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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열두달의 날수가 소털처럼 많아보여도 어떻게나 빨리 지나가는지 벌써 겨울이 달려들었다.
리제마는 오늘도 황도연의 집에서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아침밥을 제대로 못 먹기가 쉬웠다.
한성이라는데가 인총이 죽끓듯 하다보니 찾아오는 병자들이 끝이 없었다.
속탈로부터 눈병 지어는 검버섯이라는 면간증에 이르기까지 없는 병이 없었다.
아닐세라 숟갈을 내려놓기도 전에 대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갔는지 황도연이 벌써 대문을 열고있었다.
대문이 열리자 키큰 사내가 숨이 턱에 닿아서 뛰여들었다.
그 사내가 무엇이라 말했는지 황도연은 사색이 되여 리제마에게 소리쳤다.
《<함흥의원>! 급한 병자가 생겼네. 이 사람을 따라가주게.》
급한 병자라는 소리에 리제마는 제꺽 행장을 꿍져들고 뛰쳐나갔다.
키큰 사내는 앞에서 달리고 리제마는 그뒤를 바싹 따랐다.
남산골에서 곧추 북으로 달리니 탑동이 나졌다.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임금이 된 세조가 후날 그 죄를 부처에게서 용서받으려고 척불숭유(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것)의 시대에 어긋나게 세운 원각사란 사찰이 이제는 터만 남고 거기에 두개의 탑이 고스란히 솟아있는 탑동이였다. 그 탑동을 지나는 큰길을 따라 한참 달리니 이번에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나졌다.
키큰 사내는 돈화문의 서쪽에 있는 동네로 길안내를 하였다. 계동이다.
계동 한켠에 대문이 활짝 열려진 기와집이 있었다.
키큰 사내를 따라 그 집에 들어선 리제마는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답례를 차릴 사이도 없이 병자부터 찾았다.
병자는 안방에 누워있었는데 생각밖에 두세살이나 났을가 한 어린 사내아이였다.
리제마는 대뜸 그 아이가 경풍발작을 일으킨것을 알아보았다.
아이는 손발이 까드라들고 눈은 우로 치뜬채 이를 악물고있었다. 입술이며 얼굴은 파랗다못해 검퍼러해보였다.
리제마는 할머니임직한 늙은 녀인이 내여주는 자리에 앉아 아이를 찬찬히 살피였다.
눈의 흰자위는 퍼렇고 이마를 짚어보니 열은 세지 않은데 손발이 싸늘했다.
이런 경풍은 무엇에 크게 놀랐거나 무서워할 때 생긴다.
리제마는 들고온 침통에서 호침 세개를 꺼내 사내아이의 손목에 있는 간사혈과 머리의 백회혈 그리고 이마우의 상성혈에 사법으로 침을 놓았다.
사법이란 약하게 주는 침자극으로 허증을 다스리는 보법과 달리 실증을 대상하는 침구술로서 흥분된 상태의 병을 억제해주는 강한 자극료법이다.
좀 있어 사내아이를 들여다보던 집안사람들속에서 《야?!》 하고 경탄이 일어났다.
금시 죽을듯 의식을 잃고 경련을 하던 사내아이가 한잠 푹 자고난것처럼 눈을 빠금히 올려뜨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인차 자기 엄마를 알아보고 《엄마?!》 하고 가는 목소리를 내는것이였다.
리제마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까지 침묵속에 리제마를 지켜보던 한 늙은이가 그의 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의원님! 고맙소.》
리제마는 이런 경우가 흔하다보니 별로 생각없이 말했다.
《웬걸요. 제 인차 우황포룡환을 지어보내겠소이다. 그 약까지 써야 경풍발작을 아예 없앨수 있소이다.》
《허? 이렇게 급하다구야. 이왕지사 예까지 왔던김에 내 병도 좀 보아주지 않겠소?》
키큰 사내가 귀속말로 귀띔했다.
《의원님, 이분이 바로 환재선생님이올시다.》
리제마는 놀라웠다. 환재라면 연암 박지원의 손자되는 박규수(1807-1876)대감이다.
리제마는 마음속으로 공경해마지 않던 연암의 후손과 만나게 될줄은 몰랐다.
박규수를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가앉은 리제마는 그의 신색을 살피였다.
참말 박규수의 몸에 병색이 진하였다. 눈의 흰자위가 생기가 없이 뿌한것은 이번에 머나먼 청나라의 연경(베이징)을 다녀왔다니까 로상에 생긴 피로가 쌓여서 그럴수 있겠지만 눈까풀이 부어오른것은 심(심장)에 병이 생긴때문이고 입술이 튼것은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일것이다.
《환재선생님, 귀울이가 있겠소이다. 때때로 매미울음소리같은 귀울이가 들리는데 밤이면 더 심할줄 아오이다.》
박규수의 눈이 커졌다.
《정말 귀신같군! 난 그 귀울이때문에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르겠소. 약도 먹어보고 침도 맞아보았는데 다 소용없더군.
이번 사신길에 명의라는 청나라의원에게 보였더니…》
리제마는 다음말을 기다렸다. 청나라의원들이라면 의술에서는 제노라 하는 사람들이다.
《헛참, 그 사람 하는 말이 귀울이에는 약이 없다는것이 아니겠소?》
리제마는 박규수의 손목을 잡고 맥을 보았다. 짐작한대로 맥은 가늘게 뛰였다.
물어보나마나 박규수는 허리도 다리도 시큰거리고 맥이 없을것이다. 그러니 병은 신허증에 속하는 귀울이다.
청국의원의 말대로 그 나라에서는 이런 귀울이를 가리켜 난치의 병이라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허임(1570-1647)이 《침구경험방》에서 귀울이를 고치는 비방을 밝혀놓았다.
귀울이의 진단은 귀와 잇닿아있는 경락의 침혈들에 감촉되는 응어리가 있고없음을 보고 알아낼수 있다. 만일 응어리가 생겼다면 침을 놓아 그것을 풀어없애야 한다. 그러면 응어리때문에 막혀버렸던 기혈과 진액이 잘 흐르게 되여 귀울이는 곧 없어진다.
리제마는 침을 놓기에 앞서 황도연이 한 말을 상기해보았다.
그는 병을 고치는데서 약이 절반이고 정신이 절반이라면서 명의라면 손을 쓰기에 앞서 병자의 마음을 끌어당길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야 병을 더 손쉽게 고칠수 있다고 했다.
《환재선생님은 청나라사람들이 천하명의라고 떠받드는 편작 (중국의 전설적인 의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이까?》
《글쎄,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고보니 뭐라고 해야 할런지. 하여간 그런 명의가 세상에 있었던것만으로도 병자들에겐 위안이 될거요.
편작이 뭐라고 말했더라. 그렇지, 생각이 나누만.
병이 가죽에 머물러있을 때에는 달인 약이나 구운 약으로 효험을 볼수 있으며 병이 혈맥에 들어있을 때에는 쇠침이나 돌침이 아니면 효험이 없으며 병이 위장에 들었으면 또한 달인 약으로 효험을 볼수 있지만 그것이 골수에 스민 다음엔 설사 목숨을 맡은 귀신일지라도 어찌할수 없다고 말한것 같소.》
《선생님! 우리 고려의 명의 설경성(1237-1313)어른은 이웃 나라에서 모든 의원들이 난치라며 손을 털고 나앉은 원세조의 병을 말끔히 고쳐주어 박달겨레의 슬기와 재능을 떨쳤소이다.》
박규수는 리제마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껄껄 웃었다.
《좋소, 좋아. 청국의원들도 못 고친 내 병을 그대가 고치리라는걸 믿겠소!》
리제마는 침착하게 귀울이와 련관되는 침혈들에 하나하나 침을 꽂아나갔다. 귀방울아래의 예풍혈과 손등의 완골혈에서 응어리같은것이 감촉되였다.
리제마가 그 침혈들에 침을 꽂아주고있는데 박규수가 말했다.
《그댄 어느분에게서 침구술을 배웠소?》
《예, 소인은 허임선생에게서 배웠소이다.》
《허임? 허임이 언제적 사람이라고 그분한테서 침구술을 배웠단 말이요?》
허임은 미천한 출신으로서 명의로 이름을 날렸던 삼백년전의 사람이다.
《허임은 이전의 의서들에서 잘못된 경혈(침구멍)들의 자리를 바로잡기도 하고 새 경혈을 찾아내기도 하였소이다. 선생이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독특한 침구보사법을 담고있어 침구의서들가운데서 제일 가치있는 책으로 평가되고있고 이웃나라들에서는 둘도 없는 보배로 여겨 거듭 찍어내고있소이다.》
《아, 알만 하오. 그러니 의서에서 배웠다 그 말이겠군.》
리제마는 침을 꽂은지 일각(15분)쯤 지나서 뽑았다.
《차도가 있소이까?》
박규수는 몇번이나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이어 희색이 만면해졌다.
《허, 조화는 조화로다. 그 몹쓸 귀울이가 땅으로 잦았나 하늘로 날아났나. 과연 그대의 재주엔 귀신도 울고 가겠소.》
《좀 있으면 귀울이가 다시 날것이옵니다. 그렇다고 실망해하실것은 없소이다. 닷새에 한번씩 소인이 찾아와서 침을 놓겠으니 그렇게 몇번 하면 귀울이를 뚝 떼버릴수 있소이다.》
박규수는 리제마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대 혹시 리상로(고려명의)의 환생이 아니요?》
박규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리제마를 굳이 눌러앉히고 점심식사를 함께 하였다.
음식상을 내여가자 박규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성에서 박규수만큼 학식이 깊고 견문도 넓어서 대세를 가려보는 눈이 밝은 재사는 많지 못하다.
박규수는 일찌기 할아버지로부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부패하고 낡아빠진 조정을 개혁하고 렬강들처럼 새로운 국가제도를 세워야 한다는 개화의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청나라의 실태부터 알려주었다.
영국이 강요한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국은 불평등한 《남경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로 하여 서방렬강들의 싸움판에 끌려들어 녹아나고있다.
이런 속에서 홍수전(1814-1864)이란 사람이 자칭 《천왕》이라 하고 민란(태평천국농민전쟁)을 일으켜 남경을 점령하였다.
홍수전은 《땅이 있으면 같이 경작하고 밥이 있으면 같이 나누어먹고 의복이 있으면 같이 입고 돈이 있으면 같이 씀으로써 불공평한 일이 없도록 하여 배고파하거나 추워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는 《천조전무제도》란것을 공포하여 민심을 얻은 결과로 일시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지만 부하들의 권력싸움이 터져 태평천국은 급속히 쇠약해졌다.
박규수는 한숨을 쉬고나서 청나라의 태평천국을 놓고보아도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세우는 일이 간단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앞으로 국운이 기울고있는 청나라보다도 태평양건너에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조선에 제일 큰 위협을 줄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위력한 병선들을 끌고가서 왜나라를 굴복시킨 미국이 《조선개방안》을 가지고있다는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기때문이며 교활하고 포악한 미국이 왜놈들을 앞세우고 조선에 쳐들어올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라는것이다. 그러면서 박규수는 다가오는 전란을 막자면 온 나라가 잠에서 하루빨리 깨여나야 한다고 하였다.
리제마는 그 말에 기로사며 《포태선생》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들은 앞으로 꼭 외적들이 쳐들어올수 있다면서 그때에는 솔선 무과에 나가 급제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라고 하였다.
그렇다. 왜놈들이 이 땅에 기여들기 전으로 사람들의 체질과 그에 따르는 약처방을 빨리 밝혀내야 한다.
리제마는 날이 거의 저물어서야 황도연의 집으로 돌아왔다. …
리제마는 날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병을 보아주면서 틈이 나는대로 박규수가 빌려준 책 《과농소초》를 들여다보았다.
책은 필사본인데 박지원이 송도에서 동쪽으로 수십리 떨어져있는 궁벽한 산골짜기 연암협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어보고 쓴 책이였다. 의서도 병서도 아니였으나 제마는 읽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책속에 빠져들어갔다.
산이 깊고 험해서 종일 가도 사람 몇명 만나볼수 없고 산새소리만 들렸다는 연암협에다 박지원은 초막을 짓고 뙈기논, 뙈기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과농소초》에서 리제마의 심금을 울려준것은 논밭은 풍토가 차이나는데 그에 맞게 농사를 달리해야 한다는 박지원의 주장이였다.
논밭의 풍토는 벌방과 산골이 다르고 한마을에서도 음지인가 양지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고 지어는 한밭에서도 건습에 따라 달라지니 실농군이라면 마땅히 달라지는 풍토에 맞게 곡식종자도 골라심고 그 가꾸기도 달리하고 농쟁기까지 달리 써야 한다는것이였다.
지금까지 무심히 대해온 땅이 한밭에서도 풍토가 차이난다니 이것이 사람의 체질과 무엇이 다르랴. 또 논밭의 풍토에 맞게 농사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체질에 따라 약을 달리 써야 한다는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러니 농사군들을 도울 생각으로 다년간 산골벽촌에 나가 농사를 지어본 박지원처럼 자신도 병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더 깊은 의술을 련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곳에 든든히 발을 붙이고 사람들의 체질과 처방을 파고든다면 반드시 그에 대한 해답이 풀려나올수 있을것이다.
그동안 황도연의 밑에서 병치료를 하다보니 의술도 더 닦고 한성의 여러 의원들에게서 터득한바도 적지 않으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것 같았다.
봄도 되여오는데 집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자!
며칠후 리제마는 한성을 떠날 생각으로 황도연의 방을 찾아들어갔다.
《아, <함흥의원>! 내 그러지 않아도 그댈 부르려고 하였소. 이젠 그대가 사람의 배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볼 때가 된것 같소.》
리제마가 영문을 몰라하는데 황도연은 웃으며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는 겨울도 다 지나갔으니 길을 떠나기엔 아주 좋소.
공주에 가면 <공주기인>이라고 하는 내 친구가 있소. 한때 의금부에서 라졸을 산 친구인데 거기서 숱한 시체들을 다루다보니 사람들의 속을 귀신처럼 아는 재간을 가지고있소. 그 친구가 그대를 도울수 있을거요.》
《그렇소이까?!》
그러나 리제마는 그 말에 반가움만을 느낀것은 아니였다. 집식구들이 걱정되였다. 사실 집을 떠날 때 기껏해서 몇달이면 다시 돌아갈줄 알고 떠난 길이였다. 그동안 집에서는 어떻게들 지내는지…
한성에 와있는 동안에도 그의 머리속에서는 항시 이런 걱정이 떠날줄 몰랐다.
더구나 몸이 쇠약해진 스승과 태기를 가진 한옥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났다.
이런 먼길을 걷지 않고서는 뜻을 이룰수 없단 말인가.
불쑥 마음속의 다른 리제마가 머리를 쳐들고 꾸짖는것이였다.
그래, 《무병장생은 만민지복락》을 집에 앉아서 이루려고 했느냐.
객지살이 10년이란들 기어이 할바를 이루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리제마는 흔연히 공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