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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 제마는 할머니의 품을 떠나게 되였다.
김씨는 기로사를 불러 어린 제마의 손을 그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적은이, 제마를 부탁해요. 부디 적은이가 다 알아서… 이 아이를 잘 키워줘요.》
《사모님, 념려마소이다. 제 어떻게 하나 리진사의 뜻대로 제마가 문과에 꼭 나갈수 있도록 힘쓰겠소이다.》
김씨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들거예요.》
《사모님! 사람이 마음먹고 달라붙어서 안될 일이 있겠소이까?》
《…》
제마는 방을 나서기에 앞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할머니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의 두볼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할머님, 가끔… 가끔 와서 뵙겠어요.》
김씨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올랐다.
《얘야, 할미걱정은 말어라. 오로지… 오로지 공부에 힘쓰거라!》
《할머님!》
김씨의 얼굴을 다시 또다시 들여다보며 제마는 눈물로 옷섶을 푹 적시고서야 집을 나섰다.
기로사는 언제나 너그럽던것과는 달리 무뚝뚝한 기색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제마의 손목을 잡아끌고 앞으로 걷기만 했다. 그것은 어린 그가 감정에 끌려 마음이 약해질가봐서였다.
기로사의 집은 지락마을과 이웃해있는 향교마을의 향교뒤 초가집이였다.
초가집이긴 해도 크고 번듯한데다 함흥일대에서는 흔치 않은 《ㅁ》자형집이였다.
집에 당도한 기로사는 뜻밖에도 제마의 손에 책대신 삽부터 쥐여주었다.
《제마야, 네가 우리 집에 온걸 뜻해서 나무를 심자.》
《나무를요?》
《오냐!》
기로사는 뒤울안에서 어린 나무모를 하나 들고나왔다.
《제마야, 이 나무모를 어디에다 심었으면 좋겠느냐?》
영문을 알수 없었으나 제마는 마당을 빙 둘러보았다.
한켠에 두길쯤 자란 향나무가 서있었다.
제마는 향나무를 가리켰다.
《선생님! 저 나무곁이 좋을듯 하오이다. 저 큰 나무가 이 애기나무를 잘 돌봐줄것이 아니겠나이까.》
어린애치고는 너무도 대견스러운 생각이였지만 기로사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스치였다.
《제마야, 네 생각이 그럴듯하다만 사람은 어린애가 어른의 보살핌은 입을수 있어도 나무는 어린 나무를 위해 자기에게 차례지는 해빛을 양보할줄 모른단다. 그러니 어떻게 애기나무가 큰 나무의 덕을 볼수 있겠느냐?》
그제야 깨도가 된 제마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선생님! 그럼 나무가 없는 저쪽에다 애기나무를 심었으면 좋겠소이다.》
《옳다. 그래야 한다.》
인차 마당 한켠에 호박구뎅이 같은것이 생겨났다.
제마는 숨을 헐떡이며 삽질을 하였다.
나무를 심고 받침대까지 세워준 기로사는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제마야, 네가 심은 이 나무는 황철나무란다. 황철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아주 빨리 자라기때문에 어린 나무를 심어 몇해 안되여도 여름이면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지어준단다.
너는 이 나무보다 더 빨리 자라 나라와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
기로사는 두눈을 슴벅이며 쳐다보는 제마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렸다.
《자, 이젠 안으로 들어가자.》
기로사를 따라 제마가 들어선 방은 이 집에서 제일 큰 방이자 의원을 지낸 기씨조상들이 쓰던 방이였다.
리진사집의 사랑방보다 훨씬 넓은 방의 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렸고 두 벽을 커다란 책장이 가리웠다. 앉은뱅이 밤나무책상이 놓여있는 맞은켠 벽에는 초서로 쓴 족자가 걸려있었다.
기로사는 제마를 정겨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가 굳이 남의 집 자식에게 정을 주고 각별한 관심을 돌리는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기씨집안은 제마네와 달리 식솔이 많기로 소문이 났다. 기로사에게는 형제가 자그만치 열둘이나 되였다.
그런데 무슨 액운이 서려서인지 기씨가문의 장손인 기로사에게만은 아들이 태우지 않았다.
예로부터 무남독녀를 둔 아비는 마음놓을 날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자기의 대가 끊어질 운수앞에서도 근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이웃들은 여러 동생집들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하나 양자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라고 권고하였다.
기로사는 머리를 저었다. 가문의 흥망성쇠가 그리도 중요한가. 선비는 마땅히 나라의 흥망성쇠를 중시하여야 한다. 가문에 아무리 자손이 번창해도 나라에 도움이 될 인재가 하나도 없다면 그런 집안의 부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보기에는 수십명에 달하는 자기 가문중에 별로 쓸만 한 인물감이 없었다.
그의 소원이란 남달리 총명한 아이를 제자로 삼아 나라를 위하여 이루지 못한 뜻을 물려주자는것이였다.
그러한 그의 꿈속에 선뜻 들어선 아이가 바로 제마였다. …
기로사는 말없이 벽면에 다가가 책장의 문을 열었다.
《야!?》
대바람 제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문이 활짝 열려진 책장안에는 책들이 빼곡이 꽂혀있었다. 그 책들은 대부분 리진사집에서는 볼수 없는 희귀한 책들이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같은 력사책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책들, 《대동야승》 같은 야사책들…
오랜 세월 기씨네가 모아들인 책들이였다.
옛적부터 기씨네는 새 책이 나오면 불원천리 달려가 구해오고 누구한테 희귀한 책이 있다면 재물을 아끼지 않고 가문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미 제마에게 보여준 《해동명장전》과 같은 책들도 이 책장안의것이였다.
책장에는 과거급제를 바라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4서5경》도 들어있었다.
이윽고 제마의 눈길이 문을 열지 않은 책장으로 옮겨졌다.
《선생님! 이안엔 또 어떤 책들이 들어있소이까?》
《…》
기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책들로 말하면 기씨집 선조들이 의원을 살면서 사방에서 구해들인 고금의 의서들이였다.
기로사의 아버지는 의서들을 물려주면서 가문이 대를 두고 이어온 의술을 더 잘 닦으라는 유언을 남기였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가 본받으려고 한 의원이 있었다면 8살부터 의술을 배웠다는 고려의 천하명의 리상로(고려의 침구전문의사)였다.
리상로처럼 이름난 명의가 되려고 열심히 의서를 읽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기로사였다.
기로사는 뒤늦게야 자기에게는 명의로 될수 있는 재능이 부족하다는것을 깨달았다. 명의로 될수 있는 비상한 두뇌가 없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보통의원밖에 될수 없다는것이 그가 때늦게 찾은 대답이였다.
하여 기로사는 의술을 포기하고 유교경전을 탐독하여 유생이 된것이였다.
그러니 자기처럼 실패할수 있는 의술에는 제마를 가까이 하게 할수 없었다. 반드시 고인이 된 리진사와 할머니 김씨가 바라는 벼슬길로 가는 유학을 닦게 해야 했다.
《제마야, 그건 너에게 소용없는 책들이다. 너는 열어놓은 이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읽으면 된다.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어떠냐?》
《알겠소이다.》
기로사는 제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람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면 많은 지식을 가진 식자가 되여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책만 읽어서는 안된다. 책 한권을 읽은만큼 세상을 당해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를 낮과 밤이 바뀌듯 해야만 진짜배기 식자가 될수 있느니라. 그러니 래일부터 오전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너의 외가집에 가서 외조부모님들을 만나뵙군 하여라.》
제마는 기뻐 손벽을 쳤다.
《예, 그렇게 하겠소이다.》
기로사는 좋아 어쩔줄 모르는 제마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어느모로 보나 불행한 아이다.
어머니가 너무 일찍 죽어 얼굴도 모르고 끔찍이 아껴주던 할아버지는 돌아가고 할머니마저 병들어눕고 게다가 외가집은 가난하기 짝이 없다.
제마의 외가집은 기로사네 집이 있는 향교동에 있었다. 허나 가까이에 있는 외가집에도 몇번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 리반오부터가 소실의 처가집에 가본적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제마가 벼슬길로 나가는데 지장을 받을가봐 아들이 외가집에 가는것도 극력 금지시켰다.
기로사는 반오처럼 하고싶지 않았다.
제마를 나라 위한 인재로 키우려면 눈물겨운 백성살이를 당해보게 해야 한다. 민생고를 겪어본 사람만이 백성을 위해 살 큰뜻을 품을수 있고 또 그 길에서 물러서지 않는 법이니 어려서부터 제자를 똑바로 키우는것이 스승된 사람의 본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