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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마가 새로운 마음을 가다듬고 산판을 달리는지도 어느새 한해라는 나날이 흘렀다.
오늘도 리제마는 두주먹을 억세게 틀어쥐고 산판길을 내달리느라 힘에 부치였지만 마음만은 날아갈듯 하였다.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북방의 여름은 따가운 대신 그 기간이 별찌 흐르듯 짧아 백중(음력 7월 보름)이 지나자 벌써 선기가 나고 밤은 쌀쌀했다.
리제마에게는 요즘의 하루하루가 여느때의 열흘맞잡이로 귀하고 또 그 못지 않게 즐거웠다.
귀동이와 다시 짝을 뭇고 산판을 달리던 때가 어제같은데 벌써 한해가 지나 지금은 포태골안의 여섯바퀴를 하루가 아니라 점심전으로 들이댄다. 량다리에 쇠각반을 하나씩 차고 산판길을 지칠줄 모르고 달릴 때면 정말 이게 내가 옳긴 옳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어떤 만척벼랑길도 천리고개길도 두렵지 않았다.
뒤떨어진 귀동이가 어떻게 하나 바싹 따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지내볼수록 귀동이는 마음에 들었다. 어찌나 사람을 따르는지 때로는 친동생처럼 여겨진다.
귀동이에게서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면 멋적기는 하나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리제마가 세상에 나서 《의원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리우게 된 날은 몇달전이였다.
그날도 리제마는 기세좋게 산판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먹은 다음 방에서 병서를 읽고있었다. 그때 불쑥 귀동이 울상이 되여 나타나 어머니가 죽어간다고 아우성을 쳤다.
리제마는 다급히 방을 나섰다.
귀동이집에 가보니 얼마전에 해산을 했다는 그의 어머니가 온몸이 가드라들면서 신음하고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병자의 팔을 당겨 맥을 짚어보았다. 몸푼 다음 기혈이 허해졌을 때 제때에 자양하지 못한데다 엎친데 덮친다고 풍한사까지 달려들어 생긴 산후병이라는것을 제꺽 알수 있었다.
리제마는 병자의 심유혈과 족삼리혈들에 침을 놓아 우선 몸이 가드라드는것부터 고친 다음 밤새껏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사물탕에 몇가지 약재를 더 넣어 약을 달여먹이였다.
이렇게 하였더니 며칠만에 병자는 병을 털고 일어났다.
당장 숨질것 같았던 어머니를 살려내자 귀동이는 리제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선생님! 고맙소이다.》 하고 울먹거렸다.
그날부터 귀동이는 리제마를 깍듯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틈을 내여 의술을 배워달라고 졸라댔다. 귀동이 어머니도 아들에게 의술을 배워줄것을 간청하였다.
그 일을 반연으로 하여 리제마는 저녁이면 포태골안에 널려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병을 보아주었다.
이렇게 되여 리제마는 포태골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게 되였다. 아니, 포태골사람들이 리제마에게 정을 붙인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병을 고쳐주는 은인이라면서 제마를 《무평선생》이라 불러주었고 한식솔로 대해주었다.
그러니 어찌 걸음걸음 힘이 나지 않겠는가.
먼저번에는 수제비 잘 먹는 사람이 국수를 잘 먹기마련이듯 산골내기들이 잘하는 산판달리기를 벌방내기가 어떻게 할수 있으랴 하고 머리를 저었댔는데 산골사람들에게 정을 붙인 지금에는 가파로운 산판길에도 정이 들어서 평지길 같아보였다.
어려운 고비는 넘긴셈이다.
요즘은 자정이 넘도록 병서를 펼쳐놓는데 의서를 읽을 때처럼 글귀들이 머리에 쏙쏙 박힌다. 이제는 《병학지남》을 아무때건 좔좔 외워바칠수 있다.
리제마는 그 한 대목을 생각하며 줄기차게 달렸다.
《만일 적이 한바탕 싸우고 달아나면 아군은 뒤를 따라간다. 그런데 나무숲, 사람의 집들, 시내물, 구렁텅이, 끊겨돌아가는 모퉁이를 만나면 그 군사의 수를 참작하여 한대(군대편제의 하나, 25명으로 구성) 혹은 한초(군대편제의 하나, 약 100명으로 뭇는다.)를 남겨서 적이 나올만 한 곳을 지키고 다른 군사는 빨리 따라간다.》
이렇게 병서를 외우며 달리니 일거량득이라 할수 있었다.
한달전부터 강무는 교련강도를 더 높이였다.
산판달리기를 마친 오후에는 권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권법만 제대로 익히면 무예 6기쯤은 식은 죽 먹기란다.
긴 창으로 적을 찌르는 장창, 끝이 세갈래로 갈라진 당파창으로 적을 물리치는 당파, 창끝이 몇가닥으로 난 랑선창으로 달려드는 적을 무찌르는 랑선, 두손에 잡은 칼을 쓰는 쌍수도, 등나무로 만든 방패로 싸우는 등패, 몽둥이를 휘둘러서 적을 쓸어눕히는 곤방을 무예 6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군사들이 반드시 숙달해야 하는 무술이다.
강무는 권법의 실기를 가르치기에 앞서 조선권법의 우점을 알려주었다.
조선권법은 그 어느 나라의 무술보다 우수하다.
그는 수천년의 기나긴 뿌리를 가진 조선권법은 일단 자기를 건드리는자는 단매에 꺼꾸러뜨리는 무자비한 기습과 그 어떤 강적의 불의의 치기라도 물리칠수 있는 수많은 막기비술까지 다 갖춘 무술이라는데 그 위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선권법은 발동작이 우세하고 마치 수풀속에서 뛰쳐나오는 맹호같이 동작이 크고 모가 나면서도 번개같이 빠른것이 특기라고 하였다.
그 실례로 강무는 인조(리조 16대임금, 1623~1649)때 왕자대군을 호종하여 이웃나라에 갔던 김여준이라는 조선군사가 무술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자처하는 그 나라 사람과의 시합에서 상대를 단매에 꺼꾸러뜨린 이야기를 해주었다. …
눈부신 둥근 해가 포태골의 중천하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리제마는 기세좋게 마을로 접어들고있었다.
그의 뒤를 귀동이 바싹 따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