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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리제마는 박규수를 찾아가기에 앞서 두 제자를 방으로 불렀다.
《기달은 한 며칠 처가집에 가있으라구. 처자들이 얼마나 기다리겠나.》
기달의 처가는 한성에 있었다. 이태전 함흥에서 북포를 가져가는 한성장사군의 눈에 들어 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어느덧 두 딸을 두었다.
그동안 몇번이나 함흥으로 처자를 데려오려 했었지만 한성으로 올라오라는 장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봉은 이 집 일을 거들어주면서 날 기다리게.》
제자들에게 할바를 분부한 리제마는 황도연의 집을 나섰다.
황도연이 하는 말이 평안도 관찰사를 하다가 한성으로 올라와서 대제학에 이어 우의정벼슬을 하는 박규수는 요즘 간풍(고혈압)이 도져 의원들의 치료를 받으며 집에 있다는것이였다.
어서 가서 손을 써보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리제마는 박규수의 집대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섰다.
《뉘신지요?》
부엌에서 늙은 녀인이 나오며 물었다.
《저… 함흥에서 온 의원이옵니다.》
늙은 녀인은 리제마를 찬찬히 뜯어보며 다시 물었다.
《함흥에서 온 의원이라면… 10년전 이 집에 왔던적이 있지 않수?》
《예, 꼭 13년이 되였소이다. 그런데 그걸 다 어떻게…》
《아이구, 이런 희한한 일이라구야. 그러지 않아도 노상 의원님소릴 했는데…》
박규수 부인은 안방쪽에 대고 소리쳤다.
《증손아범! 어서 나오게.》
안방문이 열리고 젊은 사내가 마루에 나와섰다.
《할머님! 왜 그러시오이까?》
《이 사람아, 귀인이 오셨네. 옛적에 자네를 침놓아 살려주신 의원님이 찾아오셨어.》
젊은 사내는 버선발로 마루를 뛰쳐내려 뜨락에 엎드렸다.
《선생님! 박씨가문의 장손이 큰절을 드리오이다. 그때 소인을 살려주어 정말 고맙소이다.》
리제마는 뜻밖의 일에 당황했다.
《아, 어서 일어나오.》
리제마는 젊은이의 손을 잡아일으켰다.
침 몇대를 놓아준것이 무슨 큰 은혜라고 10여년세월을 잊지 않고있었단 말인가. 이 하나만 놓고보아도 이 집의 가풍을 바이 알수가 있었다.
《누가 왔다고?》
사랑채에서 울려나온 석쉼한 목소리였다.
리제마는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사랑채로 다가갔다.
사랑방퇴돌우에 목화(벼슬아치들이 관복차림을 할 때 신는 목이 긴 갖신) 몇컬레가 놓여있는것으로 보아 벼슬하는 사람들이 병문안을 온 모양이였다.
《<함흥의원>이 왔으면 어서 맞아들이게.》
방안에서 울려나오는 석쉼한 목소리의 임자는 아마 박규수일것이다.
사랑방문이 열리자 세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사모를 쓰고 흑단령(검은색의 둥근깃옷)을 입은 젊은 사내들이였다.
방 아래목에 박규수가 앉아있는데 이마에 흰 띠를 동인것을 보아 머리가 아픈 모양이였다.
리제마는 박규수에게 꿇어엎드려 절을 하였다.
《아, <함흥의원>이 옳구만. 그땐 새파란 젊은이였는데… 집에선 다들 무고한가?》
《예.》
리제마는 의원된 본분이 떠올라 바로 앉으며 물었다.
《대감님! 소인이 병을 좀 보아도 되겠소이까?》
《고마우이.》
리제마는 박규수의 맥을 짚어보았다. 맥은 힘이 없고 고르롭게 뛰지 않았다.
박규수는 지금 머리가 흐리터분하고 눈이 나오는감이 있으면서 눈알이 아프고 잘 보이지 않을것이다. 게다가 어지럽고 허리와 무릎이 시리고 쑤실것이고…
리제마는 들고온 약통을 열었다.
병자는 보건대 태음인일것이다. 마침이다. 태음인에게 말을 잘 듣는 태음조위탕 약처방을 이미 찾아낸터이다. 이 약처방으로 간풍에 든 태음인을 몇명 고쳐냈다. 태음조위탕에서 오미자를 빼고 도꼬마리와 진득찰을 대신 넣어주면 간풍에 더 효험이 있을것이다.
리제마는 약을 봉지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대감님! 이 약을 자시면 효험이 있을것이오이다.》
《고마우이. 허- 이 정신 봤나. 자네들을 인사시키지 못했군. 여보게들, 이 사람이 내가 늘 말하던 <함흥의원>일세.》
리제마는 자기를 지켜보는 세 사내들에게 머리를 숙이였다.
《리제마라고 하오이다.》
세 사내들중에서 박규수의 곁에 앉은 사내가 맞절을 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김옥균이옵니다. 당년 스물두살이오이다. 아직 벼슬은 없소이다.》
눈에서 광채가 일고 칼칼하게 생긴 그의 풍모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자아냈다.
21살에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고 박규수가 곁에서 말해주었다.
《전 홍영식인데 당년 18살이오이다.》
리제마는 홍영식의 가슴에 흉배가 없는것을 보고 벼슬전이라는것을 짐작하였다.
홍영식은 전 평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철종의 사위였다.
《전 박영교인데 24살이오이다.》
그의 가슴에도 흉배가 없었다.
박영교는 전 병조판서 박원양의 아들이다.
리제마는 고령의 박규수에게 이렇게 젊고 쟁쟁한 제자들이 있다는것이 반가웠다.
《리공! 이 젊은이들은 애국충정을 지닌 인재들이 조정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네.
사실말이지 인재를 떠난 부국강병이란 어불성설이지.》
박규수는 리제마의 손을 잡고 친근하게 말했다.
《10년이 넘도록 한성걸음을 안하던 그대가 다시 나타난걸 보면 필경 무슨 긴요한 일이 있는것 같은데…》
리제마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대감님! 실은 저… 무과에 나가려고…》
박규수의 눈에 놀라움이 비꼈다.
《대감님! 국운이 위태로와지는 이런 때 가만 앉아있을수가 없어서…》
박규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그대는 소시적에 백두산가까이에서 무술을 닦았다고 했지! 임자말이 옳네. 지금 나라는 말이 아닐세. 조정이나 군대에 무예를 똑똑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 장수감이 없단 말일세. 기막힌 일이지. <죽창한화>를 읽은적이 있나?》
리제마는 고개를 들었다.
《읽은적이 있소이다. 그 책에서는 리조에 들어와 훌륭한 장수들이 삼국시대에 비해 훨씬 적은것은 조정이 장재(장수감)를 길러낼줄 모르기때문이라고 지탄하였던것 같소이다.
조정이 군사들의 직위를 그가 세운 전공에 따라 승진시키지 않고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낸 군량을 얼마나 바쳤는가에 따라 출세시키니 그렇게 승진한자들은 하나같이 일단 지위만 얻으면 오로지 자기 목숨을 돌보고 아끼는것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장수감이 나올래야 나올수 없다고 하였소이다.》
리제마의 조심스러운 대답소리에 박규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죽창한화》의 이야기는 자기가 대신으로 있는 오늘의 조정에 대한 비난이였다.
《그래, 잘 기억하고있구만. 그 책이 조정의 비위를 심히 상하게는 하였지만 실은 입바른 소리일세. 그런데…》
박규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꼭 무과에 나가야겠나?》
리제마는 박규수가 자기 마음을 몰라줄것 같아 조급해졌다.
《대감님! 소인의 생각은 지금처럼 률곡선생이 내놓은 10만양병의 지론을 계속 외면하다가는 반드시 큰 변을 당한다는것이옵니다. 물론 지금 나라사정이 어려운것만은 사실이옵니다. 국고도 비였고 백성살이도 눈뜨고 볼수 없이 비참하고… 그렇다고 해서 군사를 소홀히 하면 안될줄로 아오이다.
량반이나 상민을 가림없이 일치동심하여 전민이 군병이 된다면 닥쳐오는 전란을 막아낼수 있소이다. 집집마다 군량을 내고 모두가 무술을 배우고 총 잘 쏘는 군사 10만을 양병하면 기필코 나라는 부강해질수 있소이다. 이런 국가중대사는 말로는 안되는 일이기에… 그래서 의원일을 그만둔것이옵니다.》
침울해있던 박규수의 눈이 번쩍했다.
《옳네. 옳게 보았네.》
김옥균이 리제마의 손을 와락 잡았다.
《오늘 뜻을 같이할 사람을 만난것 같소이다. 무과에 나가 꼭 급제하여 무관직을 받도록 하소이다. 조정쇄신의 뜻을 이루면 리공을 기어이 찾겠으니 그때 손잡고 같이 일해보기를 바라오이다.》
《고맙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