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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간 8년세월이 살같이 흘렀다.

오랜 세월 잠을 자듯 잠잠했던 지락마을의 리진사집에서는 날마다 어린아이의 글읽는 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리씨가문의 장손 제마가 《해동명장전》이란 력사책을 읽는 랑랑한 목소리였다.

할머니 김씨는 어린 손자의 책읽는 소리에 슬퍼지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제마는 량반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났으나 인생의 첫걸음부터 순탄하지 못하였다.

글쎄 무슨 액운이 서리여서인지 제마는 태여난지 석달만에 어머니를 여의였다.

하긴 액운이라고 할것도 없었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여나 갖은 고생을 겪다보니 몹시 허약해진 녀인이여서 아이를 낳자 곧 산후탈에 걸려 덜컥 쓰러진것이다.

젖조차 변변히 먹어보지 못한 어린 손주도 불쌍하고 귀여운 아기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간 어미도 불쌍했다.

어찌 불행이 그뿐이랴.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이 태여났다고 그리도 기뻐하며 제마란 기이한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 리진사마저 몇해전에 열병을 만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장손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던 리진사가 살아있었더라면 제마는 더 일찌기 글공부를 할수 있었을것이다.

리진사는 숨을 거두기에 앞서 마누라의 손을 꼭 부여잡고 그에게 장손의 글공부를 부탁하였다.

김씨는 리진사의 간곡한 유언을 지켜 여섯살때부터 어린 제마에게 글을 가르치였다.

동냥젖으로 키운 장손이다보니 제또래의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몸도 허약하기때문에 글공부를 늦잡게 한 김씨였다.

제마가 7살이 되자 김씨는 향교에서 글을 배워주는 리진사의 후배인 기로사의 권고를 받고 《훈몽자회》를 배우게 하였다.

《훈몽자회》는 1527년 이름난 어학자 최세진이 쓴 책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글자모음이란 의미를 담고있는데 가갸표로부터 2천여개의 고유어며 수천개의 한자가 들어있어 글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교재였다.

그런데 마치 제마는 배속에서 이미 글을 배우고 나온 아이처럼 여느 아이들 같으면(김씨의 어린시절 글공부도 그러했다.) 여러해가 걸렸을 《훈몽자회》를 단 한해만에 유감없이 뗐다.

김씨는 어린 장손이 부피두터운 《훈몽자회》를 단 한해만에 뗐다는것이 이만저만 놀랍지 않았다.

정말 장손이 제마란 자기 이름에 담겨진 뜻대로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것 같아보였다.

김씨는 제마에게 겨레와 강토를 아끼는 마음을 심어주라며 기로사가 준 《해동명장전》도 읽게 하였다.

밖에서는 진달래꽃이 하루가 몰라보게 만산을 붉게 물들이고 아이들은 다투어 길에서 뛰노는데 어린 제마는 아침밥상을 물리면 사랑방에 들어앉아 책부터 펼쳐들군 하였다.

글재미를 붙인 손자와 마주앉아 바느질을 하는 김씨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러모로 보나 총명이 어려있는 장손이다. 어쩌면 경륜의 큰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섰다가 실망끝에 락향하여 울울한 한생을 마친 제 할아버지의 뜻을 실현할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리진사와 뜻이 통했던 기로사도 제마에게 걸어오는 기대가 이만저만 크지 않다.

리진사나 기로사는 어린 제마가 자기 가문이나 이어나갈 그런 사람만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인물이 되기를 바랬던것이다. 그래서 김씨의 관심도 류달랐다.

김씨가 제마의 책읽는 소리를 들으며 감회에 휩싸여 바느질을 하고있는데 그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할머님, 이 책을 읽을수록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 연개소문장군, 고려의 강감찬장군, 본조(리조)의 리순신장군에 대해서 공경의 마음을 금할수 없소이다. 그분들이 아니였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되였겠소이까?!》

김씨는 경탄과 감동의 빛이 가득 어려있는 제마의 머루알같이 새까만 눈동자를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제마가 책을 제법 볼줄 안다. 글을 읽을줄 안다고 해서 책을 볼줄 안다고 말할수 없다. 글줄들에 담겨진 뜻을 깨닫고 그것을 제것으로 받아들일 때에라야 책을 볼줄 안다고 말할수 있다.

《얘야, 그분들이 애국명장으로서 후세토록 지워지지 않는 큰 공적을 이룰수 있은것은 다 너같이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위하려는 큰마음을 안고 열심히 책을 읽었기때문이다. 그분들은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을뿐아니라 애써 무술을 닦아 문무를 겸비하였단다.》

김씨는 잠시 말을 끊고 자기의 말을 귀담아듣고있는 제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김씨가 고금의 력사에도 환한것은 어린시절에 서당훈장을 하던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워서였다. 그리고 시집와서는 남편인 리진사의 높은 뜻을 알아 책을 많이 읽은데 있다. 그런만큼 그는 그 당시 녀자로서는 쉽지 않을만큼 력사에 대한 일가견을 가지고있었다.

《얘야, 난 네가 책을 읽는것으로 그칠게 아니라 바로 그 책에서 나오는 애국명장들처럼 어려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커서는 나라에 충정을 바치길 바란다.》

김씨의 말을 귀담아듣던 제마는 필통에서 붓을 꺼내들었다.

《넌 무엇을 쓰려고 그러느냐?》

《예, 책을 읽는것으로 그칠게 아니라 그 책에서 나오는 애국명장들처럼 어려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커서는 나라에 충정을 바쳐야 한다고 하신 할머님의 말씀을 종이에 써서 이 책에다 끼워넣으려고 하오이다.》

《원, 그 말은 네가 머리에 새겨두면 그만이지 구태여 글로 써둘것까지 있겠느냐?》

《할머님, 책이란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물건인데 할머님의 말씀을 적은 종이를 끼워두면 앞으로 이 책을 보게 되는 사람들도 그 말씀을 다 머리에 새기게 될게 아니겠소이까?!》

김씨는 혀를 찼다.

그는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종이에 글을 쓰는 제마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애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을 대하는 기분이였다.

저 어린것이 어떻게 자기 다음에 책을 읽게 될 사람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게 되였을가.

아, 령감도 무정하구나. 령감이 좀더 살아서 머리가 뛰여난 제마를 가르쳤더라면 《5세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김시습(1435-1493)에게 못하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는데…

김씨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사모님, 계시오이까?》 하는 석쉼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려왔다.

《할머님, 향교선생이 찾아오셨소이다.》

김씨는 바느질하던 옷을 내려놓고 사랑방문을 열었다.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키 큰 기로사가 뜨락에 서있었다.

김씨의 얼굴에 기쁨이 어리였다.

기로사는 리진사의 후배로서 향교에 들어와 학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데 그래서 그는 김씨를 《사모님》이라고 깍듯이 존대하고있었다.

《적은이, 어서 들어오게. 어서!》

김씨는 열살아래인 기로사를 늘 적은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선생님! 그동안 옥체만강하셨나이까?》

제마가 뛰쳐나가 굽석 허리굽혀 인사를 하였다.

《오, 우리 신동이 잘 있었나?》

기로사는 제마를 안아들고 그의 볼에 제볼을 비비며 물었다.

《그래 무슨 책을 읽댔느냐?》

《선생님! <해동명장전>을 읽던중이오이다.》

《그래?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려면 제 나라 력사부터 잘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책을 하나 주지.》

《야!?》

기로사는 책이라면 덮어놓고 환성을 올리는 제마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의 한쪽벽에는 리씨가문이 물려오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장이 놓여있다.

기로사는 제마를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책을 꺼냈다.

《이 책은 <동국지리지>라는 책이다. 우리 나라의 력사와 함께 8도강산의 지리가 상세하게 씌여있는 귀중한 책이다.》

리제마는 책을 받아들기 바쁘게 책장을 번지였다. 《동국지리지》는 조선에 실학을 선도한 선구자의 한사람인 지리학자 한백겸(1552-1615)이 쓴 책이다.

김씨는 언제나 제 손자에게 호의가 극진한 기로사가 고마워 코마루가 저려들었다.

좀 있어 기로사는 김씨에게 제마를 향교에 데리고 가서 글을 가르치는게 어떠냐고 조용히 물었다.

김씨는 머리를 저었다.

고려 말엽에 생겨난 향교는 리조에 들어와 모든 고을들에 설치되여 어른이 다된 량반집 아들들에게 유학을 배워주었다.

향교의 학도수는 보통 큰 고을은 40~50명, 작은 고을은 15~30명정도이다. 향교에는 교수와 훈도가 있어 주로 유교경전과 륜리도덕, 한문문장, 그외 법학과 의학도 가르친다. 과정안을 마친 학도들은 과거에 나가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면 성균관에 갈수 있고 문과에서 급제하면 벼슬을 받게 된다.

제마의 할아버지와 기로사도 젊어서 향교를 다니였고 진사시험에 통과되여 벼슬을 살았고 락향하여 향교에서 학도들을 가르쳤다. 리진사가 교수를 맡았을 때 기로사는 그의 밑에서 훈도를 지냈었다.

기로사는 《동국지리지》를 열심히 읽는 제마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모님이 제마에게 글을 가르치는지도 두해가 되여옵니다. 이젠 저에게 맡겨주심이 어떻겠소이까?》

《내 적은이 맘을 모르는바는 아니오. 그러나 내가 할수 있는 한 좀더 가르칠수 있게 한두해만 기다려주었으면 하오.》

기로사는 한숨을 내쉬였다.

제마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 어떤 글이라도 가르치면 가르치는대로 받아물수 있는 아이이다.

기로사의 이런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한듯 김씨가 말을 이었다.

《매사에 조급함은 큰일을 그르치기가 십상이라는 말도 있는데 제마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니 벌써부터 향교에 보내면 안된다고 생각하오.》

그 말이 옳았다. 향교에서 여덟살 난 어린애를 받은 실례는 아직 없었다.

그리하여 제마는 할머니와 함께 더 있게 되였다. 그는 할머니와 그냥 같이 있게 된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어린 가슴에 할아버지같기도 하고 아버지같기도 한 기로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 향교에서보다 두배, 세배로 책을 더 많이 읽겠소이다.》

기로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씨는 그를 바래주면서도 어린 제마의 손목을 꼭 잡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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