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리제마가 한성에 거의 가닿고있을 때 기로사는 자기 집에 그린듯이 누워있었다.
지난해부터 온몸에 힘이 없어지고 귀울이가 심해지더니 올해초에는 머리가 쑤시고 가끔 눈앞이 아찔해지군 하는것을 리제마에게 짐이 될가봐 참아왔는데 그가 황도연을 만나러 집을 떠난 다음날부터는 더는 견딜수 없어 자리에 눕고말았다.
여러날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있으니 별별생각이 다 들었다. 나중에는 명이 진했다는 결말에 이르렀다.
무엇을 보고 그렇다고 단정할수 있는가. 그것은 깜박깜박 드는 잠결에조차 때없이 찾아와 마음을 괴롭히는 흉몽을 보고 알수 있다.
악귀같은 괴물에게 이리저리 쫓기우기도 하고 아스라하게 높은 스산한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사품치는 강물에 휘말려들어가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삼절죽장을 꼬나쥔 백발의 리진사에게 끌려 무시무시한 굴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꿈은 아무렇게나 꾸어도 해몽만 잘하면 된다지만 이렇듯 무서운 흉몽에 무슨 해몽이 있을수 있으랴.
사람이 나이 일흔을 넘겨 살았으면 오래 살았다고 할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칠순은커녕 환갑도 못살아보고 죽는다. 이 목숨이 한 일없이 일흔을 산것은 의술을 좀 아는 덕이겠지만 그보다는 리제마를 제자로 두었기때문이다. 머리좋은 제마를 잘 키우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목숨이 길어진것이다.
리제마 같은 총명한 사람이 어디 쉬운가.
벌써 열살도 되기 전에 고금의 력사를 통달하고 의원으로서의 뛰여난 재주에다 출중하다 할만 한 무예도 갖추었으니 이제 전란이 닥쳐들어 무과에 나가기만 하면 장원급제는 떼여놓은 당상이다.
이제 스승으로서 리제마에게 무엇을 더 해줄수 있을가.
섭섭한 일은 지난해 한옥이 계집애를 낳은것이다. 첫 자식이 꼬투리를 하나 달고 나왔으면 오죽이나 좋을가. 뭐니뭐니해도 큰뜻을 품고 먼길을 가야 하는 사내에겐 아들만큼 한 의지가 없다.
한옥이에게 또 태기가 있다니 다행스런 일이다.
또 한가지 섭섭한것은 리제마의 아버지 리반오의 태도이다.
한옥이에게 살림살이에 쓰라고 천필이며 쌀같은 재물은 섭섭치 않게 보내주는데 그것으로 아버지의 할바를 다했다고는 할수 없다.
더우기 한성으로 가 황도연을 만나보고 오겠다는 제마의 결심까지 반대하였다.
반오는 기로사를 찾아와 선대의 명의들도 사람에게 꼭 맞는 약처방을 짓는 비결을 남겨놓지 못했는데 시골내기아들이 어찌 그런 일을 이룰수 있느냐면서 그저 색시곁에서 의술로 밥술이나 먹게 하자고 간청했다.
기로사는 적당히 말해 돌려보냈지만 제마에게는 그에 대한 말을 일절 비치지도 않았다.
그러고보면 반오는 제마의 재주를 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다. 제마의 장래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고 바라지도 않고있다.
그것은 제마가 서자라는 생각때문일지도 모른다.
《외할아버님!》
언제 들어왔는지 한옥이 나직이 부른다.
《외할아버님! 제발 미음을 좀 드시와요. 그저 맹물만 자시니…》
기로사는 무겁게 드리운 눈을 떴다.
옥구슬같이 맑은 눈물이 한가득 고인 한옥의 눈이 선참으로 보였다.
기로사는 안깐힘을 써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한옥이 두손으로 감싸쥐였다.
《얘야, 옛날에 편안히 죽기로서는 급살이 제일이라고 했다.》
《외할아버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이까?》
《얘야, 내 말을 잘 새겨듣거라. 이제 내가 죽으면 내 죽었다는 부고를 한성에 띄워선… 안된다.》
기로사의 손을 감싸쥔 한옥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외할아버님! 그런 생각일랑 마시오이다.》
《얘야, 난 이미 하늘이 내려준 명을 훨씬 넘겨산 늙은이다. 그러니 웃으며 가련다.
지금 네 랑군은 뜻을 한창 무르익히는 때다. 자고로 뜻을 세우고 집을 나선 사람은 많으나 뜻을 이루고 돌아온 사람은 적다고 하였다. 이 말속에는 온 집안이 달라붙어 뜻을 세운 사람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
네 랑군이 몇달을 기약하고 떠났지만 그 길이 몇해가 걸릴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런데 내 죽었다는 부고가 가면 네 랑군이 중도에서 돌아올수밖에 없고, 그러면 또 귀한 시간을 잃게 되느니라. 난 그걸 원치 않는다. 원치 않아.》
한옥은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기로사를 굽어보며 눈물을 흘리였다.
《얘야, 내 그동안 조금씩 모아둔 돈이 저 장농안에 들어있다. 그 돈으로 관도 사고 조상온 사람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그 돈으로만 장례를 치르어라. 알겠느냐?》
한옥은 소리없이 울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했다. 죽는 사람과 한 언약은 하늘이 무너진대도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기로사는 한동안 말을 끊고 숨을 몰아쉬였다.
《내 너한테 꼭 한가지만 부탁하련다. 그 한가지란 이제부터 자기를 사내없는 아낙네라 생각하고 집안일을 도맡아하라는거다. 열손가락이 닳도록 일을 해도 제입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키우고 사내의 뒤바라지를 해준다는것이 말처럼 헐한 일이 아니다. 개인 날보다 비오고 흐린 날이 더 많을거다. 집일도 어렵고 독수공방도 어렵고… 그래도 너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난 널 믿는다.》
기로사는 말을 마치자 맥을 탁 놓으면서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외할아버님!?》
한옥의 곡성이 방안을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