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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겨울이 지나가고 새봄을 알리듯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고있었다.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들판에서 진종일 농사일로 몸이 고단해진 사람들에게는 아침일찍 깨여나는 일이 여간 헐치 않았다.

바로 이러한 때 함흥부의 지락마을에서 선참으로 깨여나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 아이는 리진사집 장손 제마였다.

마을에서 제일먼저 깨여날수 있은것은 할머니 김씨가 마련해준 상계침이라는 기이한 베개가 있어서였다.

《꼬끼요?》

오늘도 꼭두새벽에 제마의 곁에서 상계침속의 서리닭이 홰대에 올라있는 수닭들보다 먼저 거센 청을 돋구었다. 몸은 작지만 제법 호기있게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자정이 넘도록 책을 읽고 업어가도 모르게 굳잠에 떨어졌던 제마는 방안을 울리는 서리닭소리에 이불을 걷어찼다.

김씨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태를 바로잡았다.

제마는 눈을 비빈 다음 상계침안에서 푸드득대는 서리닭을 굽어보았다. 널판자로 속을 비게 만들고 그안에 서리닭을 넣은 베개가 상계침이다. 대개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에 깨워 기른 닭은 여느 닭보다 몸집이 훨씬 작다. 몸집이 작아진 그 가을닭에서 다음해 서리철에 또 알을 받아 깨우면 보다 몸집이 작아지는데 기껏해서 까치보다 좀 클사 하다. 이런 닭이 바로 서리닭이다.

몸집이 작아진 서리닭은 새벽이면 기막히게 홰를 잘 치며 운다.

그래서 시계가 없던 옛날에는 집집들에서 서리닭을 길러왔다. 서리닭은 꼭두새벽이면 어김없이 울어 아무리 곤하게 자던 사람일지라도 깨여나게 한다.

김씨는 밤늦도록 책을 읽는 어린 손자가 늘 잠이 모자라 하는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인재로 키우려면 그만한 고생은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계침을 마련해준것이였다.

쿨럭? 쿨럭?

김씨는 가슴을 붙안고 한참 기침을 깇었다.

그 소리에 제마의 마음은 아파났다.

요즘 할머니에게 무슨 병이 생긴것이 분명했다.

사람에게 왜 병이 생기는것일가. 병이란 정말이지 참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수 없다.

제마는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것인지 잘 안다.

지난해 여름이였다. 그때 제마는 살구를 먹고 배가 너무 아파 마루에서 데굴데굴 굴었다.

선 살구를 먹고 체했다는것을 안 할머니는 제마의 배를 쓸며 이런 노래를 불러주었다.

 

배야 배야 자라배야

무슨 자라 업자라

무슨 업 천지업

무슨 천지 고천지

 

신기하게도 두식경쯤 지나자 그렇게도 아프던 배가 편안해졌다.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였고 할머니가 부른 노래도 신비로운 노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할머니가 병에 든것이였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병을 고쳐줄수 있을가.

《할머님, 좀더 누워계시오이다.》

《원 녀석두, 네가 벌써 할미걱정을 다 하고. 얘야,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달리기나 하려무나.》

《예.》

김씨는 저고리를 찾아입는 제마를 보며 련민의 정으로 눈물이 났다.

젖을 제대로 먹여야 몸이 튼튼해지는것인데 동냥젖으로 간신히 목숨을 살리였으니 다른 아이들과 달리 뼈도 가늘고 키도 작은 제마다. 그래서 겨울이면 기침병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어떻게 하면 저 아이를 튼튼하게 키울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다가 아침달리기를 시킨것이였다.

제마는 찬바람이 들세라 얼른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두주먹을 쥐고 반룡산(오늘의 동흥산)을 향해 삽짝문을 뛰쳐나갔다.

반룡산에는 구천각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왕복 시오리길이다.

구천각을 바라보며 달리는 리제마는 고향의 유래에 대하여 더듬어보았다.

고구려에 이어 고향 함흥은 발해의 남경 남해부에 속했었고 고려때에는 동북면의 중심지였다. 그때에는 《큰 벌》이라는 의미를 담아 함주라고 불리웠다. 리조에 들어와 함주는 흥하는 고장이라는 뜻을 보태여 함흥이라 개명하였다.

벌써 제마는 반룡산으로 접어들고있었다.

부전령산줄기의 금패령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가지산줄기의 끝에 반룡산이 솟아있고 거기에 함흥성이 있다.

함흥성은 고려때(1108년) 명장 윤관이 근 20만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변방을 유린하는 외적을 멀리로 내쫓고 쌓은 9개 성의 하나이다.

반룡산기슭에는 함흥감영이 있다. 함경도 관찰사가 정사를 보는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급관리들이 일을 보는 영리청, 장청각, 비장청이며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물을 받아들이는 진상청, 조세를 맡아보는 도리청, 관찰사의 의복을 짓는 영고청, 약재를 모아들이는 심약청들이 웅장한 합각, 우진각, 배집지붕을 떠이고 키돋움을 한다.

땀을 흘리며 반룡산마루로 뛰쳐오른 제마는 구천각의 기둥을 와락 끌어안았다.

목에서는 겨불내가 확확거렸지만 기어이 할머니의 뜻대로 몸을 굳세게 단련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

오늘 아침에는 서리닭이 울지 않았다. 뜻밖에 서리닭이 죽은것은 아니고 제마가 병환에 시달리는 할머니를 걱정하여 없애버렸기때문이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꼭꼭 울군 하던 서리닭이 없었지만 제마는 자기스스로 깨여났다.

그는 부스럭소리가 날세라 조심히 저고리를 찾아들고 무릎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는 제마를 처음부터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 김씨였다.

김씨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의 병세가 대단히 심상치 않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집식구들 모르게 의원을 찾아가 병을 보이였더니 그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적취(배안에 덩이가 생겨 아픈 병증)에 들었다고 했다.

적취는 주로 나이많은 사람들이 잘 걸리고 걸리면 대개 죽고만다. 불치의 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씨의 병세를 어떻게 알았는지 기로사가 병문안을 오면서 두릅나무껍질이며 산죽을 비롯한 적취에 쓰는 약재를 가져왔다.

약을 달이는 일은 제마가 자진하여 맡았다.

장손이 달여주는 약물을 받아마실 때면 기특하여 기쁘기도 하고 한편 구슬퍼지기도 하는 김씨였다.

그 까닭은 자기 병때문에서만이 아니였다.

한달전에 아들 리반오의 본댁이 몸을 풀었다. 둘째손자가 태여난것이였다.

못쓰겠다고 내버렸던 밭아닌 돌서덜밭에서 땅이 꺼지게 풍년이 들었다는만치 아들 본댁이 자식을 본 일은 참말이지 희한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외독자가문에 그렇게 바라고바라던 새 식솔이 하나 더 늘었으면 응당 웃음이 넘쳐나야 하는데…

하건만 김씨는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신동으로 알려진 제마의 장래가 걱정되여서였다.

이제는 저세상사람인 리진사는 제마가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기에 서자일지라도 집안을 상속받을수 있고 가문의 대를 이어 문과에도 나갈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본댁에서 아들자식이 태여났으니 제마는 집안의 상속도 받을수 없고 문과에도 나갈수 없게 되였다.

둘째손자가 태여나지 않았더라면 제마는 얼마든지 문과에 나가 문관으로서 립신양명을 이룰수 있을것이다.

나이는 속일수 없다고 제마가 아직은 어려서 읽은 책들에 심어진 뜻까지는 다 받아들일수 없어도 글귀들은 머리속에 새겨져있을것이다. 그렇다면 제마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김씨는 요새 이 한가지 생각으로 근심하고있었다.

이제 이 늙은 할미마저 세상을 버리면 필경 제마의 글공부는 끝장나고말것이다. 아비 리반오가 문과에로의 길이 막혀버린 제마를 더는 공부시키자고 안할것이니까.

어미도 없고 아버지라 부를수 없는 아비밖에 없으니 그럴바 치고는 차라리 령감의 막역지우인 기로사에게 그애를 내주는것이 옳지 않을가.

기로사야 사람됨이 나무랄데 없고 함흥일판에서 그만큼 학식도 깊고 뜻도 높은 인물이 없으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마의 앞길을 밝게 해줄수 있다.

저승에 가서 기로사에게 보은하기로 하고 그에게 제마를 맡기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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