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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달은 동헌뒤에 있는 별채의 방에 홀로 누워 멍청하니 천정만 쳐다보고있었다. 오늘 그가 몸이 말째다는 핑게를 대고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은 의봉이를 따라가지 않은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어제 저녁 배기달은 리제마에게 불리워가서 된꾸중을 들었다. 비록 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럽게 울렸지만 기달에게는 목을 조이는듯 하였었다.
《사람이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더우기 제자는 스승앞에서 티끌만큼도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 말에 기달은 속이 한줌만하게 조여졌다. 스승이 무엇을 념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던것이다.
그 일을 알고있는것은 의봉이와 을순이 두사람뿐이다.
기달은 의봉이고 을순이고 닥치는대로 두들겨패고싶었다.
그래 가난한 백성들 집에서 돈을 좀 받아먹었기로서니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스승에게까지 고해바친단 말인가.
스승을 모시고 소갈데 말갈데로 따라다니는것은 앞으로 잘살아보자고 해서가 아닌가.
뛰여난 의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명의라는 공명도 떨치고 만금재물도 취하고저 함이다. 병자들을 살려내고서 그 대가로 돈을 받는거야 응당한 일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약값을 물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 더우기 처자가 있는 사람인데 돈을 받아야 그들을 먹여살리지 않겠는가. 오죽했으면 한성의 안해가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지아비를 따라갈수 없다고 하였겠는가.
기달은 머리를 싸쥐였다. 올봄 처가집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사실 기달은 이번에는 어떻게 하나 장인을 잘 구슬려서 안해를 함흥의 스승집으로 내려보내도록 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처가집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장인은 장죽으로 마루를 두드리며 이렇게 꾸짖었다.
《이 사람, 내가 자넬 사위로 삼은것은 자네가 스승의 의술을 넘겨받아가지고 한성에 올라오길 바래서였지 노상 하늘소처럼 스승의 짐이나 짊어지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라고 해서가 아닐세. 빨리 의술을 배워가지고 내 집으로 오든가 아니면 영영 내 딸을 보러 오지 말든가 량자택일을 해야겠네.》
지금까지 배운 의술이면 어디에 가서든 밥술쯤 넉넉히 빌어먹을수는 있다. 허나 천하에서 으뜸가는 의술을 가지려면 싫든좋든 스승에게 잘 보여야 한다. 스승이 이룩한 신비한 의술인 4상의학을 말끔히 알아낼 때까지 고생을 좀더 하면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어떻게 노상 맨입으로야 견딜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가난한 집들에서도 병치료를 할 때면 돈을 좀 과하게 받았는데 큰 변이나 난것처럼 꾸짖으니 이거 야단이다.
공든 탑이 하루에 무너진다고 스승에게 잘못 보였으니 다 허사로 되고만셈이 아닌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락심하여 머리를 싸쥐고 몸부림을 치던 기달은 불쑥 두손을 맞잡으며 《됐다.》 하고 소리쳤다.
화를 복으로 만들랬다고 그동안 병자들에게서 받아들인 얼마간의 돈을 제포의 수군에게 보내주자. 그러면 수군일로 마음을 놓지 못하는 리제마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환심을 사서 스승이 제일가는 제자로 여기게 하는 명처방이라 할수 있겠다.
기달은 급히 돈자루를 찾아들고 방문을 열었다.
기달이 돈자루를 들고 제포의 수군첨절제사를 찾아가고있을 때 리제마는 말을 달려 고을을 한바퀴 돌아보고 동헌으로 돌아오고있었다.
그만하면 고을일이 괜찮게 되여가고있는셈이다.
마을사람들속에서 신망이 있는 향리들에게 6방일을 맡겨주었더니 어찌나 열성을 내여 고을정사를 돌보는지 백성들이 다들 좋아한다. 그들이 애쓴 공이 있어 농사군들이 마음놓고 일해 밭들에는 보리이삭이 무겁게 실리였고 논밭에서는 벼포기가 우줄우줄 아지를 치며 무성해진다. 로인들이 하는 말이 올해는 근래에 보기드문 풍년이 들것 같단다. 풍년이 들면 백성들에게도 득이요, 나라에서도 득이다.
농사군들이 김매기에 열이 난 논밭을 바라보면 시흥이 절로 난다.
제포의 수군일도 잘되여나가고있다.
뭐니뭐니해도 첨절제사가 건강해진 몸으로 수군진을 돌보고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데 있는가.
작은 병선들로 바다를 오가면서 경계를 하고 섬들마다에는 망군(망을 보는 사람)을 두어 적정이 나타나면 봉수를 올리게 하자고 했더니 그는 군말없이 동의했다.
고을백성들의 병을 고쳐주는 일도 잘되고있다.
날마다 제자들이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돌봐주고 을순이까지 나서서 녀인들의 부인병을 고쳐준다. 리제마도 틈틈이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면서 4상의학에 보탤수 있는 또 한가지 비방을 찾아냈다.
4상인에 따라서 약재의 부작용을 알아낸것이였다.
부자와 계지는 태음인들에게서 살갗에 두드러기를 돋게 하고 석고는 또 목이 마르게 한다.
칡뿌리는 소음인에게서 구역질이 나게 하고 감수는 설사를 시키는가 하면 령사는 또 팔다리를 싸늘해지게 한다. 포부자는 소양인에게서 열이 나면서 두드러기를 돋게 한다. 그러니 4상인을 가르기 까리까리한 때는 이런 약을 먹여보면 알수 있을것이다.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사또님!》 하는 부름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례방이 량수거지를 하고 서있었다.
《사또님, 동생분이 오셨소이다.》
리제마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다.
《동생이라니?》
《함흥서 동생분이 사또님을 뵈우러 찾아왔소이다.》
고개를 기웃거리던 리제마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그럼 복만이가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함흥에서 예까지 얼마인데 그 먼길을 찾아오다니, 그러고보면 복만이가 형이 보고싶어서 찾아왔을것이다.
나이가 들더니 마음이 달라진 모양이다. 서형이라고 형대접을 아예 안하려들더니…
동헌뜨락에 들어선 리제마는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복만이 어데 있을가.
마당에는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기다리기에 지쳐 마중나오다 길을 어긴것이 아닐가.
을순이 다가와 나직이 아뢰였다.
《선생님, 동생분은 지금 선생님방에 계시오이다. 먼길에 피곤하다기에…》
《그런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참말 복만이 네활개를 펴고 코를 골면서 정신없이 자고있었다.
리제마는 세상 모르게 자는 복만을 보자 련민의 정이 북받쳐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형이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남해가 한끝에까지 달려왔을가.
리제마는 한시급히 말을 나누고싶어 복만이의 몸을 흔들었다.
《동생! 동생!》
복만이 꿈틀거리며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앉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불초한 동생이 문안인사를 드리오이다.》
리제마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복만에 대한 노여움이 눈녹듯 사그라져버렸다.
적자랍시고 형을 서자라 천시하고 집재산을 독차지하고 배우라는 글공부가 아니라 난봉질로 가문의 망신을 시키고 작인들의 등가죽을 벗겨내고 그를 말리려 드는 아버지와 형수에게 맞서고 과거에서 두번씩이나 떨어진 락방거자임에도 창피한줄 모르고 세도집들에 뢰물을 먹이고…
《형님! 불효한 이놈때문에 아버님이… 아버님이…》
리제마는 아버지란 소리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아버님이라니? 이 사람! 아버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복만은 방바닥에 머리를 짓쪼았다.
《형님! 이놈을 죽여주소이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소.》
《무엇이?》
몇해전 칠갑상을 받았을 때 백살은 념려없다 하시였고 지난해 집을 떠나올 때도 정정하여 동구길에까지 따라나와 꼭 뜻을 이루고 돌아오라 절절히 당부하시던 아버지였다.
리제마는 복만이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아버님이 언제, 어떻게?》
《두달전에… 중풍으로…》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리제마는 자리에 주저앉고말았다. 비통한 부고는 그를 몸져눕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