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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봄.

검은 가라말에 몸을 실은 18살의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 백두산부근의 포태골로 가고있었다. 리제마였다.

가라말은 포태골로 향한 길을 줄기차게 달리였다.

제마는 집을 떠난지 나흘만에 포태골로 접어들었다. 그러니 함흥에서 성천강을 따라 2백리 거슬러올라가있는 불개미재를 넘고 또 2백리 북행하여 갑산고을지경에 당도해서 거기서부터 거의 또 2백리를 직행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인 포태천에 다달은것이였다.

포태마을은 마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협소했다. 아아한 험산들이 사방으로 둘러막힌 곳에 듬성듬성 몇집이 있는 심산오지인 이 골안은 세상을 피해서 들어온 몇몇 사람이 숨어사는 피신골이였다.

예순고개에 이른 《포태선생》 강무가 바로 이 골안에 숨어살고있었다.

강무의 먼 조상은 출중한 무술과 용맹으로 북방오랑캐를 벌벌 떨게 했던 함길도군의 리징옥장군(리조 문종때 장수)의 부하였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세조)에게 반기를 들고 고구려와 같은 강국을 세우자 했던 리징옥을 따르던 그 조상은 조정에서 파한 적수들에게 피살되였다. 그때부터 강무네는 깊은 산속에서 숨어살았다.

그의 집안은 고려때부터 물려오는 수박희란 권법을 가문의 보배로 여기였다.

뛰여난 무술을 소유했기에 그의 선조의 한사람이 리징옥의 부하가 되여 나라의 6진개척에 기여했던것이였고 임진왜란때 그의 후손이 또한 북관땅을 들썩케 한 정문부의병대에 들어가 본때있게 왜놈들을 족치다가 억울하게 모반죄에 걸린 정문부와 함께 관군에게 붙잡혀가서 옥사하였다.

연거퍼 역적루명을 쓴 강무네는 포태골을 영원한 피신처로 삼은것이였다.

강무네는 궁벽한 산골에 숨어살면서도 자식들에게 문무를 가르치는 일만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일찌기 어린 강무를 리진사의 아버지에게 보내여 글을 읽게 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기로사와 알게 되였다.

강무는 권법뿐아니라 병서도 많이 읽어 병법에도 밝았다.

이 땅에 전란이 일어난다면 조상들처럼 한몸을 내대고 깊은 산속에서 나와 겨레와 강토를 지키겠다는것이 그의 뜻이였다.

참으로 애국충정의 넋을 간직한 가문이였다.

리제마는 저녁무렵에 포태골마을로 들어섰다.

길가에서 뛰여놀던 조무래기들이 마을로 말을 타고 들어오는 사나이를 신기하게 여겨 와? 하고 마주 달려왔다.

리제마는 아이들을 통해 강무네 집을 인차 찾을수 있었다.

집은 마을복판에 있었다. 여느 집들처럼 통나무로 지은 귀틀집인데 좀더 커보였다.

강무는 몸집이 큰 억대우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뜻밖에도 체소한 늙은이였다. 류다른것이 있다면 두눈에서 남달리 영채를 내뿜는것이였다.

기로사가 써준 글월을 읽고난 강무는 몹시 기뻐하며 리제마를 방으로 이끌었다.

강무의 집안은 그만하면 큰 식솔이였다. 아들은 없고 중년나이의 딸과 사위를 데리고 사는데 외손자, 외손녀들이 여라문명이나 되여 제법 흥성거렸다.

저녁을 먹고나서 강무는 웃방격으로 따로 곁들인 방에 제마의 거처지를 정해주었다. 그 방은 강무가 마을아이들에게 글을 배워주는 글방 겸 마실방이였고 이전에는 무술을 배우러 포태골을 찾아온 젊은이들이 들기도 하였으며 타지방의 사냥군들이 묵어가는 방이기도 하였다.

강무는 한 며칠 쉬면서 포태골을 익히라고 하였다.

《장가는 들었다지?》

《예, 올해 정초에…》

강무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정초라, 떠나기가 쉽지 않았겠군.》

《…》

《그럼 푹 쉬게.》 …

다음날 아침 제마는 권법의 력사를 내리푸는 강무의 이야기에 흥분을 금할수 없었다.

《포태선생》은 자기는 조선무술의 조상은 치우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치우는 반만년전에 우가(군사를 담당한 고조선의 벼슬)로 있으면서 군력으로 박달임금의 나라를 든든히 받든 명장이다.

투구와 갑옷을 만들어서 군사들에게 입힌 치우는 언제나 외적이 침노할 때면 강군을 거느리고나가 물리쳤고 그 나날에 무술을 창제하여 보급시키였다.

그가 키운 군사들의 주먹이 어찌나 드세였던지 이웃나라들에서는 치우를 가리켜 《구리머리에 철이마》라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그후 조선무술은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 연개소문장군 같은 유명무명의 무도인들에 의해서 보다 더 위력한 무술로 발전하였으며 고려초에 들어와서는 태조(왕건)를 도와 삼국통일성업에 크게 공헌한 신숭겸장군이며 거란군을 격멸시킨 강감찬장군 그리고 칭기스한의 몽골대군이 《고려범》이라고 두려워한 김취려장군과 같은 뛰여난 무도인들에 의해 보다 더 세련될수 있었다고 강무는 말하였다.

그러나 리조에 들어와서 조선무술은 시련에 부닥쳤다. 조정은 《태평세월》에 위협으로 된다며 강인한 성격을 지니고 무술에 능한 북관사람들의 벼슬길을 막는 동시에 무예를 배워주는 전국의 강무당들까지 강제로 모조리 없애버렸다.

하여 무도인들은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였고 그들중 일부 사람들이 절간에 숨어서 무술을 전수하였다.

《포태선생》은 병서들도 보여주었다. 기로사의 말대로 그의 집에는 고금동서의 병서들이 적지 않았다. 1433년에 편찬한 《진설》로부터 차례로 《진법》, 《병장도설》, 《병장설》, 《병학통》, 《병학지남》, 《무예도보통지》 등의 조선병서들과 《무경7세》라는 이웃나라의 병서까지 있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제마는 단숨에 병서들을 독파하리라 마음다졌다.

이보다 몇곱이나 많은 의서들도 어린 나이에 다 독파하였는데 한창시절에 그쯤한 책은 한해면 떼지 못할가.

병서를 보여준 강무는 제마를 뒤에 달고 밖으로 나왔다.

심산속에 듬성듬성 열댓채 집이 들어있는 포태골안을 둘러보니 이상야릇한 기분이였다. 옥구슬같은 맑은 포태천을 바라보면 상쾌해지는 기분이고 저 멀리 북녘으로 구름우에 떠있는듯 한 흰 산, 백두산을 대하면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방으로 울창한 나무가 꽉 둘러막힌 인적드문 골안을 바라보느라면 고독감에 휩싸여 마음이 쓸쓸해졌다.

세상을 피해사는 이 골안의 사람들은 귀밀과 감자농사로만 살수 없어서 사냥을 하였다.

강무네도 그들처럼 부대기농사도 짓고 크고작은 산짐승들을 사냥하여 생계를 유지하고있었다.

강무는 무술교련에 앞서 리제마의 다리에 각반을 차게 하였다. 말이 각반이지 놋쇠쪼각들이 들어있는 쇠자루나 다름이 없

었다.

그는 쇠각반을 3년동안 어느 한시도 풀어놓아서는 안된다는 다짐부터 해두었다. 그리고 짝패로서 귀동이라는 열살짜리 포태골아이 하나를 붙여주었다.

며칠후 첫 무술교련은 10리가 넘는 마을골안을 한바퀴 빙 돌아오는 달리기로부터 시작되였다.

강무는 낮에는 포태골안을 6바퀴 돌고 밤에는 병서를 읽으라고 하였다.

리제마는 교련 첫날에 벌써 완전히 혀를 빼물고말았다.

포태골안을 도는 길이란게 말이 길이라 하니 길인가부다 하지 실은 험한 산발을 타고 덤불속을 뚫고나가야 하는 비탈길의 련속이였다.

오불꼬불한 올리막과 가파로운 내리막이 얼마인지 셀수 없고 날 선 돌부리며 가시돋힌 나무가지, 거친 풀잎새들이 그물처럼 겹겹이 앞을 막는 비탈길을 그것도 량다리에 무거운 쇠각반을 차고 뛰여야 하니 얼마 못 가서 숨이 턱에 닿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어푸러질듯 쓰러질듯 땀으로 미역을 감으며 골안을 반바퀴도 못 돌아서 목구멍에선 뜨거운 겨불내가 확확 내뿜고 두다리는 열길백길 땅속으로 끌려드는것 같아 당장 쓰러질 지경이였다.

반대로 귀동이는 나이는 어려도 산판달리기에는 펄펄 날았다. 앞에서 나는듯이 달리는 귀동이의 모습은 자기를 비웃는것 같았다.

첫날에 그만 완전히 녹초가 되여버린 리제마는 방에 들자 병서를 펼치기는커녕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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