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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제마는 아침일찍 제포에 나가 그동안 수군첨절제사의 병이 얼마나 나았는가를 알아보았다.
확실히 팔물군자탕이 첨절제사에게 맞는 약이였다.
처음 병을 보았을 때에는 한해쯤은 약을 써야 몸이 추설줄 알았는데 몇달만에 병이 거의다 나았다.
체질에 맞는 처방이 확실히 중요하였다.
고칠 가망이 보이지 않아 락심했던 첨절제사는 하루가 모르게 몸이 추서자 수군일에 달라붙었다.
고을현감으로서는 수군일에 관여하지 않아도 되고 란시에도 수군첨절제사가 아니라 병마절도사의 령을 받게 되여있지만 누가 하라고 해서 수군일을 돕겠는가.
날이 갈수록 왜적선들이 우리의 바다에서 보다 더 날뛰고있는데…
하여 리제마는 오늘 오전도 첨절제사와 함께 병선에 올라 제포수군의 교련을 보고 점심무렵에 말을 타고 관가로 향하였다.
천천히 말을 몰아가느라니 집생각이 떠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한옥을 데려오고싶었다.
장가든지 스무해가 넘는다지만 한옥이와 함께 산 날은 불과 몇해밖에 되지 않는다.
허나 한옥을 데려올 결단만은 내리지 못하겠다. 제자들도 색시를 멀리 떠나 사는데 어찌 스승이란 사람만이 안사람을 데려다가 편안을 바라겠는가.
한옥을 데려오는 일은 좀더 두고보자.
《아이구, 사또님! 귀체만강하셨나이까?》
리제마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나 눈길을 주었다.
벌써 고을거리였다. 《큰 세상에도》가 달려나와 엎드려 절을 하고있는데 그의 곁에 《작은 세상에도》도 엎드려있었다.
리제마는 말에서 내려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들 나오.》
두 녀인은 일어나서 두손을 모아잡았다. 《큰 세상에도》(리제마는 주막집 녀인을 그렇게 불렀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또님께서 제포에서 돌아오시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나이다.》
《허- 무슨 일이 생겼소?》
《사또님께서 중매를 서주었으니 인사를 드리고싶었나이다. 그전날에 오셨을 때는 미처 사또님을 몰라보고 푸대접을 하였는데 오늘 다 봉창하겠나이다.》
리제마는 《작은 세상에도》를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리제마는 《작은 세상에도》를 기적에서 빼고 전령총각과 혼례를 치르게 해주었던것이다.
《혼례식날에는 찾아오겠소. 그때 한상 잘 차려내오.》
리제마는 못내 아쉬워하는 《세상에도》집 모녀를 뒤에 떨구고 관가로 돌아왔다.
동헌에 이르렀는데 웬 녀인이 대문밖에서 서성대고있었다.
오늘은 녀인들과 맞다들리는 날인가?!
리제마는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무슨 일때문인고?》
흠칫 놀라더니 녀인은 당돌하게 대꾸했다.
《소녀는 의원님을 뵈우러 왔나이다.》
리제마는 놀라며 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해현감 반년에 사또 아닌 의원이란 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 온 누구일가.
녀인의 손에서 보꾸레미가 스르르 떨어졌다.
《선생님! 소녀를 모르겠나이까? <공주기인>집 손녀 고을순이 삼가 인사를…》
리제마는 깜짝 놀랐다.
이 녀인이 정말 을순이란 말인가. 《공주기인》의 어진 손녀가 어느덧 부인이 되다니… 헤여질 때 열한살인가, 열두살이였지… 세월의 무정함이 왈칵 가슴에 파고들었다. 아, 딸애도 이렇게 자랐겠구나. 민성이도… 한옥이는 늙고… 새삼스레 고향을 떠나 흘러보낸 세월의 기나김이 가슴을 저미여든다.
《자, 들어가세!》
리제마는 보꾸레미를 집어들고 앞에 섰다.
고재봉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이미 황도연에게서 들었다. 안타깝게도 고재봉의 일점혈육인 손녀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황도연은 한탄했었다.
그동안 을순이 어데서 어떻게 살았을가. 방에 들어서자 을순이 보꾸레미속에서 빨간 비단천에 꾸린것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받쳐든 을순이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있었다.
좀 있어 을순은 비단천을 헤치고 꺼낸 한쌍의 은가락지와 책 한권을 내려놓았다.
《소녀는 선생님이 진해현감으로 부임되셨다는 소문을 들은 날 머리를 얹었사옵니다. 소녀는 이 은가락지를 신물(뒤날에 표적으로 삼기 위해 주고받는 물품)로 삼고 선생님이 과거에 급제하여 뜻을 성취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사옵니다.》
리제마는 멍하니 을순이를 건너다보기만 했다.
안될 일이다. 량친부모를 다 잃은 불쌍한 소녀를 동정하여 부모된 심정에서 가락지를 사준것이지 그것을 신물로 여기라고 준것은 아니였다.
리제마는 이제라도 잘못 든 정을 뚝 떼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사람, 임잔 어째서 자기 신세를 망치려고 하는가. 나로 말하면 헤여질 때 벌써 처자가 있었고 이제는 나이도 마흔 난 사람인데 이러면 안되지. 이제부턴 나를 아버지라 여기고 그런 마음을 싹 지워버리게.》
을순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선생님, 그런 말씀 마소이다. 선생님이 아니였다면 소녀는 이미 굶어죽은지 오랬을것이옵니다. 소녀를 살려주신 은혜에 보은하고저만 아니고 백성을 위해 세운 뜻 높으신 선생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손발이 되여 돕고저 왔는데… 머리를 얹은 마음 지워버리라 하심은 소녀보고 죽으라는 분부인줄로 아옵니다.
진정 소녀가 죽기를 바라옵니까?》
리제마는 그만 말문이 막히였다.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간직한 녀인의 진정은 그 어떤 힘으로도 돌려세울수 없는 법이다. 을순이의 절절한 음성이 방안을 울리였다.
《명필 양사언(1517-1584)의 어머님은 소시적에 우연히 집에 찾아든 늙은 선비가 희롱하여 준 두자루의 부채를 간수하고 그 선비를 사모하여 후에 찾아가 한생을 바치였다고 하나이다.
하물며 선생님은 소녀를 살려주셨을뿐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것까지 가르쳐준 은인이십니다. 소녀는 달리는 할수가 없습니다.》
리제마는 자기로서는 어쩔수 없는 처지에 놓이였음을 느꼈다.
그는 나직이 물었다.
《그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나?》
《소녀는 선생님이 주시고간 의서 <부인대전>을 외우고 할아버님이 남기신 의서들을 읽으면서 의술을 닦았나이다.》
《음-》
《소녀는 선생님이 당부하신대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부인병을 고치면서 나라에 녀의가 있어야 함을 통감했소이다.》
리제마는 말없이 한숨만 내쉬였다.
세조때 조정에서 부인병을 고치는 녀의를 길러내는 조치를 취했었다. 고을관청들에서 애젊고 똑똑한 관비들을 한성에 불러올려 부인병에 대한 의술을 배워주고 그들을 다시 제 고을들에 내려보내여 녀인들의 병을 보아주게 하였다. 그런데 그후 녀의들이 풍기를 문란시킨다는 당치않은 구실로 녀의제를 페지하였다.
뜨거운 박동이 세차게 느껴졌다.
그를 곁에 두는것은 의원으로서 팔 하나를 얻는것과 같다.
마침 방자(심부름하는 종) 하나를 물색하려던 참인데 복이 저절로 굴러든셈이다.
나라법에 녀인도 방자로 쓸수 있다 하였으니 을순이를 그 자리에 박아서 고을녀인들의 병을 보아주도록 한다면 함께 있어도 인륜에 어긋나는것으로 되지 않을것이다.
《을순이, 잘 왔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