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리제마는 지금 세해전 이맘때에 찾아들었던 장성고을의 병풍산골안에 있는 초가집에서 《장성명의》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온몸이 눈사람인듯 하얀 그의 모습은 이전처럼 보이였으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귀에 잔주름이 퍼그나 늘어났음을 알수 있다.

그는 공손한 자세로 앉아있는 리제마를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의원들에게는 명의가 될수 있는 두갈래의 길이 있다. 리상로와 같이 비범한 스승에게서 의술을 통채로 물려받는 길이 첫번째 길이라고 할수 있다.

두번째 길은 허임처럼 홀로 고금동서의 의서들을 통달하고 부지런히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의술을 련마하는 길이다.

비범한 명의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는 길은 인차 명의로서 이름을 날릴수는 있으나 대개 선대가 닦아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새롭고 독특한 비방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홀로 의술을 부지런히 닦는 길에서는 아직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특이한 비방을 발견해낼수는 있으나 오랜 세월 남다른 품을 들여야 할것이니 실로 힘든 길이 아닐수 없다.

《그대는 나와 한 약속을 지켰소.》

《장성명의》의 말에 리제마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눈에는 공손한 기운이 어려있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가르치심이 아니였다면 더 깊은 의술을 몰랐을것이옵니다.》

《장성명의》는 리제마의 두손을 그러잡았다.

그는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니 고맙소. 사실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왔던 젊은이들속에 앉은자리시험에서 <상>을 맞은이가 몇이 있었네. 허나 그들은 3년동안 자기 힘으로 빌어먹으면서 고을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라는 시험에는 견디지 못하고 가버렸소. 그대야말로 비결을 물려받을수 있는 좋은 제자가 분명하이.》

리제마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고진감래라고 집을 멀리 떠나 온갖 고초를 달게 여기며 수년세월 병자들을 찾아다닌 끝에 남다른 의술을 지닌 《장성명의》를 만났으니 이것이 바로 기로사의 뜻이 아니겠는가.

《선생님!》

《장성명의》는 진실로 기뻐하며 리제마를 보고 머리를 끄떡이였다.

3년세월 리제마가 전라도에서 이룬것이 무엇이던가.

전라도는 함경도와 달리 벌이 끝간데 없이 펼쳐져있어 마을이 무수하고 인총이 조밀하며 그래서 병자도 많은 고장이다.

몇몇 의원으로써는 그들의 병을 다 보아줄수 없다. 마을마다에서는 골병에 든 사람들이 명의가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늙은이, 젊은이, 아이들, 녀인들, 키큰 사람, 키작은 사람, 실로 천태만상이다.

병도 천태만상이다.

명의라 함은 표증(병이 생긴 부위가 겉에 있고 발병초기에 비교적 경한 증상들이 나타나는 병증)이든 5장6부에 든 리증(중병)이든 다 잘 다스리는 의원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표증에는 침이나 뜸의 효험을 기대할수 있으나 리증에는 그것만으로는 힘들다. 꼭 약재의 효험이 동반되여야 한다.

결국 리제마는 천태만상의 병자들과 걸음걸음 맞다들려 그전보다 더 머리를 써야 했다.

그 나날 그는 사람의 체질을 8도로 갈라보기도 하였고 좀더 사색을 깊이하여 산골사람, 바다가사람, 벌방사람으로 갈라보기도 하였으며 키큰 사람, 키작은 사람, 키가 보통인 사람으로 나누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시 마음에 드는 체질분류를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뜻하는바를 이룰수 있는 가까이에 이르렀다는것만은 확신하였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확신할수 있는가.

맞다들린 병자들을 그전처럼 여러번이 아니라 두세번의 처방만에 병을 고치게 한것이였다.

아직은 딱히 무엇을 자로 하여 그런 효험을 본것인지는 찍어 말할수 없지만 하여간 이전보다 의술이 깊어진것은 사실이다. 큰 성과였다.

《장성명의》는 긴장되여있는 리제마의 마음을 늦구어줄 생각에서 화제를 돌리였다.

《난 이번에 한성에 갔다왔소. 혜암이라는 의원이 <의종손익>이란 의서를 썼다기에 만나보았소.》

《아니, 혜암선생님을 말입니까?》

《장성명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와 말하다가 <함흥의원>소리가 나서 난 자네가 혜암과도 인연이 깊은줄을 알게 되였지. 임자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공주로 내려보낸 후 소식을 몰라 근심했다면서 나에게 그대를 잘 도와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소.》

《장성명의》는 한성에 머물러있으면서 황도연을 찾아가 의술에 대한 견해도 나누고 그가 쓴 《의종손익》의 원고도 읽어보았던것이다.

《책은 아마 명년쯤엔 찍혀나올거요. 참 잘 쓴 의서요.

혜암은 그 책의 양로법에다 쓰기를 사람이 늙어 예순살에 이르면 늘 고기붙이를 먹어야 하고 일흔살이 되면 기름진 반찬을 빼놓지 말며 여든살에는 진귀한 음식을 더 먹어야 하고 아흔살에 가서는 새참을 빼놓지 말고 꼭꼭 들어야 오래오래 살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 세상이 언제나 오겠는지…》

《…》

《내 혜암에게서도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더우기는 이번 3년간의 고행길을 통해 그대를 더 잘 알게 되였소. 그래 지금껏 내가 터득한 비결을 전부 넘겨주자고 하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이요.》

리제마는 놀랐다.

어떻게 남이 한생 터득해낸 의술의 심오한 비결을 하루에 배워낼수 있단 말인가.

리제마는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하였다.

《선생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선생님께서 소생을 측은히 여겨주시고 긴 날에 비결을 물려주었으면 하오이다.》

별안간 《장성명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들었다놓았다.

《난 자네를 믿네. 무평, 그대는 의술만 늘어난것이 아니라 시국을 가려보는 눈도 밝아졌소. 그러니 그대가 전라도에서 지낸 3년간을 어찌 산속에서 도를 닦은 3년과 비기지 못하겠소!

그대는 실로 남들이 천날을 통해 전습할수 있는것을 하루만에 체현할수 있는 술법을 가졌다고 말할수 있소.》

리제마는 《장성명의》의 진심어린 칭찬에 감심되여 고개를 숙이였다.

《그럼 시작하겠소. 사람은 체질에 따라 성격과 심리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병도 달라지게 되오.

보통 키가 크고 하체가 실한 사람은 꾸준하고 참을성도 좋고 매사에 적극적인데가 있는데 동작은 굼뜨오. 이런 사람들은 간실열증이나 페허한증에 잘 걸리오.

키가 작고 하체가 허한 사람은 대체로 급하고 동작이 빠르며 매사에 세밀한데 위실열증에 잘 걸리오.

키가 작고 하체가 실한 사람은 온순하고 조용한편이고 단정하나 소심한데가 있소. 이런 사람들은 비위허한증이나 수족문란증에 잘 걸리게 되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사람의 체질에 대해서 알고싶어하는 리제마에게 더 심오한 대답을 줄수 없는것이 안타까운듯 그는 한숨을 내쉬였다.

《무평! 안됐소만 이게 내가 그대에게 넘겨줄수 있는 비결의 전부요.》

《장성명의》의 한마디한마디들은 산울림처럼 공명을 일으키면서 바위에 글을 쪼아박듯 리제마의 뇌리에 깊이깊이 새겨졌다.

《선생님! 미거한 소생의 눈을 번쩍 틔여주어 정말 고맙소이다. 선생님의 비결이 헛되지 않도록 힘써 사람들의 병을 고치겠소이다.》

《고마우이.》

《장성명의》는 만족감에 휩싸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수십년세월속에 터득해낸 비결을 분명히 보다 더 크고 알찬 열매로 가꾸어낼수 있는 젊은 의원에게 넘겨주었으니 왜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으랴.

예로부터 명의들은 이렇게 말했다.

보배로운 비방은 전수받을 인재가 아니면 넘겨주지 말라. 어질기는 하나 머리가 암매한 둔재에게 물려준 비방은 썩은 흙에 내버려진 옥과 같고 총명은 하나 어질지 못한자에게 전해준 비방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재액을 불러다주는 근원으로 되기마련이다.

《어련하겠소만 내 한마디 더 하겠소.

명의라 함은 신선과도 같은 존재이거니 사람의 몸에 든 병도 잘 고쳐야 하지만 사람의 정신에 든 병도 잘 고쳐내야 하오.

허나 이미 욕심병에 깊이 들어서 권세와 재물에 환장이 된 정신병만은 아무리 명의라도 고쳐줄수 없소. 그런 병은 너무 늦었거던.》

리제마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그의 말에 귀를 강구었다. 그러면서도 방금 그가 넘겨준 그 비결이 막아놓았던 물동을 터치듯 그동안 모지름을 써온 체질의 대문을 활짝 열어줄것 같아 가슴을 조이였다.

《이제는 어디로 갈 작정인가?》

리제마는 그의 물음에 외곬으로 흐르는 생각을 털고 앞일을 그려보았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던 나날 의주에도 이름난 의원들이 많다는 소리를 몇번이나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의주에도 가볼 생각이였다.

《내친걸음에 의주에 들려볼가 하나이다.》

《의주에?》

《예, 의주에도 신비한 처방을 아는 명의들이 있다는것 같소이다.》

《장성명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확실히 리제마는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자고 다년간 집떠나 고생길을 걸은것을 보아도 그렇고 이제 또다시 의주에로의 먼길을 택한것을 보아도 그는 결심품은 이 길에서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이 큰일을 치른다.

《부디 먼길에 조심하오.》

리제마는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장성명의》가 고마웠다.

그가 아니였다면 두세번의 처방만에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것이다.

공주에서 《공주기인》을 처음 만나던 일이 어제일인듯 떠올랐다.

그 나날 그는 단지 《공주기인》네의 어려운 집살림이나 바로잡아주기 위해 애쓴것이 아니였다.

헤아릴수 없는 병자들의 질병도 고쳐주고 지대에 따라 달라지는 병에 대한 약처방도 밝혀냈다.

공주뿐아니라 그 주변 여러 고을들의 의원들과도 만나 의술을 교제하며 더욱 련마해나갔다.

그 과정에 사람의 체질을 8도에 따라서도 나누어보고 용모나 체격에 따라 이렇게저렇게도 갈라보면서 고심을 하였다.

공주에서의 3년이 사람들의 병이 지대와 풍토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것을 밝혀낸 나날이라면 전라도에서의 3년은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생김새며 성미 같은것을 따져 제나름대로의 체질을 갈라보고 약을 쓴 나날이였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을 떠돌아다니면서 그는 지금처럼 의원들이 체질을 가르지 못한채 향방없는 약처방을 내려가지고서는 언제 가도 사람들을 병마로부터 구제하기 어렵다는것을 다시한번 통절하게 느끼였다.

《그래, 언제 떠나려나?》

《선생님! 래일 떠날가 하오이다.》

《래일이라… 잠간만!》

그는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이 사람! 이리 들어오게.》

방문이 열리고 키큰 사내가 들어섰다.

너부죽한 얼굴에 눈섭이 짙은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는 리제마에게 큰절을 차리였다.

리제마가 답례를 차리고서 의아해하자 《장성명의》가 말했다.

《이 젊은인 배기달이라고 하오. 원평마을 배부자의 서자인데… 의술을 배워 좋은 일을 하겠다고 그냥 찾아오누만. 보다싶이 난 고목이라 이제 누굴 더 가르치겠나. 그대가 마음에 들면 데려가주게.》

배기달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선생님! 소생을 버리지 말아주소이다.》

리제마는 서자라는 소리에 동정이 북받쳤다.

《일어나앉으소.》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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