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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는 가라말을 팔아 부담짝을 싣고다닐 하늘소 한마리를 사고 남은 돈은 모두 고재봉에게 떨구어주었다.
그의 손녀 을순이와의 리별은 눈물겨웠다. 을순이 이제 겨우 처녀꼴이 잡혔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것이 장차 앞 못 보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떻게 살아가겠는지…
리제마는 부모된 심정에서 을순이에게 금은화꽃무늬가 새겨진 은가락지 한쌍을 사주었다.
녀인들은 두개가 한쌍으로 된 가락지를 흔히 옷끈에 매두었다가 뜻깊은 날에 같은 한손가락에 끼는 풍습이 있다.
리제마는 은가락지와 함께 의서 《부인대전》을 을순이에게 주었다.
《을순아, 지금 집에 갖춘 재물이면 두 식구가 몇해는 그럭저럭 살아갈수 있을게다. 너는 글을 배워 책을 읽을수 있으니 이 의서를 통달하여라. 부녀자들의 병을 고칠수 있는 이 의서를 통달하면 얼마든지 녀의가 될수 있다. …
그럼 네 힘으로도 살아갈수 있다.》
의봉은 홀로 리제마와 같이 떠났다.
의봉의 색시는 리제마의 말대로 함흥으로 가서 한옥이와 같이 살면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들은 새색시를 먼저 떠나보내고나서 《공주기인》과도 하직하였다.
로상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시 길을 떠나 어느 한 고개를 넘었는데 앞에서 타령소리가 들려왔다.
개천이다 넘어서라 응
한다리를 잘숨하고
굴렀다가 성큼 넘어서라 응
오르막길 돌우 밟아라 응
꼬불꼬불 산길이다
길 앞쪽에 가마를 멘 사람들이 보였다.
뉘 집의 고운 딸이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모양이였다.
의봉이 싱글벙글하며 길옆으로 하늘소를 끌어당겼다.
신랑신부의 행차가 길에 나타나면 나이많은 사람이든 벼슬아치든 그들에게 길을 내여주는것이 조상전래의 풍습이다.
이윽고 신랑신부의 이채로운 행렬이 지나가자 리제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 있으면 해가 떨어질것이다. 어제 아침 공주를 떠나 80리를 축내고 신기령고개를 넘어와 쉬고 오늘도 그만큼 걸었으니 여기는 론산고을지경일것이다.
리제마는 길옆의 마을을 가리켰다.
《저 마을에 들어가 하루밤 신세를 집세.》
《예.》
리제마가 찾아든 집은 우곤마을의 가녁에 있는 초가집이였다. 초가집이긴 해도 아래웃방이 다 삼간이고 너렁한 사랑방까지 붙어있는 큰집이였다.
리제마가 안방에서 집주인들과 저녁을 먹고있는데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알고보니 저녁이면 이 집의 사랑방에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옛말이야기를 듣는다는것이였다.
마을에 유명한 이야기군이 있어서 어떤 날에는 이웃마을들에서까지 사람들이 밀려온다고 집주인은 자랑조로 말하였다.
리제마는 호기심이 동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고저 갓을 벗어놓고 망건바람에 사랑방으로 건너갔다.
의봉이도 따라왔다.
사랑방은 안방보다 두곱 실히 커보였다. 이 집이 종가집이라더니 제사날 온 문중이 다 모일것을 타산해서 크게 지은것 같았다.
넓은 방에 사람들이 비좁게 들어앉았다. 리제마는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에 매달린 등잔불에 아래목에 앉은 이야기군이 보였다.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다북진 수염이 검은것을 보아 아직 환갑전 같았다.
《어험?》
이야기군이 헛기침을 한번 깇자 술렁이던 방안이 조용해졌다.
《에? 이제 며칠 안 있으면 봄소나기가 쏟아질걸세. 봄소나기는 삼형제라, 어김없이 세번 쏟아지고야 걷힌다네. 그런데 대체 소나기란 무슨 말인가? 이 자리에 그 말뜻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보지!》
방안에는 숨소리만이 들리였다.
《허? 다들 말하기가 싫은가본데 내가 대신 말해주지.》
이야기군은 한손으로 수염을 어루만지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옛날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였네. 어떤 늙은 승려가 시주받은 쌀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다가 원집(려행하는 사람들이 묵어가는 집)을 만나 그 집 마당에서 쉬고있었네.
그때 농군들이 소를 가지고 밭일을 하다가 거기에 와서 함께 쉬게 되였지.
농군들은 하늘도 무심하게 비를 내려주지 않아서 올농사를 망치게 되였다고 탄식을 하는데 덤덤히 앉아 듣기만 하던 승려가 자기가 입고있는 장삼을 만져보더니 이제 곧 비가 올거라고 하였네.
원 참, 하늘엔 구름 한점 없는데 비가 온다고 하니 농사군들은 정신나간 소리를 한다고 했지.
승려는 고집스레 비가 온다고 하고 농사군들은 그들대로 청청하늘인데 무슨 도깨비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우기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소임자인 농군이 <만일 스님의 말대로 비가 오면 난 내 집 소를 내놓겠소.>라고 했다네. 승려는 승려대로 <비가 오지 않으면 소승은 쌀바랑도 바치고 한두해 그대의 집에서 일해주겠소.> 하여 내기가 벌어졌지.
시간이 흘러 해가 서산쪽으로 기울려는데 난데없이 하늘로 먹장구름들이 밀려드는것이 아니겠나. 여기에서 번쩍, 저기에서 번쩍 번개불이 일고 천둥소리 요란터니 대줄기같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네.
그만에야 농사군들은 머리를 숙이고 승려에게 비가 올줄 어떻게 알았는가고 물었네.
승려는 웃으며 <소승은 옷을 자주 빨아입지 못하여 늘 땀에 옷이 절어있지요. 땀은 곧 염기라, 그러니 옷에 누기가 닿으면 눅눅해질것이 아니겠소. 아까 장삼자락을 만져보니 몹시 축축하기에 인차 비가 올줄 알은거요.> 하고 대답했네.
내기에서 진 소임자는 소를 내놓았네.
소고삐를 받아쥐였던 승려는 다시 그걸 주인에게 넘겨주며 말했네.
<이 소를 도로 드리겠으니 농사를 잘 지으소. 소승에겐 소가 아무 소용없지만 농사군들에게야 소보다 더 요긴한 물건이 있겠소?!>
승려가 쌀바랑을 지고 일어서는데 억수로 쏟아붓던 비가 뚝 그치고 언제 비가 왔더냐싶이 하늘이 청청해졌지.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여름날에 갑자기 쏟아지다가 뚝 멎는 비를 가리켜 소를 걸고 내기를 한 비라는 뜻에서 <소내기>라고 하였다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소내기>란 말이 <소나기>로 변했지.》
《하, 그것 참!》
사람들은 탄성을 올렸다.
리제마도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숱한 책을 읽었지만 《소나기》란 말뜻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야기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마수거리얘기는 이만하고 그럼 어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합세. 어젠 리태조(리성계)가 고려의 마지막임금이였던 공양왕을 페위시킨데까지 얘기했지.
에? 임금이 된 리태조는 어느날 심심풀이삼아 개국공신인 삼봉(정도전)을 불러 8도사람들을 평가해보라고 분부했다네.
삼봉이라고 하면 개국공신들중에서 제일 똑똑한 똑똑이요, 꾀가 많기로 소문난 꾀바리라 마치 그렇게 말하라고 할줄 알고있기라도 했던듯 별로 생각을 더듬지도 않고 입을 열었네.
<전하! 경기도사람들은 경중미인이라 할수 있고 충청도사람들은 청풍명월, 전라도사람들은 풍전세류에 비길수 있소이다. 그리고 경상도사람들은 송죽대절, 강원도사람들은 암하로불, 황해도사람들은 춘파투석이라 할만 하며 평안도사람들은 산림맹호라 일컬을수 있소이다.>
삼봉이 한 말을 풀면 경기도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미인이요, 충청도사람들은 맑은 바람속의 밝은 달과도 같으며 전라도사람들은 바람앞의 가는 버들이란 뜻일세. 그리고 경상도사람들은 소나무와 대나무와 같은 큰 절개를 가졌다는 뜻이고 강원도사람들은 바위아래의 늙은 부처와도 같으며 황해도사람들은 봄물결에 돌을 던지는듯 하고 평안도사람들은 숲속의 호랑이와 같다 이 말일세.
리태조가 다음말이 마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삼봉은 갑자기 혀가 굳어졌는지 함구무언이겠지. 리태조는 자기가 태여난 함경도에 대해서만은 말하기를 꺼려하는 삼봉에게 아무 말이든 좋으니 어서 생각하는바를 털어놓으라고 재촉하였네. 그제야 삼봉이 대답하기를 <함경도는 니전투구올시다.> 하였다네.
그 말에 리태조의 얼굴이 시뻘개졌네.
어찌 그렇지 않겠나. 함경도사람들은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와 같다 하니 이거야말로 리태조가 그렇다는 소리가 아닌가.
눈치빠른 삼봉이 다시 말하기를 <그러하오나 함경도사람들은 또한 석전경우(돌밭을 가는 소)라고도 할수 있소이다.>라고 하였다네.
그날 리태조는 기분이 좋아져서 삼봉에게 후한 상을 내리였다네.》
리제마는 여러 력사책들에서 읽어 아는 이야기였지만 마실방에서 구수하게 들으니 감흥이 새로웠다.
그후 률곡 리이(1536-1584)가 경상도의 험준한 산세를 돌아보고 《태산교악》(험준한 산비탈과 괴암절벽처럼 성격이 드세고 거칠다는 뜻)이라고 하여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다.
이야기군의 이야기는 리제마에게 의미심장히 들리였다.
8도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그의 말은 사람들의 체질을 옳게 가르고 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일깨움인듯 하였다.
그렇다. 사람들의 병을 잘 고치려면 그들의 체질부터 옳게 가려볼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체질을 갈라보아야 하는가.
《8도체질?!…》
의봉이 《선생님!》 하고 거듭 불러서야 리제마는 마을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너렁한 큰방에 둘만이 남았음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웠으나 리제마는 쉬이 잠들수 없었다.
머리속에는 사람의 체질을 어떻게 가르며 그 체질에 맞게 약재들을 어떻게 구별해놓을수 있을가 하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