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의 우정
고려 공민왕시기 배천고을에서 있은 일이다.
당시 안렴사로 임명된 조운흘이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순시를 앞두고 관내의 각 고을들에 사람을 띄워 자기가 정해준 날자에 검열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통지하였다.
당시 배천군수로 있던 박필원은 이 소식을 듣자 반갑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사실 조운흘은 그와 한고향친구로서 어려서부터 함께 정을 나누며 뛰놀던 다정한 소꿉친구였다. 그래서 친구가 높은 벼슬에 임명된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하지만 안렴사가 온다니 그를 따라다니는 백여명의 관리들, 아전들 그리고 시중군들에 대한 치닥거리가 걱정이였다. 자칫하면 온 고을이 거덜날 판이였다.
박필원은 안렴사의 시찰을 어떻게 하면 손쉽게 처리하겠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궁리가 떠올라 관원들과 아전들, 좌상들을 불렀다.
안렴사를 맞이할 준비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미리 자기들이 짠 접대안을 이야기하였다.
팔짱을 끼고 듣는둥마는둥하던 박군수는 갑자기 엄한 목소리로 그들의 말을 잘라버렸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 그리고 안렴사어른에게 아첨하려는 사람이 있거든 그 누구를 불문하고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은 일체 입을 다물고 내가 손님맞이하는것을 구경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모두들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보았다. 그러는 그들의 눈길에는 그러다 자기네 사또가 자칫하면 봉변을 당하지 않을가 하는 근심기가 어려있었다.
박필원은 모른척 하고 모두 돌려보냈다.
드디여 안렴사가 배천땅에 들어서는 날이 왔다.
박필원은 몇명의 관원과 아전들을 거느리고 군경계까지 나가면서 길에 다니는 장사군들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술집과 음식점들의 문을 닫게 하였다.
그리고 주변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로인을 불러다 안렴사와 만날 때의 주고받을 말을 미리 준비시키고 마을어구의 큰 나무밑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후 배천땅에 들어선 안렴사는 자기를 마중나온 소꿉시절친구를 보자 몹시 반가워하였다.
박필원은 알은체도 않고 깍듯이 례의를 갖추며 말하였다.
《먼길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소이다. 제가 배천군수 박필원이올시다.》
조운흘은 놀랐다. 이 친구가 날 못 알아보는게 아닌가?
《날세. 조운흘이야.》
박필원은 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상관을 맞이하는 부하의 자세를 헝클어뜨리지 않았다.
《지금 고을에는 흉년이 들어 관리들과 백성들의 살림이 말이 아니오이다. 저도 집에서 가족들과 하루 세끼 죽을 먹으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다나니 추석날 아이에게 고기점도 먹이지 못한 형편이오이다.》
안렴사는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다.
《허나 명절을 그냥 보낼수가 없어 다른 고을에서 고기를 꾸어다 늙은이들에게만 조금 내주어 위로하였을뿐입니다. 안렴사어른께서 이제 고을을 돌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술상 한번 변변히 차릴수 없는 저를 용서하여주소이다.》
박필원은 시치미를 떼고 그를 마을로 안내했다.
《안렴사어른을 뵙겠다고 사람들이 기다리고있소이다.》
동리어구에 들어서니 과연 사람들이 기다리고있었다.
조운흘은 절을 하는 사람들에게 답례하면서 형편을 알아볼겸 마침 큰 나무밑에 서있는 로인을 불러 형편을 물었다.
로인은 황송해하면서 대답하였다.
《금년에 흉년은 들었으나 우리 군수나리께서 백성들을 지극히 돌보아 굶어죽는 사람이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고있소이다. 명절날 떡이나 고기를 못 먹었을따름이지… 그대신 다들 겨울준비를 하고있소이다. 저, 외람된 청이오나 이 루추한 늙은이의 집에 들려보소이다. 그러면 비록 먹을것은 없어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오이다.》
조운흘은 그의 말대로 마을을 돌아보았다. 정말 집집마다 살림형편은 어려웠으나 자식들은 부모를 성의껏 공양하고 이웃간에는 화목하였다.
안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마을을 떠나 군에 도착하였다. 그때는 벌써 날이 어두웠으므로 할수없이 어느 한 주막집에서 숙식을 하게 되였다.
주막집이라야 밥상 하나도 변변치 않은 집에서 안렴사가 지금껏 받아온 푸짐한 식사를 기대한다는것은 마른 해면에서 물을 짜내려는것과 같았다.
아닌게아니라 식탁에 오른것은 보리와 좁쌀섞인 잡곡밥에 나물반찬, 산나물국뿐이였다. 그리고 고기는커녕 기생의 권주가 한마디 들을수 없었다.
안렴사만이 아니라 여태 다른 고을들을 돌아다니며 관리들의 아첨을 받아오는데 습관된 수행관리들도 상상할수 없는 대접아닌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속이 불끈거렸지만 가는 곳마다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다나니 진귀한 물건과 토산물들을 마음대로 요구할수 없는데다가 저녁끼니는 고사하고 잠을 잘 변변한 곳조차 마련할수 없었다.
조운흘은 저녁식사후 박필원에게 수행원들의 잠자리를 좀 보장해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박군수는 《생활이 피페하다나니 집들엔 이불은 물론 거적도 없어 그러니 리해해주사이다.》하고는 낡아 꿰진 이불 한채를 안렴사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였다.
조운흘은 기가 막혔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자체로 숙식조건을 마련하되 소동이 나서 이곳 박군수에게서 상소되는 일이 없게 하라고 지시를 주었다.
그러고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쩐지 친구의 행동이 리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흉년이 들었어도 안렴사 하나도 맞이할만 한 그런 밑천이야 없겠는가.
더구나 안렴사라는 관직은 둘째치더라도 한고향에서 나서자란 막역한 친구인 자기를 소 닭보듯 대하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혹시 날 시기해서 그러는게 아니야? 어쨌든 만나서 사연을 알아봐야겠다.)
밖으로 나온 조운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길가에서 좀 떨어진 우물앞에서 사람들과 말을 하고있는 박필원을 보았다.
《이보게, 나 좀 보세.》
그가 다가오자 조운흘은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내 한마디 해야겠네. 우리 안렴사니 군수니 하는것을 떠나 친구로서 솔직히 이야기해보세.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박필원은 싱글싱글 웃었다.
《여보게, 나도 자네와 같이 자란 정을 잊지 않고있네. 지금이라도 푸짐한 진수성찬을 차리고 회포나 실컷 나누면 오죽 좋겠나. 하지만 그렇게 할수 없구만.
자네도 알지만 올해 이 고장은 흉년이 들어 먹을것이 넉넉치 못하네. 그런데 안렴사를 치느라고 고을백성들의 잔등을 벗겨내야 하니 그게 과연 안렴사의 <순시사명>과 같은가. 안렴사란 각종 대장들과 송사문건들을 검열하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것이 본업일진대 지금은 어떤가. 자네를 따라온 사람들을 치닥거리하자면 숱한 식량과 돈, 물품들이 있어야 하니 그걸 장만하여 보장하고나면 온 고을이 한해동안 또 가난에 허덕이여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걸세. 텅 빈 고을에 나 혼자선 뭘 하겠나? 차라리 이 고을을 없애버리는게 낫지.》
운흘의 얼굴빛은 어두워졌다.
박필원은 은근히 겁이 났다. 혹시 이 친구가 화를 내면 어쩐다? 안렴사의 권한으로 일개 군수의 목을 따는것쯤은 손바닥뒤집기인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것을 각오하고 이렇게 말했다.
《가혹한지는 모르겠네만 난 자네가 래일 아침 떠나주면 고맙겠네.》
운흘은 한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이제 그가 어떤 결단을 내리겠는지는 부처님이나 알노릇이였다.
운흘은 마침내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웃음발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자네가 오죽하면 그런 부탁을 하겠나. 알겠네. 래일 일찍 떠나겠으니 그리 알게.》
그가 시원스럽게 나오자 바빠난것은 박필원이였다. 그는 급히 친구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여보게, 나하고 같이 가세.》
《어디 말인가?》
《내가 자넬 이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안하겠나. 우리 단 둘이서 술이나 마시며 그간 회포를 나누어봅세.》
조운흘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러지 말게.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나? 이왕 내친걸음이니 마지막까지 안렴사로 대해주게.》
박필원은 뜨거운 눈으로 그를 바래웠다.
주막집에 돌아온 조운흘은 수행관리들을 모이도록 지시를 내렸다. 한밤중에 내린 령이라 관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하며 주막집앞마당에 모였다.
조운흘은 수행관리들을 둘러보고나서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래일 아침일찍 이 고장을 떠나겠다. 다들 보다싶이 고을백성들은 몹시 어렵게 지내고있다. 게다가 우리까지 왔으니 대접할것도 없어 군수건 백성이건 안타까와하고있는데 한시라도 여기를 빨리 뜨는것이 백성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본다.》
이때 한 관리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면 고을의 문서대장들과 조세장부, 송사문제 등을 어떻게 처리하시려 하나이까?》
조운흘은 미리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있었는지라 거침없이 말했다.
《흉년이 든 여기에 무슨 장부검열이 필요한가? 낮에 고을을 돌아보아서 알겠지만 이곳 백성들은 기근이 들었어도 오히려 서로 의지해가며 살아가고있고 군수도 자기의 본분을 다하느라 애쓰고있지 않는가? 아마 다른 고장 같으면 당장 무슨 변고가 났을것이다. 그러니 구태여 장부를 검열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의견이 있으면 말하라.》
그러자 나이지숙한 관리가 나섰다.
《안렴사어른의 의향대로 하겠소이다. 흉년든 고장에서 이 정도면 정사가 잘된셈이니 따로 장부요, 송사요 하는따위를 검열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이다.》
수행관리들도 이구동성으로 검열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은 이런 못사는 고을에 머무르면서 검열을 했댔자 제입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것이 뻔하므로 빨리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좋다! 래일 떠나도록 하자.》
다음날 아침일찍 조운흘은 일행을 거느리고 배천고을을 조용히 떠났다. 그를 바래준것은 송아지적 친구인 박필원뿐이였다.
후날 그들은 마주앉을 때마다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화제에 올렸다고 한다.