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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는 일찌기 요즘처럼 바삐 돌아친적은 없었다.
《광제창생》의 큰뜻을 펼쳐가는 길이기에 낮에 이어 밤을 새우면서 일해도 힘든줄을 몰랐다. 리제마가 진해현감으로 부임되여 두번째로 펼친 정사는 간악한 무리를 쫓아낸 자리에 비교적 인망이 있고 대가 바른 사람들로 앉힌것이였다.
그리고 이전 구실아치들의 큰집을 헐어낸 재목으로는 아이들이 모여 글을 배우는 서당이며 길손들이 묵어가는 원집을 짓게 하였다.
동시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악독한 전횡을 일삼는 부자놈들을 엄하게 징벌하였다.
그날도 리제마는 고을에서 제포의 수군진으로 향하는 길가의 마을을 돌아보고있었다. 앞으로는 비옥한 논판이 펼쳐져있고 뒤에는 나지막한 야산을 낀 마을이였다.
리제마가 관가에 새로 받아들인 6방아전들을 거느리고 한무리의 닭들이 한가로이 노닐며 무엇인가를 쪼아먹고있는 논판을 바라보는데 문득 가까이에서 욕지거리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쪽을 바라다보니 논뚝길에서 웬 사나이가 어떤 녀인에게 꿱꿱거리며 욕설을 퍼붓고있었다.
《이 거렁뱅이같은 상것이 백주에 감히 내 논에 침범하여 낟알을 훔쳐갈수가 있는가 말이다. 이 도적년아-》
낟알을 훔쳐간다는 소리에 리제마는 놀라 다시한번 논판을 둘러보았다.
분명 논판에는 벼대 한대 서있지 않았고 벼단 하나 남은것이 없었다. 그저 한무리의 닭들이 제세상인듯 싸다니고있었다.
리제마는 그제야 저 녀인이 논임자인 사내의 논판에서 벼이삭을 줏다가 봉변을 당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세상에 저런 괴이한 일도 있는가. 닭이며 지어는 참새나 기러기같은 날새들도 마음대로 쪼아먹는 논판에 흘린 벼이삭을 사람은 주어먹을수 없단 말인가.
리제마는 울컥 분이 치밀어올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값진 비단옷을 쭉 빼입고 살이 피둥피둥한 사내는 낯모를 사람들이 다가오자 더욱 기승이 나서 녀인의 손에 들려있던 자그마한 베자루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꺼꾸로 쳐들었다.
한웅큼의 벼이삭이 쏟아져 땅바닥에 딩굴었다.
논임자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벼이삭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리제마는 즉시 논임자의 멱살을 부여잡고 논판에 처박고싶었다.
《이건 무슨 행패인가?》
리제마의 큰소리에 논임자는 마깝잖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방이 논임자에게 소리쳤다.
《사또님께서 나오셨소!》
그 말에 논임자는 즉시 온 얼굴에 아첨기를 담고 리제마에게 깊숙이 절을 차렸다.
《사또님! 미처 몰라봐서 죄를 지었소이다.》
리제마는 역겹게 낮추 붙는 논임자를 등지고 녀인을 바라보았다.
누덕누덕 기운 베옷을 입은 녀인은 두려워서 벌벌 떠는데 몸은 바싹 여위고 얼굴은 볕에 타서 새까맸다.
물어보지 않아도 녀인의 처지를 알수 있었다.
리제마는 논임자에게 물었다.
《이 앞논이 그대의것이겠소?》
《예, 예, 그렇소이다.》
《그대의 집은 어느 집이고 저 녀인의 집은 어느것인가?》
논임자는 기세가 나서 대꾸하였다.
《사또님! 소인의 집은 동네복판에 있는 기와집이고 저 녀인의 집은 저기…》
논임자의 손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높이 솟아있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이어 마을 한켠의 초가집들쪽을 가리켰다.
《사또님! 소인네 집에 잠간 들려가주셨으면 하오이다.》
리제마는 살망을 피우는 논임자를 엄한 눈길로 지켜보며 말했다.
《내 몇가지 묻겠소. 그래 조상들중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분이 있는가?》
논임자는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임진왜란때 의병에 들어 목숨을 바친 조상이 있는가 말이요?》
《저… 없는줄로 아오이다.》
《그럼,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조상은 있는가?》
《그… 그것도…》
리제마의 눈에서 분노에 찬 섬광이 번쩍였다.
《이 논벌을 누가 가꾸었는가? 그대가 땀흘려 농사를 지었는가?》
《저, 작인들이…》
그 순간 리제마의 노한 소리가 논임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놈! 그런데도 뭐 작인녀인이 날짐승이나 주어먹는 흘린 낟알을 조금 주었기로서니 죄인취급을 하는거냐? 뭐, 저 작인녀인이 도적이라구?》
논임자가 기절초풍을 하는데 리제마의 호된 추궁은 그치지 않았다.
《이놈! 네놈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슨 공을 세웠다고 이 앞벌을 독차지하고 작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단 말이냐. 땅세를 5할로 빼앗아먹으면서도 성차지 않아 가렴주구로 작인들을 뜯어먹다못해 나중에는 흘린 벼이삭 한줌에 사람을 릉욕하니 너야말로 진짜 도적이다. 네놈처럼 큰 기와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불리는자들이 많기에 백성들이 가난한것이다.
이놈! 네 죄를 알겠느냐?》
논임자는 그만 혼이 빠지고말았다.
새로 부임되여오자 첫 정사를 백성들에게 못살게 굴던 아전무리를 송두리채 들어낸 강직한 사또에게 걸려들었으니 꼼짝 못하고 녹아나게 되였구나.
리제마는 형방과 호방에게 작인들을 불법무법으로 부려먹은 논임자의 죄목을 하나하나 묶으라는 분부를 내리였다.
이렇게 되여 심보고약한 논임자놈은 응당한 징벌을 받게 되였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하여 고을안의 부자들은 보다 기가 죽었고 백성들은 살 때가 왔다고 기뻐하였다.
리제마가 세번째로 펼친 정사는 제포의 수군을 돕는 일이였다.
현감부터가 고을북쪽에 있는 장벽산에 올라가 병선을 무을 목재를 찍어내니 백성들이 너도나도 떨쳐나섰다.
국법에는 토지 8결당 농사군 한사람씩 부역에 끌어낼수 있게 되였는데 그것도 한해에 6일을 넘길수 없었다.
만일 그 법을 어기고 부역을 초과해시키면 고을원이 벌을 받게 되여있다.
허나 그건 다 법전에나 씌여있는 종이장속의 법이고 실은 그 법을 만든 사람조차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역을 들씌웠다고 하니 다른 벼슬아치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진해고을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는 일인데 누가 시키고말고 할수가 있느냐면서 한사람같이 나서주어 수십척의 크고작은 병선을 무을수 있었다. 리제마는 밤이면 병서들을 펼쳐놓고 군사를 파고들었다.
리제마는 현재로선 비할바 없이 우세한 왜적선과 싸워이기자면 넓은 바다가 아니라 밀물과 썰물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얕은 좁은 바다에서 불의에 기습전을 들이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전법이 바로 임진왜란때 왜적선을 무리로 남해에 처박은 리순신장군의 전법이였다.
리제마는 곧 수군첨절제사를 만나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진의 병선들을 부산포에서 제포에로, 통영에서 제포에로 통하는 좁은 수로에 매복시켰다가 왜적선이 침범하면 불의에 기습하여 격파하자는 리제마의 의견을 수군첨절제사는 아주 신묘한 전법이라며 쾌히 받아들였다.
넷째로 놓치지 않고 취한 조치는 부산포에 둥지를 튼 왜놈들이 고을지경에 얼씬 못하도록 한것이였다.
그것은 박규수의 의견이기도 하였다. 정초에 박규수는 부산포는 왜관에 있는 왜놈들이 박래품을 더 많이 들이밀려고 날로 기승을 부리는데 각성을 높여야겠다는 글월을 보내왔다.
그렇다. 박래품이 쓸어들면 나라가 피페해진다. 없어도 살수 있는 박래품대신 조선의 기름진 옥백미가 헐값으로 빠져나가니 이런 억울한 손실이 어데 있으랴.
하여 리제마는 라졸들로 진해고을로 들어오는 길목들을 모조리 막게 하였고 수군첨절제사에게 부탁하여 바다길도 차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간교한 왜놈장사군들을 붙잡으면 지체없이 관가로 끌어오도록 하라는 령을 내렸다.
그래서인지 진해고을로는 왜놈들이 그림자 하나 얼씬대지 못하였다.
리제마가 고을정사를 돌보는 바쁜 속에서도 놓치지 않은것은 또한 백성들의 병을 보아주는 일이였다.
관가에 약방을 차려놓고 정사를 보다가도 병자가 생겼다면 급히 찾아가 병을 보아주군 하였다. 제자들에겐 날마다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병치료를 하게 하였다.
백성들의 병을 보아주니 일거량득이 아닐수 없었다. 사람들이 병이 나아서 일 잘하니 좋고 그들에게서 마을형편을 알게 되여 정사에 참작하니 좋고… 의술을 배우길 얼마나 잘했는가.
이로써 고을민심은 안정되였고 백성들은 흥이 나서 할바를 찾아했다.
오늘도 리제마는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를 펄럭이며 농악소리 울리는 속에 김을 매는 마을들을 돌아보고나서 어슬녘에 동헌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리제마는 갑자기 눈이 부시여 그 자리에 굳어졌다.
초불이 환한 속에 요염하다고 해야 할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화려한 치마에 삼회장저고리를 받쳐입고 연지곤지로 단장한 어여쁜 녀인이 살며시 일어나 동백기름이 찰찰 흐르는 칠흑머리를 숙이는것이 아닌가.
리제마는 정신을 펄쩍 차렸다.
어느 놈이 미인계로 자기를 노리고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더럭 들었다.
리제마는 천천히 아래목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금시라도 품을 파고안길듯 교태를 머금은 녀인에게 랭랭한 눈길을 보냈다. 그 눈길에 녀인은 요염한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리제마는 엄한 기색으로 녀인에게 물었다.
《그댄 누군가?》
《소녀는 고을기생 <세상에도>인줄 아나이다.》
《세상에도?》
그렇다면 주막집 딸이라는것인가. 어미가 《세상에도》라고 불리운다니 딸도 그렇게 불리울것이다.
리제마에게 《세상에도》집은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그 집의 덕으로 고을형편을 낱낱이 알게 되여 첫 정사를 바로할수 있었고 그후에도 두 제자들이 가끔 그 집에 나가 고을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아와서 그시그시 정사를 펼치는데 도움을 받는다.
리제마는 속으로 탄식해마지 않았다.
물어보나마나 이 녀인은 누가 시켰든 자청했든지간에 현감의 수청을 들자고 이 방에 들어왔을것이다.
아, 얼마나 많은 녀인들이 천한 기생으로 되여 순결을 더럽히는가. 이들을 구해내는것도 《광제창생》이다.
이윽고 리제마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뗐다.
《네 모친에게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뿐이 아니냐. 내가 너의 이름을 기적에서 지워주겠으니 집에 돌아가거라.》
리제마는 문득 수군첨절제사의 밑에서 전령노릇을 하는 총각이 생각났다. 똑똑하고 대바른 군졸이여서 색시를 얻어주겠다는 롱말까지 했었다.
그 총각군졸과 짝을 무어주면 좋지 않을가.
《좋은 서방을 만나서 모친을 잘 모시게.》
《사또님!》
젊은 《세상에도》는 눈물이 가랑가랑하여 그에게 큰절을 드리고는 방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