 있으면 있는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대로 굶고 사는것이 백성살이인데 무슨 놈의 인사차림을 하겠다는거야?》
뚱뚱한 녀석이 비웃으며 하는 수작이였다.
《나리님들! 우리 새애기가 본가집에 가서 몸을 풀고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다는데 쌀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쌍초상이 날수 있소이다.》
이번에는 키다리녀석이 지껄였다.
《우린 그따위는 몰라. 두상은 관가에서 방곡을 하라는걸 몰라?》
《방구요?》
《세상물정엔 깜깜이구먼. 두상! 관가에서 방을 내붙이기를 백성놈들은 한알의 낟알도 들고다니지 말라는거야. 만일 관가법을 어기고 네놈들처럼 쌀되박이나 지고 다닐 땐 쌀을 빼앗기는건 더 말할것도 없고 볼기를 맞게 되여있어.》
뚱뚱보의 수작에 리제마가 대꾸했다.
《아무리 관가법이래도 사람이 만들었겠는데… 쌀을 좀 가지고 다녀야 백성들이 살아가지 않겠수. 어떻게 부모란 사람이 자식을 빈손으로 찾아가 볼수 있으며 또 자식이 빈손으로 부모를 뵈우러 갈수 있겠소이까. 쌀을 팔아야 그릇가지도 사다 쓸게 아니요?》
키다리가 줴쳤다.
《챠, 이 두상 봐라. 불순한 수작을 탕탕하고. 너 이놈! 임금에게 대들자는거냐? 그 세치 혀때문에 긴 목 날아나고싶어?》
뚱뚱보가 이사이로 침을 찍 뱉고나서 씨벌였다.
《그따위 촌무지렁이한테 무슨 말이 통할텐가? 관가로 끌고갑세.》
《그럽세. 야! 일어서라.》
뚱뚱보가 의봉이의 뒤덜미를 움켜잡았다. 리제마는 키다리의 다리를 부여안고 간청했다.
《나으리!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사이다.》
《시끄럽다. 가난뱅이주제꼴에 무슨 놈의 새끼들을 줄레줄레 내질러낳아서…》
의봉의 덜미를 움켜잡은 뚱뚱보가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두상 말을 듣고보니 사정이 딱하구만. 이제 관가에 끌고가면 옥에 갇히겠고 그 다음은 형틀에 묶여 매를 맞겠는데… 그렇게 되면 쌀은 쌀대로 털리우고 매는 매대로 사서 맞아 병신이 될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형틀을 지고 와서 매맞는 격이 아닌가.》
《그러게 말일세. 그럼 늙은 두상을 봐서 슬쩍 놓아보낼가?》
《그렇게 하세. 우리가 남을 위해 꾸중을 좀 들읍세.》
리제마는 쌀망태를 안아들고 굽석 절을 하였다.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놓아주신 은덕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소이다. 얘야, 이젠 돌아가자구나.》
뚱뚱보가 쌀망태기를 나꾸어채며 소리쳤다.
《챠, 물에 빠져 죽게 된 놈을 건져놓으니까 내 보짐 내라 한다더니. 이놈의 두상 마음보가 억척보두 한가지일세.》
《그러게 말이야. 야, 두상! 우리가 뭐 할짓이 없어서 개떨듯 하며 밤낮길을 지키는줄 알아? 우리도 먹어야 산단 말이야.》
《앗따, 그런 말은 렴치없는 이 두상에겐 통하지 않아.》
뚱뚱보가 리제마의 멱살을 움켜잡고 을러멨다.
《야, 이 두상놈아. 관가에 가서 죽도록 매를 맞겠니? 아니면 쌀을 내놓고 곱게 물러가겠니?》
그 순간 의봉이 번개같이 몸을 날려 뚱뚱보와 키다리의 명치를 두발로 걷어찼다.
《헉-》
두 녀석은 배를 끌어안고 굳어졌다.
의봉이의 천둥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놈들아, 똑똑히 봐라. 네놈들앞에 계시는분이 새로 부임해오신 사또님이시다.》
사또라는 소리에 두 녀석은 기절초풍을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새로 온 사또가 이전 사또들과 달리 부임연도 차리지 못하게 하고 무슨 구상을 하는지 동헌을 나오지 않는데 아마 남해가의 진해고을에서 했던것처럼 엄한 정사를 하려는것 같다고, 신관사또는 함흥사람이여서 고원실정에도 밝고 조정에도 세도줄이 있어 여간 배짱이 세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아 은근히 속을 떨던 라졸들이였다.
리제마는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금시 호랑이처럼 날치던 라졸들은 고양이앞의 쥐모양 설설 기며 땅바닥에 넙적 엎드렸다.
방곡은 이미 수십년전에 고을들에서 큰 장사군들이 쌀을 다량으로 사서 다른 고을로 가져다 비싸게 팔아먹는것을 막자고 내온 법이였다. 그런것을 근래에 왜놈들의 쌀략탈이 우심해지자 그를 막으려 방곡을 엄하게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간악한 라졸놈들이 나라법을 코에 걸고 백성들이 조금씩 가지고 다니는 쌀까지 빼앗아서는 제배를 불린다.
의봉이 두 녀석의 뺨을 불찌가 번쩍 일게 몇대씩 붙이였다.
《이놈들! 어서 쌀망태를 지지 못할가?》
두 녀석은 허겁지겁 쌀망태를 집어들었다.
리제마의 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의 집으로 가보자.》
날이 어두워 쌀망태를 진 라졸들을 앞세우고 가는 리제마를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두 녀석이 멈춰섰다. 뚱뚱보가 기여드는 목소리로 여쭈었다.
《사또님! 이 집이 소인네 집이올시다.》
반달이 내리비치는 집은 시골집치고는 요란했다. 크지는 않아도 기와집에다 빙 둘러친 울담에 기와를 얹은 대문까지 붙어있었다.
《앞서라!》
리제마는 두 녀석을 따라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뜨락도 제법이였다. 마루앞에 긴 섬돌이 놓여있고 뜨락을 빙 돌아가면서 도회지의 부자집들처럼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안방문이 열리고 안주인듯 한 녀인이 초롱불을 들고 뜨락으로 나섰다.
《아유, 오늘도 한짐 가져오셨구려.》
긴치마를 차려입은 녀인의 몸에서 진한 향내가 풍겨왔다.
《이봐요,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나중엔 어데서 굴러먹던 거렁뱅이까지 끌어들이고…》
두 녀석의 얼굴이 새까매졌다.
리제마는 그자들을 못 본척 하고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초불이 환한 방에 옷가지를 넣어두는 자개박이 3층장이며 번쩍이는 장농들이 일식으로 갖춰있고 한켠에는 패물이며 술병들이 들어있는 4층사방탁자가 있었다.
방에 누워자는 아이들도 비단이불에 묻혔는데 얼굴에 살이 투실투실하다.
한갖 라졸이나 해먹는 놈이 집을 이렇게 잘 꾸리고 처자들을 잘 입히고 잘 먹이자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보짐을 털어냈겠는가.
《다음집으로 가자!》
라졸들은 쌀망태를 들고 다시 길잡이를 섰다.
키다리네 집은 기와집은 아니나 방이 여러개 붙어있는 큰집이였다.
그런데 방에는 뚱뚱보네와 달리 기껏 장농 한개에 이불 두어채일뿐 이렇다할 기물이 보이지 않았다.
《넌 왜 집이 이 모양이냐?》
리제마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던 키다리는 긴말을 늘어놓았다.
《사또님! 소인네는 대대로 물려오는 땅마지기나 있어 밥술을 떨구지 않았소이다. 허나 죽도록 일하여도 살림살이형편은 해마다 어려워지기만 했소이다. 그래 더 생각해볼것 없이 땅마지기도 가산도 팔아 향청에 먹이고 라졸자릴 샀소이다.
이젠 들인 밑천을 봉창하려고 했는데…》
리제마는 탄식이 나갔다.
키다리의 말에서 또 하나 깨닫게 되는것이 있었다.
원래부터 재물과 권세를 탐내여 구실아치가 되는 놈팽이도 있고 남에게 굽신대기 싫어 권세를 따르는 놈도 있다.
이랬든저랬든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전혀 없는 놈들이 갈길은 오로지 백성잡이를 생업으로 여기는 길이다.
아, 나라에 재물을 낳는 사람이 많아야지 그걸 뜯어먹고 사는 도적의 무리가 늘어나면 국운이 기울기마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