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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는 닷새만에 장성길재를 넘어 전라도의 장성고을에 들어섰다.
서쪽으로 문수산, 태청산 같은 높은 산들과 동쪽의 장군봉, 병풍산들이 《ㅅ》자로 줄기쳐내린 그 한가운데 황룡강을 끼고 펼쳐진 넓은 들판에 장성고을이 자리잡고있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장성명의》의 행처를 물으니 그들은 병풍산을 가리키며 저 산 제일 깊은 골안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병풍산골안이 험한데지만 거기에 이름난 의원이 도를 닦고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들고 명의 또한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치료해준다고 말하는것이였다.
장성길재만 넘으면 그날로 《장성명의》를 만나리라 생각하였던 리제마는 신고끝에 다음날 점심녘에야 병풍산골안에 다달을수 있었다.
병풍산은 함흥주변의 백운산이나 박달봉 못지 않게 높고 험해보였다.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등에 진 산기슭의 호젓한 개울가에 울바자없는 초가집이 한채 있었다. 송도3절 서경덕이 한평생 성거산기슭의 화담언덕우에 초가집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더니 그도 이 깊은 골안에서 의술을 련마하고 제자들을 키우는 모양이였다.
리제마가 초가집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오는것이였다.
제마는 놀라 주춤거렸다. 온몸이 그대로 눈사람같은 기이한 늙은이가 앞에 있었다. 옷도 흰눈같이 하얀 무명옷을 입었고 맨상투바람의 머리도 한오리 검은빛이 없는 백발이였다. 가슴까지 드리운 풍만한 수염도 긴 눈섭도 다 백설을 떠인듯 했다.
백발로인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 로인처럼 온몸이 새하얀 사람은 처음이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백발로인이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였다.
리제마는 속으로 감탄을 터치였다. 눈사람같이 하얀 백발로인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애젊은 사내처럼 혈기가 넘치는 홍안인데 두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일고있었다.
리제마는 그가 틀림없이 《장성명의》라고 생각되여 깊숙이 허리를 굽히였다.
《어데서 오는 누군고?》
《예, 소인은 함흥사람인데 성은 리씨이고 자는 무평, 호는 동무라고 하오이다.》
의봉이 얼른 보태여 말하였다.
《우리 선생님은 정유년(1837)생이온데 열살이전에부터 4서5경을 읽으셨고 의원을 하신지는 10년을 썩 넘사옵니다.》
리제마는 의봉의 칭찬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그런가. 하여간 반가우이. 벌써 10년 넘게 의원을 해온다니 의술이 보통이 아니겠는데 나를 찾아온걸 보면 무슨 사정이 있는듯 하구만. 보매 처자도 있는것 같은데 이런 산중에 어떻게 왔소?》
그의 시선이 리제마의 얼굴을 주시하고있었다.
《선생님! 나이가 많고 홀몸이 아닌것이 제자로 되는 일에 무슨 지장이 되겠소이까?》
《음-》
그는 다시한번 리제마의 온몸을 훑어보고나서 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꼭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춘 젊은 의원만을 제자로 받아들이오. 지금껏 많지는 않지만 몇몇 젊은 의원들이 자기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왔댔소. 허나 그들이 시험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나도 별수 없었소.
그럼 시험부터 치기요. 내 나이가 얼마쯤 나보이오?》
리제마는 초면에 그것도 선자리에서 시험을 치겠다는 바람에 당황해졌다. 하여튼 세운 법도가 그러하다니 시험에 응해야 한다.
리제마는 온 정신을 모아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백살 나보이기도 하고 그보다 더 많아보이기도 하였다.
리제마가 갈피를 잡을수 없어 대답을 망설이자 그는 한절반 답을 대주는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혹시 고려 말기 사람 중순당(라흥유의 호)을 아는고?》
리제마의 입가에 미소가 실리였다.
고려 말기 판전객시사로서 왜나라에 통신사로 간 라흥유는 왜구의 침입을 당장 걷어치울것을 강력히 들이댔다. 그때 왜인들이 구속하자 《내 나이 백쉰살이다.》라고 웨쳐 그들을 놀래웠다. 어떤 왜인들은 백발의 라흥유를 숭상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때 라흥유의 나이는 겨우 예순이였다.
《대답하겠소이다. 선생님의 년세는 예순살인줄 아옵니다.》
《장성명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력사책을 많이 읽었다는것을 알겠소. 그러니 첫 물음엔 대답했다고 할수 있소.
이건 여담인데 지난해 웬놈이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조르더구만. 암만 봐야 우리네같이 토장내가 아니라 비린내가 나는것 같아 <난 백쉰살인데 너는 몇살이냐?> 하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놈은 입을 딱 벌리더니 정신나간 놈처럼 머리를 갑삭대며 스무살이라고 하질 않겠소. 그놈은 왜관에서 들여보낸 왜놈족속이였소.》
《장성명의》는 잠시 말을 끊고 다시한번 리제마의 온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제마는 그의 번쩍이는 눈길이 자기 몸에 와닿을 때마다 살을 찌르는듯 하여 몸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대를 보니 원래의 성미는 급한편이였겠소.》
리제마는 속으로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확실히 《장성명의》가 사람의 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알아맞추는 비상한 재간이 있구나.
리제마는 자기의 급한 성미를 고치려고 애를 쓰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가 열둬살 났을 때일것이다.
기로사의 집으로 옮겨온지 몇해가 지났는데 어느 하루 갑자기 가슴이 뜨끔하더니 그날부터 때때로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듯 아파났다.
기로사에게 보였더니 심통(가슴과 명치부위의 아픔)이라는것이였다.
《얘야, 이 병을 빨리 고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 그런데 이 병에 제일 좋은 약은 급한 네 성미를 고치는것이다.》
사실 제마의 어린시절 성미는 대단히 급한 축이였다.
너무 빠르게 말해서 남들이 미처 알아들을수 없었고 행동거지도 누가 쫓아오는것처럼 매사에 헤덤볐다.
그날부터 제마는 스승이 지켜보고있다고 생각하며 급한 성미를 고치기에 달라붙었다.
그랬더니 심통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없어져버렸다.
《밖에서 치는 시험에서 <상>을 맞았으니 안으로 들어가 방안에서 치는 시험을 마저 치르기요.》
리제마는 울렁이는 가슴을 붙안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신선같은 이 어른이 어떤 시험을 치자고 할가.
방에 들어서니 구들에는 구름노전이 깔렸고 들창쪽에 앉은뱅이책상이 있었다. 그우에는 책 두어권과 보통 연적, 벼루가 전부였다. 응당 의서가 가득차있어야 할 책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리제마를 뜨스한 아래목에 눌러앉히였다.
《그댄 조정소식을 듣고있소?》
리제마는 어리둥절해졌다. 이런것도 시험거린가?
리제마는 곧 고개를 떨구었다. 조정소식이라야 기껏 항간에서 돌아가는 소리를 좀 얻어들었을뿐이다. 지난해(1863년) 겨울 열네해동안 룡좌를 부지해오던 병약한 임금(철종)이 붕어하고 열한살인지 열두살인지 하는 어린아이가 26대임금으로 등극하였다는것이 리제마가 알고있는 조정소식의 전부였다.
《그대는 새 임금의 등극이 장차 어떤 정국을 가져올수 있다고 생각하는고?》
제마는 아무 대답도 할수 없었다. 일개 의원노릇이나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가 돌아가는 형편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어보고 앞일이 어떻다고 예언할수 있단 말인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고있자 《장성명의》가 그를 대신하여 대답하였다.
《이제 페정쇄신이 크게 일어날거요. 그것도 인차 한두달안으로! 드디여 썩어빠진 안동김가네의 세도정치는 끝장이 날것이요.》
리제마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내색은 안했다. 안동김가네의 반석같은 세도정치가 끝장이 난다는게 어디 될번 한 소린가. 한다하는 임금들도 외척의 세력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했다는데 철부지같은 어린 임금이 무슨 재주로 조정에 그들먹한 안동김가네를 쫓아낸단 말인가.
《지금 어린 임금의 부친인 흥선군대감이 집정하여 섭정을 개시했은즉 변이 날거요. 흥선군대감으로 말한다면 여간 손탁이 세고 야심만만한 수단군이 아니요. 그동안 왕족을 경계하는 안동김가네의 눈길을 피하려고 일부러 술주정군으로, 부랑배로 본색을 가리우고 살아왔거던. 그러면서 남몰래 대궐안에 줄을 늘여 끝내는 조대비(24대임금 헌종의 어머니)를 움직여냈소.
평소에 안동김가네라면 이를 갈던 조대비라 흥선군대감의 뜻대로 임금이 붕어하자 누가 손쓸새 없이 대감의 둘째아들 명복이에게 룡상을 넘겨주라는 분부를 내리였소. 그리고 얼마동안 수렴청정을 하다가 흥선군대감에게 실권을 넘겨주었소.》
리제마로서는 경탄할 소식이였다.
어떻게 그는 심심산중에서도 천리밖의 한성 일까지 그토록 환할가.
《총각이라면 몇가지 시험을 더 치련만… 그만하겠소. 그대는 의원이라면서 나한테 무얼 바라기에 그 먼 함흥에서 찾아왔소?》
리제마는 드디여 바라는바를 알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활랑거렸다.
《저… 소인이 바라는건 바로 사람의 체질을 어떻게 나누며 사람의 체질에 맞게 약을 쓰는 비결을 알고저 하는것이옵니다.》
《장성의원》은 간절한 눈빛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제마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내 눈길을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감탄조로 말하였다.
《젊은 나이에 그런 일감을 찾았다는건 대단한 일이요. 하지만 내 이 자리에서 단언하건대 그대가 바라는걸 가르쳐줄 사람은 아직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거라는거요.》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눈을 떴다.
《무평! 집을 떠난지 몇해 되였소?》
《한성에서 한해, 공주에서 삼년 묵었소이다.》
《4년이라… 음, 알겠소. 그대는 집을 떠나다니면서 지대에 따른 풍토차이로 하여 사람들에게 생기는 병도 서로 차이가 있다는것을 알아차렸을것이요.》
리제마는 상대를 신통하게 알아맞추는 《장성명의》의 재주에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아마 몇해만 더 객지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느라면 반드시 체질에 따라서 뭔가 깨닫게 될것이요. 물론 집에 돌아가서도 체질을 파고들수 있지만 함흥보다 비할바 없이 호구가 많고 병자도 많은 전라도에서라면 지름길이라고 할수 있소.
전라도의 고을들은 대개 벌이 넓고 서해와 남해의 바다바람이 세게 미치고 우리 나라에서 제일 더운지라 이런저런 병이 많소.
그대가 3년만 전라도의 고을들을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돌봐주다가 날 다시 찾아온다면 나도 그댈 힘자라는껏 돕겠소. 그래 어떻소?》
그 말에 리제마는 한동안 억이 막혀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지금껏 4년이나 객지살이를 했는데 또 3년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 리제마의 뇌리에는 잊지 못할 스승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평》, 《동무》라고 자와 호를 지어주던 기로사와 《포태선생》들의 간곡한 당부의 말들이 그의 가슴에 쾅쾅 미쳐왔다.
아, 뜻하는바를 이룰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을 주저한단 말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뜻을 이루고 돌아가야 한다.
리제마는 《장성명의》앞에 꿇어엎드려 또박또박 씹어 말했다.
《선생님의 분부를 받들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