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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는 뛰다싶이 앞서 걷는 귀동이를 따라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효가마을은 공주 동쪽으로 고재봉의 집에서 10리가량 떨어져있었다.
알아보니 동병상련(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이 서로 가엾게 여기는것)이라고 적취에 걸려 고생하던 효가마을로인은 자기 병이 눈에 띄우게 차도가 생기자 다리병으로 걷지를 못하는 옆집 처녀를 동정하여 귀동이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던것이다.
처녀는 타고난 앉은뱅이는 아니였다.
집이 몹시 구차하여 어렸을적부터 삯빨래를 하였는데 몇해전 멀쩡하던 다리가 점점 쑤셔나기 시작하며 참을수없이 고통스럽더니 이내 걸을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주저앉아버리게 되였다.
사람이 천냥이면 눈이 팔백냥이라지만 그건 다 두다리가 온전할 때 하는 소리다. 두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은 날개잃은 새와 같으니 그런 인생은 얼마나 가긍한가.
시집갈 나이에 두발이 묶이워 구들신세를 지고있으면 본인당자도 그렇겠지만 부모된 사람의 가슴엔 재가 한가득 차있을것이다.
《선생님! 이 마을이오이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초가집들이 웅기중기 들어앉았는데 가지가 휘여지도록 감이 주렁진 감나무들로 가려있었다.
처녀의 집은 마을에서 한 변두리 개울옆에 있었다. 삽짝문이 활짝 열려진 마당에서 사람들이 서성대며 이쪽을 바라보는것으로 보아 인차 오마고 한 귀동이의 말을 믿어 기다리는것이 틀림없었다.
리제마는 방에 들어가 처녀의 곁에 앉았다.
귀동이도 집식구들도 가슴을 조이며 리제마를 지켜보았다.
처녀를 망진(살펴보는 진찰방법)하는 리제마는 가슴이 저려와 숨소리까지 거칠어졌다.
처녀는 열여섯이나 열일곱살 나보이는데 여위고 창백하지 않다면 절색이라 할만 했다. 꽃같이 한창 피여야 할 나이에 된서리를 맞다니.
처녀의 다리는 허벅살이며 장딴지살이 다 빠져버려서 마치나 학의 다리같았다.
사람의 다리를 학의 다리처럼 되게 하는 병을 학슬담(슬관절결핵)이라고 한다.
여직껏 병을 보아오면서 학슬담에 걸린 병자는 책에서나 읽었지 처음 본다. 그래서 긴장이 앞서고 당황해졌다.
《선생님!》
귀동이 리제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돋는 땀을 수건으로 훔쳐주며 나직이 불렀다.
리제마는 중병에 든 병자들을 상대할 때면 온 정신을 모아서인지 땀을 잘 흘린다. 그럴 때면 귀동이 땀을 닦아주면서 나직이 불러 그의 마음을 늦추어주군 하였다.
리제마는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또다시 처녀의 무릎을 들여다보았다.
두 무릎이 하나같이 험하다. 퉁퉁 부은 그가운데에 구멍이 뚫리고 거기로 멀건 고름이 흘러나온다. 헌데 구멍의 주위는 거무스름하면서도 푸르스름하고 오래전에 돋아나온듯 한 새살은 오무라들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손에 땀을 쥐고 물었다.
《의원님! 어떻소이까?》
리제마는 대답을 피했다. 학슬담에 걸린 병자와 처음 맞다들렸어도 어찌 이 병의 예후를 짐작하지 못하랴.
병자는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다. 지난해 이맘때쯤만 보았어도 걱정말라고 큰소리를 쳤을것이다.
한겨울에도 매일같이 개울에 나가 얼음물에서 삯빨래를 하였다니 류담(골관절결핵)을 일으키는 한사가 가죽을 뚫고서 살을 지나 오늘은 뼈속에까지 스몄다고 할수 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기껏 한해나 두해쯤 견디여내겠는지…
리제마는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죽은 사람이라 제쳐놓는 적취에 든 병자도 살려낸 의원이 찾아왔다고 식구들은 안도의 숨을 쉴것이다. 그런데 손을 털고 돌아가야 하니 기가 막혔다.
리제마는 온 정신을 모아 머리속에 가득한 의서들을 번져나갔다. 지금이야말로 오늘껏 의술을 다져온 두뇌를 써먹어야 할 때다.
흔한 병에 따르는 약처방들은 익어져서 그런것을 되살려내는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직 한번도 손대보지 못한 병자를 앞에 두니 약처방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학슬담에 명처방이 뭐더라. 언제인가 학슬담의 처방을 분명 어느 의서에서 읽어보았다.
귀동은 두눈을 꾹 감고앉아 아무 말없는 리제마를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스승이 병자를 앞에 놓고 입을 다문채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었던적이 있었던가. 한번도 없었다. 스승이 자신이 없어 저러는걸가. 그렇다면 처녀는 죽은 목숨이다. 기가 막혔다.
귀동이 안타까운 나머지 처녀를 들여다보며 눈물이 글썽해할적에 리제마는 비상한 의지로 머리를 더듬고있었다.
몇책의 의서를 본 그속에서 약처방을 찾아낸다면 이렇게까지 힘에 부치지는 않을것이다. 10여년세월 번지고번진 숱한 의서들속에서 단 하나의 묘방을 찾아낸다는것은 넓은 풀밭에 떨군 바늘을 찾아내는것만치나 어려운 일이다.
어떻든 처녀가 골병에 들어 기와 혈이 다 허손되였으니 무엇보다 자양에 좋은 보약을 써야 한다. 그것도 기와 혈을 함께 보하는 보약이라야 한다. 그런 보약으로는 인삼이 들어간 십전대보탕이 안성맞춤할것이다. 딱히 어느 의서라고 찍어 말할수는 없어도 하여간 읽어본 글줄이 뇌리에 살아났다. 은시호, 황련이 들어간 청목산이란 처방이였다. 이것을 골자로 하여 다리마비를 풀수 있는 두충같은 몇가지 약재를 더 넣은 새로운 약처방이 풀려나왔다.
리제마는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다들 근심마소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처녀의 아버지는 리제마앞에 엎드렸다.
《의원님! 고맙소이다. 고맙…》
말끝을 흐리는 처녀의 아버지를 보는 리제마의 눈에 이슬같은것이 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