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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가 객주집의 토방에 앉아 남산쪽을 바라보고있는데 곁에서 귀동이가 재촉하였다.

《선생님!》

집에 돌아온 황도연을 찾아가자고 조르는 소리다.

어제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황도연의 행차는 위엄있는 벼슬아치의 행차만 못지 않았다. 앞뒤로 여러명의 수종군들이 늘어선 그가운데의 사인교우에 비단도포를 쭉 차려입은 황도연이 앉아있었다.

아무리 명의래도 그렇지 벼슬이 없는 사람이 저렇듯 참람하게 위엄을 갖추고서 행차할수 있는가. 알고보니 수종군이고 교군군이고 다 황도연을 청해갔던 고관집들에서 저희들의 위세를 뽐내려 붙여주었다는것이였다.

리제마는 당장 행차를 따라들어가 황도연을 만나고싶은 마음이 불같았지만 그만두었다. 집에 들어서자바람으로 쉴참을 주지 않고 만나자 함은 무례한 처사가 아닐수 없다.

이런 생각에서 객주집으로 다시 돌아온 리제마였다.

오늘 아침도 일찍 일어났지만 식전에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싶지 않아 일부러 시간을 늦잡는중이였다.

해가 두어기장쯤 떠올라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절부절 못해하던 귀동이 사기가 나서 따라나섰다.

황도연의 집앞에 이른 리제마는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렸다.

이어 대문안에서 저벅저벅 하는 느린 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찌쿵? 하고 반쯤 열렸다. 그안에서 장대한 몸집의 사내가 얼굴을 내밀고 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얼핏 보니 자기와 동년배 같아보였다.

《누굴 찾소?》

《명의님을 뵙자 하오이다.》

《우리 아버님이 몹시 피로해하는데 정 급한 병이 아니면 래일 와주소.》

리제마는 열흘나마 기다렸는데 그까짓 하루가 무슨 대수랴 하고 돌아서려다가 하루 물림 열흘 간다는 생각이 들어 닫기려는 대문을 꽉 잡았다.

《잠간만! 초면에 안됐소만 나는 병을 보이려고 온건 아니요. 난 함흥에서 혜암선생님을 만나러 찾아왔소이다.》

《함흥에서요?》

《예, 의원 리제마올시다.》

황도연의 아들 황필수는 딱한 기색을 짓더니 대문을 조금 열어놓은채로 들어갔다.

열려진 대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집은 밖에서 본것보다 더 크고 요란했다. 《ㅁ》자형집인줄 알았는데 《ㄱ》자형집으로서 한쪽이 트이였고 후원쪽에 별채가 보이였다.

조금후에 다시 나타난 황필수가 얼굴에 아무 표정도 띠지 않은채 말했다.

《그럼 내 부탁이 하나 있소. 우리 아버님의 시간을 너무 오래 뺏지 말아주오.》

리제마는 아버지를 위하는 그의 효성에 감동되여 머리를 끄덕였다.

귀동이에게 객주집에 가있으라는 눈짓을 하고난 리제마는 아들의 뒤를 따라 대문안으로 들어갔다.

황도연이 병자들을 만나주고 병을 보아주는데는 후원에 있는 별채를 쓰는것 같았다.

아들이 열어주는 방에 들어선 리제마는 놀라 주춤거렸다.

피로가 무겁게 실린 얼굴에 반색을 짓고 맞아주는 황도연은 반백의 늙은이였다. 어제 사인교를 탔을 때에는 풍채가 좋아보였는데 두루마기를 벗은 바지저고리바람의 황도연은 여윈데다 두눈은 충혈져있었다.

리제마는 깊숙이 허리굽혀 절을 하였다.

《혜암선생님을 뵙게 되여 소원을 풀게 되였소이다.》

《함흥서 온 의원이라지요? 귀한 손인데 푸대접할번 했소. 때마침이요. 방금 중병자 하나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손을 댈가 망설이던중인데… 자, 우리 함께 옆방으로 들어가 병을 봅시다.》

황도연을 따라 옆방으로 들어선 리제마는 더욱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방바닥에 한 녀인이 배를 깔고 엎디여있는데 천 한오래기 걸친것 없는 웃몸은 눈뜨고 볼수 없이 끔찍했다. 글쎄 목덜미아래에 염소젖통만 한 시뻘건 종기가 봉우리처럼 두드러져있었다.

종기로 고생하는 병자들을 적지 않게 고쳐주었지만 이렇게 큰 등창은 처음 본다.

찬찬히 살펴보니 병자는 곱살하게 생긴 애젊은 녀인이였다.

녀인은 너무 아파서인지 끙끙 앓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꼭 깨물고있었고 그의 곁에 어머니임직한 늙은 아낙네가 울상이 되여있었다.

이들을 보니 고향생각이 간절해졌다. 한옥은 잘 있는지, 병이 더 심해지지 않았는지, 딸애는 탈이 없는지, 늙은 스승에 대한 생각까지 겹치면서 집이 몹시 그리워졌다.

《의원이 보기엔 어떻소?》

리제마는 황도연의 물음에 정신을 도사렸다.

녀인의 등창은 화정(옹저 즉 뽀두라지몰림)이라 할수 있었다. 등창이 잘 곪았으면 고름빼기약이나 붙여주면 되겠지만 이건 크게 곪지 않고 병집이 주변으로 퍼져나가 벌겋게 부어오르고있으니 여간 골치거리가 아니다.

《혜암선생님, 제 생각엔 병집을 아예 뿌리채로 뽑아버려야 할것 같소이다.》

《어떻게?》

《<치종비방>대로 하면 될듯 하오이다.》

황도연의 얼굴에 미소가 비끼였다.

의서 《치종비방》은 명종(리조 13대임금, 재위기간 1546- 1567)때 명의로 이름난 임언국이 쓴 책이다.

임언국은 당시 피를 내는 수술이 엄하게 금지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기치료에서 대담하게 째고 베여내는 치료방법을 내놓음으로써 의술발전에 기여한 의학자였다.

임언국은 《치종비방》에서 농양은 화정과 석종(옹저가 굳어진것), 수종(봉과직염 및 림파선염), 마정(단독 비슷함) 및 루정(2차농양과 루공)으로 갈라놓고 그 증상에 따르는 치료법을 내놓았다. 특히 그는 그때까지 흔히 써오던 종기에 끓는 기름을 쏟아부어서 병집의 퍼짐을 막는 종래의 낡은 방법들을 부정하고 소금물로 종기를 깨끗이 씻어낸 다음 농양을 《+》자모양으로 째서 고치는 새로운 치료법을 공개하였다. 하기에 이웃나라 의원들은 임언국을 가리켜 《실로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며 동양은 물론 서양에 비교하여보아도 과시할 성과》라고 찬탄해마지 않았었다.

황도연은 리제마를 마주보며 잘라말했다.

《난 이 병자를 그대에게 맡기자고 하오.》

제마는 놀랐다. 첫 대면인데도 이런 큰 믿음을 주다니…

그는 황도연의 고무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한켠의 화로곁에는 향나무쪼각들과 약쑥이 담긴 그릇들이 있고 싸리광주리에는 큰침(수술칼), 곡침, 삼릉침, 산침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미 등창을 쨀 잡도리를 하고있었던것이다.

황도연은 광주리곁에 있는 크고작은 놋대야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엔 소금물이 담겨있소.》

리제마는 두루마기를 벗어놓고 화로에 향쪼각이며 약쑥을 한웅큼 집어넣었다.

인차 짙은 연기가 타래쳐올라 방안을 자욱하게 덮었다.

향연이나 약쑥연에는 병을 일으키는 사기(나쁜 기운)들이 꼼짝 못한다. 하기에 선조들은 죽은 사람을 다루거나 상처를 처치할 때, 또 돌림병에 든 병자들을 돌볼적에 향쪼각이나 약쑥을 태운것이였다.

리제마는 큰 놋대야에 담긴 소금물에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작은 놋대야속에 삼릉침을 담그었다가 꺼내들었다.

갑자기 손이 떨렸다. 과연 애젊은 녀인이 살을 째고 저며내는 모진 아픔을 이겨낼수 있을가.

리제마는 이를 사려물었다.

그는 제꺽 아편을 물에 타서 병자에게 먹인 다음 그 기운이 그의 몸에 퍼지기를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리제마는 황도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해보겠소이다.》

황도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마는 병자의 엉치를 꾹 타고앉아 등창에 삼릉침을 가져다댔다.

《애고?》 하는 녀인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허나 리제마는 서슴없이 삼릉침으로 등창을 찔러 피고름을 조금 뺀 다음 큰침으로 《+》모양으로 쨌다. 그 다음 피고름이 더는 안 나올 때까지 사정없이 눌러짰다.

녀인의 비명소리가 진해졌을 때 그는 썩은 살을 베여냈다.

리제마는 마감으로 상처를 소금물로 여러번이나 꼼꼼히 씻어내고 토란고를 붙이였다.

《잘했소, 아주 잘했소.》

황도연의 칭찬소리에 리제마는 자기가 아직도 녀인을 가로타고앉아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리제마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쫓기듯 일어섰다. 로파가 따라 일어나서 수건으로 리제마의 얼굴에 질벅한 땀을 닦아주었다.

황도연이 리제마의 손을 부여잡았다.

《전도가 기대되는 그대를 알게 된것이 기쁘오. 이젠 병자가 살아났으니 우리 밖에 나가 이야기를 나눕시다.》

리제마는 황도연에게 이끌려 방을 나섰다.

벌써 중낮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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