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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가 의봉이와 함께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고있을 때 함흥에서 한옥은 집살림을 돌보느라 바삐 돌아가고있었다.
요즘 한옥은 전에없이 흥에 겨워 저녁늦도록 베낳이를 하였다. 하고싶어하는 일이여서 지칠줄을 모르겠다.
남편 리제마와 귀동이도 아니 의봉이도 다 성한 몸으로 할바를 꾸준하게 하고있다니 어찌 기운이 나지 않겠는가.
헤여져 몇년동안 소식조차 모르던 남편에 대해 늘 걱정만 쌓였댔는데 이제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난해 기다리던 남편의 반가운 희소식을 안고 애기를 업은 젊은 녀인이 불쑥 나타났다.
의봉이의 색시라는 공주애기였다.
남편의 체취가 확확 안겨오는 활달한 필체의 글월을 꺼내주는 공주애기를 붙안고 기쁨의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한옥은 집떠난 사내의 일로 너무 마음쓰지 말고 무리하게 일하지 말라고 쓴 대목에서는 목이 메여올랐다.
이제 늦어 한두해안으로 좋은 소식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겠으니 글월을 가지고가는 의봉이의 색시를 친동기로 여겨 잘 돌봐주라는 글줄을 보면서는 더 힘껏 일하여 자수성가한 집살림을 애아버지에게 보여주리라는 마음을 굳히였다.
아장아장 걷던 달래는 얼마나 컸는지, 그애가 보고싶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또 태여난 자식이 사내면 백성을 위해 살라는 뜻에서 민성이라 불러주라는 대목에서는 글월을 가슴에 안고 울었다.
기쁨과 희열에 넘치여서인지 가끔 몸을 괴롭히던 병도 달아나버린것 같았다.
그래서 더 직심스레 일손을 잡았다. 이게 다 뜻있는 지아비의 뒤바라지를 하는 일인데 어이 손발이 굼뜨게 놀려지랴.
조와 콩을 심은 뙈기밭들에 김이 나올세라 호미질을 하였고 삼밭이 마를세라 도랑물을 끌어들였다.
공주애기까지 두팔 걷고 나서주니 흥이 났다.
지내볼수록 그는 마음에 쏙 든다. 시집에 인사를 올린다면서 함흥에 당도한 그 이튿날로 수백리 먼 포태골로 떠나가는 결기라든가, 시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일을 도맡아하는 주인된 마음이랑 알뜰살뜰한 일솜씨는 사람을 반하게 한다.
이런 새애기이니 하늘이 굽어보고 살려주었을것이다.
공주애기는 누에치기에서도 기막힌 일솜씨를 보여주었다. 어렸을적에 삯빨래를 하다가 학슬담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였다면서 언제 누에치기까지 익혔는지 제손으로 뒤뜨락에 잠실을 짓고 누에알을 깨웠다. 그리고 어린 누에들에게 매일 한번씩 고추가루물을 뽕잎에 뿌려 먹였다.
그것이 조화는 참 조화였다. 고추가루물에 젖은 뽕잎을 먹은 누에들은 신기하게도 병들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서 소담하게 큰 고치들을 틀어주었다. 여느해 같으면 누에의 거의 반수는 병으로 죽어나갔겠는데 올해에는 옹글게 자란 고치풍년이 들었다.
그리고보면 의봉이 색시복을 타고났다. 인물좋고 마음씨곱고 일잘하는 색시가 굴러들다니…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의 베낳이는 그저그만이다. 가뭄철에는 명주실이나 무명실과 달리 빳빳하고 거친 삼실로 베를 낳으면 먼지가 심하게 일고 실이 잘 끊어진다. 그러니 이 좋은 장마철에 베낳이를 바싹 다그쳐야 한다.
함경도는 옛적부터 베가 유명한 고장이다. 명천, 경성, 회령, 온성고을들에서 나는 가는베는 그 질이 하도 좋아 《북포》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북포중의 보름새베(날실을 15새로 하여 짠 베천)는 발이 아주 가늘고 고와 매미날개에 비길 정도다.
한옥이 낳은 베도 북포라고 소리칠수 있다. 이런 베 수십필이면 의봉이네에게 집까지는 못해도 기물쯤은 웬만큼 장만해줄수 있다.
기세좋게 바디질을 해나가던 한옥의 손이 갑자기 뚝 멎었다. 눈길이 베틀의 앞다리를 든든히 련결시킨 룡두머리에 멎어버렸다.
말을 잘 들어주던 베틀이 갑자기 말썽을 부려서 그런것이 아니였다.
어제 저녁에 있은 시동생의 일이 생각나서였다. 복만이 어쩌면 그렇게 되였는지…
원래 시할머니가 지어준 시동생 복만이의 이름은 제학이였다. 그런걸 복만이는 지난해에 자기스스로가 그렇게 개명하였다.
뭐 복을 많이 받고싶어서라나…
시아버지 반오는 이태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지난해부터 자리에 눕고말았다.
그동안 복만은 두번씩이나 한성에 올라가 문과에 나섰댔지만 두번 다 과거에서 굴러떨어졌다. 과거에서 두번씩이나 굴러떨어진 락방거자(과거에 떨어진 선비)임에도 불구하고 복만은 예로부터 세상을 놀래운 이름난 명사들은 다 과거에서 자기처럼 몇번씩 미끄러졌다면서 다음번에는 꼭 급제를 하되 장원급제를 해서 온 고을이 들썩하게 도문잔치(과거급제자가 집에 돌아와 베푸는 잔치)를 차리겠다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희떠운 소리를 하며 다녔다.
그래도 그쯤한 창피는 저 하나의 창피이니 그런대로 모르는척할수 있다.
복만이는 언제부터 돈맛을 들였는지 처가외가의 돈까지 가져다가 동네앞뒤로 노란자위같은 땅은 다 사들이고 악착스레 작인들의 고혈을 짜내여 동네사람들의 원성을 사고있다.
도적놈같은 땅부자놈들도 땅세로 5할(50%)을 긁어가는데 복만이만은 유독 6할로 높여 빼앗아가니 그 행실이 작인들을 굶겨죽이자는것이지 뭔가.
하여 한옥은 어제 앓고있는 시아버지의 병문안을 간 기회에 조용히 시동생 복만이를 만나 말을 꺼냈다.
《달래 삼촌! 올해부턴 땅세를 좀 낮춰받았으면 해요. 시집이야 옛적부터 인심이 후하기로 온 고을에 알려진 집안인데… 삼촌이 적선하는셈 치고 남들처럼 5할로 낮추면 동네인심을 다시 얻을수 있어요.》
거만스레 턱을 쳐들고있던 복만은 별안간 눈알이 새빨개져서 소리질렀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그따위 뒤웅박차고 바람잡을짓이나 하러 오겠으면 다신 이 집에 얼씬도 마오!》
한옥은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하여 어떻게 그 집을 뛰쳐나왔는지 모른다. …
《엄마!》
광문이 빠금히 열리고 민성의 손목을 잡은 달래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한옥의 얼굴이 금시 환해졌다.
《엄마! 공주이모가 밥 잡수래요.》
《오냐!》
한옥은 광문을 나가 아들을 번쩍 안아들었다.
《우리 민성이 누나랑 엄마랑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