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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도록 길을 재촉하여 다음날 점심녘에 공주읍거리로 들어선 리제마와 귀동은 맞다들리는 사람들에게 고재봉의 집을 물었다. 《고의원》이라고 하니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재차 고재봉을 찾는다고 하자 《아, 고봉사!》 하면서 그의 집이 어디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고봉사》라니? 왜 그렇게 부르는것일가. …
고재봉의 집은 부여고을로 가는 큰길옆의 장거리근처에 있었다.
그 집앞에서 리제마는 어리둥절하였다.
강대나무같이 앙상해빠진 대추나무가 뜨락에 서있는 집을 고재봉이네 집이라고 하는데 정말 이런 집에서 《공주기인》같은 한다하는 의원이 산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삽짝문마저 떨어져나가서 없고 울바자는 그루터기만 남았다.
초가이영이 삭아 퇴비더미같이 되여버린 지붕우에서 말라죽은 쑥대들이 바람에 떨고있었다. 방문이며 부엌문이며 하나같이 찌글써하고 토방은 반나마 무너져내렸는데 처마의 서까래들엔 거미줄, 철매(그을음)가 엉겨붙어 귀신이 사는 산신당같아 보였다.
역시 눈이 휘둥그레 있던 귀동이 소리쳤다.
《의원님! 계시오이까?》
《…》
응답이 없는것을 보면 분명 허튼데로 온것 같다. 장거리로 돌아가야겠다.
리제마는 장거리에 들려 술장사에게 청주 두동이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귀동이 지꿎게 소리쳤다.
《주인님! 주인님 계시오이까?》
집안에서 처녀애의 응답이 새여나왔다.
《할아버지, 밖에 누가 찾아왔어요.》
《허? 우리 집에 누가 찾아오겠느냐?》
《틀림없이 우리 집을 찾는 소리예요.》
《그렇다면 나가보려무나.》
방문이 열리더니 《누굴 찾으시나요?》 하는 초랑초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리제마의 얼굴에 웃음이 실렸다. 눈을 올롱히 뜨고 문앞에 나와선 계집애는 퍽 귀염성스럽게 생겼다.
《너의 할아버님이 의원이시냐?》
처녀애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의원이 아니와요.》
그러니 진짜 집을 잘못 찾아왔구나. 그럼 그렇겠지. 한다하는 《공주기인》이 이런 오막살이같은 집에서 살수가 있나.
《그럼 잘 있거라.》
리제마가 돌아서려는데 《가만! 길손은 누구를 찾소?》 하는 웅글은 목소리가 방안에서 울려나왔다.
리제마는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 마음이 끌렸다.
《예, 함자는 고재봉이라는 의원을 찾소이다.》
방문을 나선 로인이 처녀애의 손목을 잡고 다시 물었다.
《고재봉은 왜 찾소?》
《예, 저는 한성에 계시는 혜암선생님의 제자인데 그분의 친구되시는 고의원을 만나고저 하오이다.》
《내가 고재봉이요.》
리제마는 믿어지지 않아 토방에 선 로인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사람의 배속까지 척척 들여다본다는 의원의 집꼴이 이럴수 있는가. 몸에는 누덕누덕 기운 베옷을 걸치고…
귀동이 슬며시 다가와 리제마에게 조용히 귀띔하였다.
《선생님, 이 집 할아버님이 앞을 보지 못하는것 같소이다.》
《?…》
《바로 보았네. 난 눈먼 사람일세.》
앞을 못 보는 사람은 귀가 밝다더니 고재봉은 귀동이 귀띔하는 말을 가려들은것이였다.
아, 《공주기인》의 눈이 멀다니. 그래서 사람들이 《고봉사》라고 하였구나.
《의원님!》
리제마는 목이 메여 두손으로 고재봉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두사람이 손을 잡고 인사말을 나누는 사이 귀동이는 장거리에서 받아온 음식들을 방안에 차리였다. 술동이까지 있어 그만하면 괜찮게 차린 점심상이였다.
음식상에 둘러앉아 리제마가 대접에 술을 붓는데 고재봉이 손을 내저었다.
《난 술을 못하오.》
리제마는 가슴이 덜컥하였다. 갑자기 무슨 언짢은 일을 당했기에 《술고래》라는 사람이 딱 잡아떼는걸가.
《다르게 생각지 마오. 세상이 날 보고 술도깨비라느니 술이 길다느니 했지만 난 술을 끊은지 오래오. 더구나 오늘이야 혜암이 보낸 귀인을 만난 날인데 이 기쁜 날에 정신이 흐려서야 되겠소?》
고재봉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강개한 어조로 말했다.
《혜암이 사람을 보냈으니 이젠 눈을 감아도 한이 없겠소.》
《의원님!》
《고마우이, 먼길을 와주어서. 난 혜암이 사람을 보내오기만을 학수고대해왔소. 내가 앞을 볼적에 써놓은걸 넘겨주지 못한다면 죽어도 어찌 눈을 감을수 있겠소? 이젠 됐소!》
고재봉은 앞을 보는듯 상을 가리켰다.
《먼길에 기갈이 심했을텐데 어서 드소.》
상을 물리자 고재봉은 장죽에 담배불을 붙여물고 살아온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고재봉은 소꿉시절에 황도연과 이웃에서 살았다. 어려서 량친부모를 다 잃은 그를 가엾게 여긴 숙부는 자기 자식들은 엄두도 못내는 서당에 넣어주었다. 거기서 고재봉은 황도연과 한자리에 앉아 글을 배웠다.
창원고을적으로 의술이 제일 높은 서당선생은 글눈이 뛰여난 그들에게 의술을 가르치였다.
하여 고재봉과 황도연은 승벽내기로 의술을 배웠다. 서당을 마치게 되였을 때 그들은 의원노릇을 할만치 의술이 괜찮았다.
늙어 운명하기에 앞서 서당선생은 총애하는 두 제자를 불러들이고 꼭 명의가 되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그날 두 제자는 눈물을 흘리며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름난 의원이 될것을 다짐하였다.
밥술이나 먹는 덕으로 황도연이 만사를 전페하고 의술을 닦을 때 가난한 고재봉은 낮에는 숙부와 함께 농사를 짓고 밤에는 의서를 읽었다. 그러다가 의금부 라졸로 뽑혀 한성으로 올라갔다. 그 이듬해 고재봉은 함께 군사를 살던 늙은 군졸의 중매로 공주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공주처녀는 늙은 군졸의 조카였다.
무슨 액운이 서리였는지 고재봉에게는 무서운 불행이 따라다녔다.
사위의 뒤바라지를 해주던 장모가 먼저 쓰러지더니 뒤따라 무던한 장인이 세상을 떠났다. 몇해후에는 안해마저 병들어죽었다. 할수없이 고재봉은 군사를 그만두고 어린 아들이 남아있는 공주의 처가집으로 내려왔다.
홀아비가 된지 얼마 안되여 고재봉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뜨고도 볼수 없는 폭맹에 걸렸음을 알았으나 가난에 쪼들리다보니 값비싼 약재들을 구할수 없었다. 앞을 보지 못하고서야 살아 무엇하랴.
고재봉은 죽고싶었으나 그렇게 할수 없었다. 어린 아들을 외로이 남겨두고 어떻게 목숨을 끊을수 있단 말인가.
심봉사가 심청이 기르듯 갖은 고생속에 힘겹게 키운 아들은 장가든 그 이듬해 성쌓는 부역에 나갔다가 무너져내린 바위에 깔려죽고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시름시름 앓던 며느리마저 딸 하나를 남겨놓고 지아비를 따라갔다. …
걷잡을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리제마의 얼굴을 푹 적시고말았다.
세상에 이런 기구하고 불행한 사람도 있을가.
밤이 깊어 자리에 누웠으나 리제마는 온밤 잠들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