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리제마는 끝내 무술닦기를 단념하고말았다.
지어먹은 마음 삼일 못 간다고 포태골에 온지 석달만에 집으로 도망칠 마음을 먹은것이였다.
사내가 외지에서 고생줄에 빠지면 앉으나서나 집생각, 색시생각뿐이라더니 정말 그런것 같았다.
진저리나는 산판달리기를 오늘 걷어치울가 래일 집어던질가 하면서 마지못해 산판으로 오르면 시작부터 여드레 팔십리걸음인데 정신은 온통 한옥이 기다리고있을 집으로만 가있다.
게다가 그전부터 한옥을 괴롭히던 그 몹쓸 심비증이 더해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은근한 근심은 더더욱 포태골을 멀리하게 하였다.
에라,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고 어머니배속에서부터 약골로 떨어진 사람이 삼년 아니, 석삼년을 애쓴대서 무술가로는 둔갑할수 없을것이다. 주먹감각이라는것도 글눈처럼 타고 나야 마음먹은대로 적수의 면상을 후려칠수 있는 법이다. 괜히 견디여내지 못할 이 길에서 허송세월을 하다가는 산돼지 잡으려다가 집돼지 놓치는 격이 될수 있겠다.
마침 하늘에서 떠나라고 하는듯 한 기회가 찾아왔다. 《포태선생》이 나들이를 떠난것이였다.
일단 마음을 달리한 이상 이 좋은 틈을 놓쳐서는 안된다. 석달동안 무술을 배워주느라고 마음을 쓴 《포태선생》에게 인사말도 없이 슬쩍 빠져나가기는 안됐지만 차라리 잘됐다. 남보지 않을 때 사라져야 피차에 서로가 다 마음이 편할수 있다.
리제마는 한번 하자고 했던 마음을 돌릴수밖에 없는 자기 처지를 잘 알아달라는 짧은 글월을 병서우에 남겨놓고 행장을 꾸렸다.
그동안 먹고 놀기만 해서 몸이 근질대던 가라말은 리제마가 올라앉자 네굽을 안고 씽씽 내달렸다.
가라말우에 앉아 언듯언듯 지나치는 주위를 둘러보느라니 집으로 가는 이 길이 결코 도망길이 아니라는 위안이 들었다.
적재적소라고 사람마다 자기의 타고난 재주에 맞는 일감을 찾아 해야 마땅하질 않겠는가.
도무지 감당 못할 무술교련에서 제때에 물러나길 잘했다.
분명 나에게는 의술이 몸에 맞는다.
아직은 세상물정에 몹시 어둡던 어린시절에 의서를 읽던 일을 두고도 그렇게 말할수 있다.
그때 낮을 이어 밤에도 의서를 읽군 하였는데 글귀들이 머리에 쏙쏙 들어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한 날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병을 고쳐주던 나날이 어제 일이런듯 눈에 선했다. 참말이지 보람있는 나날이였다.
그런데 내가 무술을 익혀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수 있는가. 내 할바는 의술이다. 명의가 되여 고향사람들을 병마로부터 구제하는것이다. 빨리 돌아가자.
기분이 흥그러워진 리제마는 발뒤축으로 배허벅을 찼다. 가라말은 속보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리제마는 6백리 먼길을 달리여 고향마을가까이에 이르렀다.
막상 고향마을을 가까이 하니 버젓이 집을 찾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랬든저랬든 스승의 분부를 어기고 포태골에서 도망쳐왔으니 남들이 얼굴을 알아볼수 있는 때를 피하고싶었다.
리제마는 소나무숲에 들어가 컴컴해지기를 기다렸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렸을 때 리제마는 말발굽소리가 날세라 천천히 말을 끌고 마을로 들어섰다.
집앞에 이르니 주위가 낯설었다. 울담을 빙 돌아가면서 삼밭이 생겼는데 벌써 삼대들이 허리를 쳤다.
이걸 다 한옥이 심었을것이다.
리제마는 마당 한켠에 크게 자란 황철나무에 말고삐를 매고 삽짝문을 열었다. 뜨락에 들어선 그는 안의 동정을 살폈다.
기로사가 든 방에 불이 꺼진것을 보면 밤이 퍽 깊었음을 알수 있다.
안방에서는 여전히 불빛이 새여나오고있었다. 그 불빛에 바느질을 하는 한옥의 자태가 문가에 그려졌다.
한옥의 정겨운 자태를 보자 리제마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방문에 다가섰다. 그러자 기척을 느낀듯 한옥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누… 누구세요?》
떨리듯 하나 부드러운 한옥의 목소리에 리제마는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요, 나!》
《어마나!》
한옥이 문고리를 벗기기 바쁘게 리제마는 방문을 열고 방으로 뛰여들었다. 리제마는 한옥을 와락 그러안았다.
《정말 보고싶었소!》
한옥도 몸을 떨며 리제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리제마는 곧 자기 가슴이 축축해짐을 느끼였다.
《우는게 아니요?》
그 말에 한옥이 얼른 물러앉았다.
《아이, 이 정신 봐. 저녁전이겠는데…》
《저녁? 됐소. 집에서야 한끼가 아니고 열두끼를 안 먹은들 뭘 하오.》
《얼른 밥을 짓겠어요.》
한옥은 행주치마를 찾아두르고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됐다는데…》
리제마는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있으면 한숟갈 먹고말지 하는 생각으로 한옥을 따라 부엌으로 내려갔다.
《아, 여기에 찬밥 한그릇이 있구만.》
부뚜막에 있는 밥그릇을 잡아당겨 열어본 제마는 그만 할 말을 잃고말았다.
흰쌀은커녕 콩알 하나 섞이지 않은 강조밥이였다. 반찬으로는 된장찌개 한가지일것이 뻔했다.
집을 나가사는 남정네를 보탬하자고 허리띠를 조이는구나.
《그건 이리 내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인차 더운밥을 지을테니.》 하고 한옥은 그의 손에서 밥그릇을 빼앗아냈다.
밥 한그릇으로 집에서 사는 형편을 단숨에 꿰뚫은 리제마는 동구밖에까지 따라나와서 꼭 무술을 닦고 오라고 바래주던 한옥이 생각났다. 그날부터 하루 세끼 이렇게 먹었을것이다.
죄스러운 마음이 갈마들며 한옥을 마주하기 멋적었다.
얼마후 한옥이 해들여온 흰밥에 제마는 선뜻 수저를 가져갈수 없었다.
밥을 먹던 제마는 자기를 쳐다보는 한옥의 눈빛이 방금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생겨 왔어요?》 하는듯 한 안해의 눈길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리제마는 게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잠자리를 펴오.》
《…》
한옥은 까딱않고 리제마를 지켜보았다.
리제마는 얼렁뚱땅해서 이 자리를 모면해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말이 나가는대로 입을 열었다.
《어, 이 정신 보지. 외할아버님 신상엔 별일없었겠지?》
《별일은 없는데… 향교일을 보시면서 짬짬이 밭을 일구어 삼을 심고 가꾸느라 고생이…》
리제마는 놀라 눈을 치떴다.
《그건 무슨 소리요?》
《사실은 그때 당신이 타고갔던 가라말의 값을 갚느라고… 그렇게 심은 삼으로 베천을 짜면 큰돈이 될수 있다면서…》
리제마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엄청나게 비싼 말을 외상으로 끌어오면서까지 떠나보낸 자기가 중도에서 그냥 돌아온것을 알면 얼마나 락심해하겠는가.
리제마는 기로사를 만날 일이 끔찍하였다. 그렇다고 열두번 죽었다가 다시 태여난대도 이룰수 없는 무술에다 무정하게 세월을 바칠수는 없었다.
(에라, 피터지게 종아리를 맞으면 되겠지.)
리제마는 맥없이 말했다.
《난 무술을 그만두기로 했소.》
놀랄줄 알았는데 안해의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한동안의 침묵끝에 한옥의 부드러운 음성이 나직이 울렸다.
《서방님은 오래동안 집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끝끝내는 세운 뜻을 성취한 사람들의 소행을 책에서만 읽고 번지려 하시나이까?》
리제마는 반발심이 울컥했다.
《나같이 뼈가 여린 약골에겐 무술이 맞지 않소. 무술은 뼈대가 굵고 키가 큰 장사들이나 하는거란 말이요. 알겠소? 그러니 나에겐 갈길이 따로 있소.》
한옥이 숨을 길게 내쉬고서 천천히 말했다.
《정신이 바로서있지 못하면 아무리 힘장사래도 무술은 물론 그 어떤 재주 하나 변변히 닦을수 없는줄 압니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탓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서방님이 고유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던걸 전 지금도 기억합니다.》
리제마는 한방망이 얻어맞은듯 했다.
고유는 임진조국전쟁때 의병장인 고경명의 후손이였다. 고경명이 죽은 후 고씨가문은 몰락하였다. 그의 몇대후손인 고유는 어려서 량친부모들을 다 잃고 이동네저동네로 떠돌아다니며 품을 팔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스무살이 썩 지나 어느 인심후한 집에 늦장가를 든 고유는 첫날밤에 꽃같이 고운 안해와 헤여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첫날밤 안해는 고유에게 우리 서로 10년을 기한하여 글을 모르는 서방님은 집을 떠나 글을 깨우치고 자기는 부지런히 일하여 집살림을 남부럽지 않게 장만해놓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고유는 다음날 이른새벽 집을 나섰다. 합천에 이르러 한 선비집에 든 그는 거기에서 코흘리개아이들과 함께 천자문을 익히고 여러해동안 이악하게 책을 읽었다.
그만하면 과거에 나가도 될수 있겠다고 스승이 말했으나 그는 또다시 해인사로 들어가 몇해 더 직심스레 책을 읽었다.
드디여 안해와 언약한 10년기한을 채운 그는 그길로 한성으로 올라가 숙종왕이 지켜보는 알성과에서 단연 장원급제하였다.
고유가 장원급제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약속한대로 안해는 자수성가하여 넉넉한 살림속에 그를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
리제마는 안해를 보기가 창피하여 한동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사내란게 일단 뜻을 품고 집을 나섰으면 끝장을 보고 와야지 작은 곤난앞에 겁을 먹고 도망쳐왔으니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수 있단 말인가.
이런 나약한 의지를 가지고서는 무술이나 의술뿐아니라 아무 일도 할수 없을것이다.
《서방님! 어제 <포태선생>이 오셨댔어요.》
리제마는 깜짝 놀랐다.
《뭐? 그게 정말이요?》
《<포태선생>은 서방님에 대해서 물으셨어요. 서방님이 원래부터 몸이 허약했는가, 어떤 고된 일을 해보았는가, 음식은 어떤걸 좋아하는가, 사람들과 교제는 어떠했는가 하는걸 물으시고 당신이 꼭 훌륭한 무술을 지니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리제마는 고개를 떨구었다.
《포태선생》이 바로 그런 사람이였구나. 나를 위하여 수백리 먼길을 찾아오다니…
리제마는 새로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난 떠나겠소.》
《예?》
《내 무술을 닦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소.》
리제마는 결연히 방문을 열었다.
배부른 반달이 퍼그나 서녘으로 기울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